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증거
양양성 주둔 마교 파견대로부터 날아온 협조공문을 살펴본 옥화무제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죠?”
총관은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에서 날아온 협조공문에 대해서는 최대한 빨리 답을 해 주라는 태상문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날아온 건 당최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그래서 옥화무제에게까지 공문이 넘어왔다는 것이리라.
협조공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 본 옥화무제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양양성을 벗어나기 힘든 흑풍대주 관지가 금나라 황제에 대한 정보를 요청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요청은 관지 장로가 아닌 마교 교주, 즉 묵향이 보냈다고 봐야 했다.
그가 왜? 어디에다가 쓰려고 이 정보를 요청한 것일까?
“아직까지 본녀에게 보고되지 않은 마교 쪽의 움직임이 있었나요?”
“결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태상문주님. 1종대가 임시 둥지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끝으로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1종대’라는 것은 혈랑대를 지칭하는 암호였고, ‘임시 둥지’는 곧 대별산맥에 마련된 마교 주력 부대의 임시 거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무영문에서는 아직까지도 혈랑대의 정식 명칭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묵향이 마교를 장악한 후 무림은 오랜 세월 평화가 지속되었다. 20여 년 만에 처음 이들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 만큼 마교의 최상위 무력 단체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정체를 마교 쪽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무영문에서는 혈랑대를 ‘1종대’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대별산맥에 와 있는 전투단들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옥화무제가 묵향이 무슨 꿍꿍이로 금나라 황제의 정보를 요구한 것인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총관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황제를 납치하려는 생각이라도…….”
옥화무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단순무식한 무골(武骨)이라고 하지만 그도 일파의 지존이에요.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일 리는 없어요.”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무림맹에서 황실에 고수들을 파견해 뒀듯, 장인걸 또한 금 제국을 대표하는 지존을 무방비 상태로 놔뒀을 리 없다. 5만에 달하는 근위병을 연경에 배치한 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연경으로 통하는 군사적 요충지들에 도합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포진해 놨다.
이렇게 드러나 있는 전력 외에도 무영문의 조사에 따르면 40여 명에 달하는 특1급 고수들을 비롯해 1천에 가까운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궁 내에 얼마나 많은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는지는 무영문에서조차도 제대로 파악해 내지 못했다.
황궁에 투입한 첩자들 중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마다 그들이 뭔가에 접근했을 거라는 것 정도만 추정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만큼 장인걸 휘하의 편복대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집단이었다.
금송전쟁에 마교가 끼어들었다는 걸 장인걸이 알아차린 지도 꽤나 오랜 시일이 지났다. 그 정도라면 장인걸도 마교의 소수 정예가 치고 들어올 가능성에 대비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묵향이 생각이 없는 단순 무식한 무골이라고 해도 그런 곳에 단독으로 쳐들어갈 리는 절대로 없다.
더군다나 요 근래 묵향이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은 단순 무식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잔대가리가 잘 돌아가는 교활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혹, 황제를 암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겠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교주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하는 거죠? 지금껏 그는 적의 우두머리를 암살해서 단번에 전쟁을 끝내 버리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옥화무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총관에게 물었다.
“추밀단에는 문의해 봤나요?”
총관은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너무나 정보가 부족해 추밀단에서도…….”
과거처럼 무영문의 많은 정보조들이 마교를 감시하고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력 부족으로 인해 마교에 대한 감시는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악비 대장군의 죽음에 대한 실망감이 그만큼 컸던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왜 안 하던 짓을 하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잠시 고심하던 옥화무제는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넘겨주도록 하세요.”
그 말에 총관은 걱정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예? 그래도 상관없겠습니까? 지금까지 파악된 정보로는 특급살수 열 명을 한꺼번에 투입한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한데요. 그러다가 괜히 흑살마왕의 성질만 건드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옥화무제는 다음 문서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 안건은 뭐죠?”
“예, 황궁에서 무림맹에 무사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답니다.”
“왜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예, 왜군들이 양양성으로 가기 위한 이동로가 황궁 인근을 통과할 뿐만 아니라, 마교에서 처음에 말한 1만이라는 숫자와도 너무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 문젭니다. 더군다나 교주가 황궁에 잠입해 대신들을 납치하여 고문했을 뿐만 아니라, 황군과도 접전을 벌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기에 황실에서는 마교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입니다.”
“하긴, 지금까지 해적질을 일삼던 놈들이 갑자기 우리를 돕겠다고 병력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기는 하죠.”
잠시 문서를 뒤적거리며 읽고 있던 옥화무제는 슬쩍 고개를 들어 총관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황실에서 무림맹에 무사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들을……?”
총관은 옥화무제가 채 말을 끝맺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뭘 물어보는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예, 태상문주님이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흠, 아주 곤란한 일이군요. 지금과 같이 혼란한 상황에서 자칫 마교와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옥화무제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던 옥화무제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바로 그거야!”
옥화무제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총관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교주가 금나라 황제를 암살하려는 이유 말이에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마교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 있어요. 교주는 금나라 황제를 암살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는 금나라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리고 싶은 거예요.”
총관이 듣다 보니 옥화무제의 말이 그럴듯했다.
“태상문주님의 예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엉클어진 실마리가 모두 풀려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갑니다.”
옥화무제는 다급히 무림맹에 보낼 문서를 작성한 후 총관에게 건네주며 명령했다.
“지금 당장 무림맹에 전서구를 띄우세요. 무림맹이 황궁을 도와 왜군을 치는 일을 반드시 막아야만 해요. 기껏 공들여서 10만에 가까운 구원병을 얻어 냈는데 그걸 몽땅 다 잃는다면 교주가 얼마나 분노하겠어요?”
“존명! 지금 당장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겠습니다.”
“최소한 다섯 마리 이상 날리도록 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림맹에 도착해야 하니까.”
“옛! 알겠습니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총관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옥화무제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시 한 번 더 찬찬히 생각해 봐도 자신이 내린 결론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면?
옥화무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어디에 쓸 정보인지 정확히 말해 주면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워낙 상식을 초월한 인간이다 보니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가 너무 힘들어.”
오랜 세월 무림에서 닳고 닳은 옥화무제였지만 묵향을 상대하는 것만큼은 쉽지 않았다. 어떨 때는 혹시 머릿속에 구렁이 열두 마리쯤 넣어 놓고 일부러 순진한 척 능청을 떠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묵향의 행동은 종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오랫동안 묵향과 부대끼며 지내오다 보니 이쪽에서 뒤통수만 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그 신뢰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