만통음제의 실종
묵향은 저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낙조(落照)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으려면 한 시진은 더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는 아름다운 노을이라도 감상하듯 멍하니 그쪽을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화는 평소답지 않게 은근히 분위기를 잡고 있는 묵향에게 선뜻 말을 걸 수가 없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묵향이 저렇듯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소연이 치명상을 입었을 때뿐이었다. 소연은 지금 완쾌되어 이곳 양양성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뭔가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하지만 마화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교에서 온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패력검제와 함께 이쪽으로 출발했다고 했다. 현천검제의 경우 마교 내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되어 있었기에 그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화는 몰랐다.
어찌 되었건 소연에게 패력검제라는 화경급 고수가 함께하는 이상, 그녀가 또다시 생명에 위협을 받을 상황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게 마화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묵향보다는 마화가 그 사실을 먼저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교에서 오는 모든 보고서를 묵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동안 묵향의 눈치를 살피던 마화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와 임충을 찾아갔다.
“무슨 일인데?”
“혹시 총단에서 온 보고서들 중에서 나 모르게 교주님께 전달된 게 있었어?”
임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군.”
“대체 무슨 소리야?”
“황도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 봐.”
남경에 다녀온 후부터 묵향이 왠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마화가 이렇게 단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악비 대장군이 죽는 큰일이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묵향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라는 게 마화의 생각이었다.
계속된 마화의 추궁에 임충은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전에 너한테 다 말해 줬잖아.”
“그거 말고 또 다른 일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로서 마화의 예감은 정확한 것이었다. 지금 묵향은 오래전에 죽은 한 여인을 추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옥령인. 그녀의 혈족을 비롯해, 그녀를 추억할 만한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린 후 묵향은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황도에서 공동파의 한 무인이 적하마령검법을 펼치는 걸 본 순간, 그녀와 얽힌 수많은 추억들이 번개처럼 묵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설마 그녀의 전인(傳人)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그 녀석은 그 검법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그녀에게 직접 배웠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군. 어딘가에 비급이 남아 있었다는 말이겠지.’
그녀의 흔적을 찾아서 없애 버릴까? 아니면 그냥 놔둘까? 좀 더 세월이 지난 후, 어쩌면 그놈 말고도 적하마령검법을 익힌 자들이 더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런 놈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질 가능성이 있을 바에는 아예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없애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묵향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적하마령검법이야말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겨 놓은 마지막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과 만났음을 증명하는…….
저녁이 될 때까지도 묵향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임충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마화가 묵향에게 뭔가 말은 걸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궁리하고 있을 때, 한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마화를 발견하자 애써 침통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머나먼 변방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중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교 총단이 훨씬 더 변방에 있는 것이겠지만, 마교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총단이 중심이고 이쪽이 변방인 것이다.
살갑게 인사하는 그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 세인들이 마기(魔氣)라고 부르는 음산한 기운이었지만, 십만대산을 떠난 후 오랜만에 접해 보는 기운이라 그런지 마화에게는 왠지 정감까지 느껴졌다.
이토록 강렬한 마기라면 상승의 경지에 접어든 고수라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순간 마화의 머릿속에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다.
“아! 혹시 수석장로님을 모시고 있는…….”
겉으로 뿜어지는 패도적인 기운과 달리 상대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왕지륜이라고 합니다, 부대주님.”
“그런데 그대가 여기까지 어쩐 일로 왔지요?”
“교주님께 급히 전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주님께서는…….”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화가 느끼기에 묵향은 지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십만대산에서 이 정도의 고수가 전령으로 달려올 정도라면 뭔가 급한 보고 사항이 있다는 말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왕지륜이 다급히 물어왔다.
“교주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 표정이 워낙 절박했기에 마화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교주의 집무실을 가리켰다. 그러자 왕지륜은 상관인 마화에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지금 교주께 전해야 하는 중대한 비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교주의 아버지께서 실종되셨다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왕지륜은 무릎을 꿇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음성에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혹시 이로 인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하지만 묵향이 대꾸없이 멍하니 서 있자 왕지륜은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제서야 왕지륜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 묵향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왕지륜은 묵향이 물어오자 고개를 푹 숙이며 처연한 음성으로 외쳤다.
“교주님의 아버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지금 즉시 수색대를 보내야…….”
“아·버·지가 실종되셨다고?”
옛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던 걸 방해받은 것만도 열 받는 일인데, 그놈이 꺼낸 말이 단 한 마디도 듣고 있을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으니…….
묵향의 안색에 살짝 분노가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눈치 채지 못한 왕지륜은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났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것도 다 자신이 아르티어스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지금 그게 자신의 목줄을 죄고 있는 행위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 그러니까 어르신이 갑자기 교주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하시기에 이쪽으로 모시고 오는 도중 기방에 들렀습니다. 최대한 대접을 잘하여 모시라는 수석장로님의 당부가 있으셨던 터라, 최고의 기녀들과…….”
묵향은 이런 헛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도 감히 감당이 안 되는 괴물이 바로 아버지인 아르티어스 아닌가. 하지만 왕지륜은 그런 묵향의 생각을 모르는지라 계속 주절거리며 그때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 세상에 누가 본좌의 아버지를 감히 해할 수 있단 말이냐?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하신 거겠지.”
“하, 하지만…….”
묵향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더 옥령인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저, 그래도 실종이 분명…….”
순간 묵향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하지만 애써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묵향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속에는 더 이상 입을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진한 살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다 알아들었으니 이제 나가서 푹 쉬도록 해라.”
“예? 하지만 그게…, 아버님께서 실종되셨는데…….”
퍽!
그와 동시에 왕지륜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온 천지가 환한 빛에 감싸이는 걸 봤다.
잠시 기절해 있던 그는 곧이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재빨리 부복했다. 그러면서 힐끔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연적(硯滴) 하나가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신경질이 난 교주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연적을 자신에게 집어 던진 모양이다.
“요, 용서를…….”
“꺼지라면 꺼질 것이지,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옛!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온 왕지륜은 이마에 튀어나온 혹을 문지르며 마화에게 슬쩍 물었다.
“어르신께서 실종되셨는데도 아예 신경도 안 쓰시고…, 오늘 교주님께서 별로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마화는 마치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나직하게 대답했다.
“황성에서 돌아오신 후 별로 심기가 편치 않으세요. 그리고 교주님께서 알았다고 하셨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군요.”
“에효~, 수석장로님께 어떻게 보고드려야 할지…….”
“있는 그대로 보고하세요. 교주님께서는 어르신의 실종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다고 말이에요. 그러면 수석장로님께서도 이해하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부대주님.”
마화의 말대로라면 좋겠지만 보나마나 수석장로는 자신을 엄청 갈굴 게 뻔했기에 힘없이 십만대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왕지륜이었다.
왕지륜이 돌아가고 며칠이 지난 후 임충과 함께 이러쿵 저러쿵 잡담을 나누고 있던 마화에게 거지 한 명이 안내되어 들어왔다. 거지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오자 임충은 마치 급한 일거리라도 생각난 듯 재빨리 도망쳐 버렸고, 그녀 혼자 남아 그 지독한 악취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거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죠?”
“의창(宜昌) 분타에서 흑풍대 부대주님께 전달해 달라면서 이걸…….”
거지는 품속에서 땟국물이 좌르르 흐르는 서신을 꺼내어 마화에게 건넸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자세히 보니 서신 위로 이 몇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 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차마 서신에 손을 뻗치지 못하고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혹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나요?”
그 질문에 거지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상대가 꽤나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지만 마교도들에 대해 썩 좋지 못한 선입견을 지니고 있던 그였기에 대화를 즐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서신만 전달받았을 뿐,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서신을 직접 받아야만 했다.
“수고했어요. 이건 수고비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동료들과 술이라도 한잔…….”
은자 한 냥을 건네준 뒤 서둘러 거지를 돌려 보낸 그녀는 이부터 잡기 시작했다. 손톱으로 세 마리를 꼭꼭 찍어 죽인 후 더 이상은 없는 듯하자 그녀는 서신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