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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곳에 위치한 무림맹의 비밀회의실에는 무림맹주와 몇몇 수뇌부가 모여 황실에서 날아온 밀서에 대해 긴박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황실에서 정식으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맹주님.”
황실에서 요구하는 것은 왜군 격퇴에 무림맹의 힘을 보태 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관군의 힘만으로 왜군의 대군을 격파하려면 막대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맹주님. 이제 결정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허허, 이거 참. 아주 곤란한 일이로구먼.”
청호진인의 계속되는 채근에도 맹주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단순하게 처리할 사안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현재 마교와 무림맹은 동맹 관계다. 문제는 최근 마교의 행보를 보면 절대 동맹으로의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황실의 고관대작뿐 아니라 고위직 환관까지 납치해 고문하는 만행을 저지른 마교. 그 과정에서 공동파, 아미파와 충돌해 수십에 달하는 고수들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출동한 황군 기마대 4백여 기를 도륙하기까지 했다. 맹주가 가장 언짢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무도한 짓거리를 해 놓고도 아직까지도 무림맹에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뭔가 해명을 하거나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하는 것이 동맹된 자의 기본 예의가 아닌가.
그 때문에 황실과 마교 사이에는 더욱 골이 깊어진 모양이다. 절강성에 상륙한 왜군들이 마교가 불러들인 동맹군임을 뻔히 알면서도 전멸시킬 작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무림맹으로서도 황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자신들을 돕겠다고 병력을 보내온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그 숫자 또한 어마어마했다. 마교 쪽에서는 1만 명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현재 절강성에 상륙한 왜구의 수는 무려 7만을 상회한다는 정보였다.
그리고 그 수가 또 얼마나 더 불어날지는 개방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차례에 걸쳐 계속 증원병들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마교는 왜군을 양양성으로 이동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하지만 그 이동로가 황도 부근을 통과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이 양양성으로 가는 척하며 곧바로 황성을 향해 진격한다면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무림맹의 수뇌부는 시험 아닌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황실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동맹인 마교를 믿을 것인가. 물론 마교를 믿어야 하겠지만, 최근에 보인 마교의 행보와 지원군이라고 온 병력이 그동안 노략질로 유명해진 왜군들이라는 걸 보면, 마교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그냥 손놓고 있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봤지만 맹주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물을 한 번 쏟으면 다시 잔에 담을 수 없듯, 이번 결정이 마교와의 관계에 미칠 영향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때 감찰부 소속의 문사 한 명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감찰부주에게 문서 몇 장을 건네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감찰부주가 뭔가 하고 힐끗 보다 갑자기 정색을 한 뒤 몰두해서 문서를 읽고 있는 걸 보자 청호진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질책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사제.”
무슨 일인데 맹주님과의 회의조차 멈추고, 문서를 읽느라 정신을 팔고 있느냐는 질책이었다. 이에 감찰부주는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옥화 봉공님께서 긴급으로 보내신 겁니다. 이번 회의에 참고 자료가 될 듯해서 수하가 급히 들고 온 모양입니다.”
감찰부주는 문서를 맹주에게 공손히 바치며 말했다.
“읽어 보시는 게 결단을 내리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될듯합니다.”
맹주는 문서를 쭉 읽어 본 후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청호진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허~, 이게 사실이라면 출병은 불가하구먼.”
청호진인은 맹주에게서 문서를 넘겨받아 급히 읽어 본 후 맹주의 의견에 반박했다.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마교를 믿을 수 없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군이 황성 부근을 통과하다가 창을 거꾸로 잡으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실의 뜻을 따르지 않으신 맹주님의 입지만 위태로워질 겁니다.”
“그러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마교는 조잡한 변명쯤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이렇듯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고 하는데 말이야.”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감찰부주가 끼어들었다.
“맹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사형. 만일 이쪽에서 왜군을 전멸시켰는데 저들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만큼 난감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일단 황실 쪽을 설득해서 출병을 늦추고, 왜군의 이동 경로를 황도와 멀리 떨어진 다른 쪽으로 해 달라고 마교에 요청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청호진인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교주가 흑심을 품고 있다면 이쪽에서 시간 여유를 주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교가 금나라 황제를 암살하는 데 성공이라도 해 보십시오. 저들은 아주 당당하게 대군을 황성 쪽으로 이동시킬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만약 금나라 황제의 암살이 성공한다면 청호진인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지금까지 마교가 행한 태도를 보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사악한 집단이었으니까. 맹주는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흔들다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흠…, 사질은 저들을 믿지 않는 모양이구먼.”
“물론입니다, 맹주님.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어찌 마교도들의 말을 믿는단 말입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감찰부주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열심히 고민을 해 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허허, 이거 참. 일이 정말 고약하게 되었습니다.”
“고약할 것도 없네. 저들이 황제를 암살하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
그 말에 맹주는 귀가 솔깃했는지 급히 물었다.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금나라 쪽에 정보를 슬쩍 흘리는 겁니다. 마교가 황제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이죠. 안 그래도 철옹성 같은 곳인데 만반의 대비까지 갖추게 되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살수라도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왜군을 전멸시킨 것을 따지고 들면,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황실에서 도저히 못 믿겠다고 협조를 요청해 왔다고 하는 겁니다. 저희들이야 충성스러운 송나라 백성들이니 황실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마교가 우리에게 믿을 만한 동맹의 ‘증거’를 보이지 못했으니 더 이상 따지지 못할 걸로 생각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충분히 명분은 서게 된다. 그러나 맹주는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흐음…….”
고심하는 맹주를 바라보며 청호진인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일은 황실에서 진행하고 있는 작전입니다. 애초에 황실과 이런 갈등 관계를 조장한 쪽은 마교가 아닙니까? 씨앗을 뿌린 것은 그들이니 그에 따른 결과도 그들이 책임져야지요.”
한참 동안 고심하던 맹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구먼. 청호 사질은 각 파의 장문들에게 협조공문을 발송하도록 하게.”
그 말에 청호진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품속에서 문서 몇 장을 꺼내 들며 맹주에게 보여 주었다.
“시간이 촉박할 듯하여 제가 임의로 각 파의 장문인들에게 전서를 보냈습니다. 열두 개 문파에서 제자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맹주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먼저 전서를 보낸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음에도 맹주는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랬군. 잘했네, 잘했어.”
청호진인이 맹주의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각 문파에 전서를 보낸 건 사안의 급박함도 있었지만, 무림맹 체제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무림맹에는 맹주의 명령으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독립 세력이 없기에, 대규모로 무사를 동원하려면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요청해서 인력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급작스럽게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에 맞춰 인력을 동원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청호 장로는 월권행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맹주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각 파의 장문들에게 협조공문을 날렸던 것이다. 맹주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협조공문을 날려서는 너무 늦으니까 말이다. 문서에는 각 파에서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온 인원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문서를 살펴보고 있는 맹주의 눈치를 살피며 청호진인이 슬쩍 물었다.
“지휘는 누구에게 맡기는 게 좋겠습니까?”
청호진인의 물음에 맹주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맹호검군 장로에게 맡길까 하네.”
“맹호검군보다는 차라리 만수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제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걸 맹호검군에게 양보한다는 건 참으로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맹주님.”
왜군들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각 파에서 보내 주기로 한 무사들만 제대로 온다면 그들을 처리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따라서 무사들을 지휘하는 자는 커다란 공을 거저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호진인은 그런 공을 다른 문파에게 양보한다는 게 속이 쓰렸던 것이다.
“흠…, 사질이 그리 생각한다면 만수에게 맡기기로 하지. 누가 가도 별 상관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그럼 만수 사제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언제 출발할 수 있겠나?”
“이미 각 파로부터 차출된 인원이 맹을 향해 출발한 상태니, 늦어도 이틀 안에는 출발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제서야 문서에서 눈을 뗀 맹주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차질이 없도록 잘 부탁하네.”
“옛, 맹주님!”
현 시점에서 맹주로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무작정 동맹 관계인 마교를 믿기에는 왜군의 막대한 수가 너무나도 큰 압박으로 다가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