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을 보여 주마
작전대로 철영이 거느린 2개 전투단이 장인걸과의 접전에 들어갔을 때, 묵향은 혈랑대를 거느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뛰어난 고수들로만 구성된 혈랑대가 함께하는 만큼, 이동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종적을 발견할 수 없도록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악지형만 골라서 이동하고 있었기에 이동 속도가 생각만큼 그렇게 빠른 건 아니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육포를 씹고 있는 묵향에게 동방뇌무 장로가 다가와 보고했다.
신장이 5척 6촌밖에 안 되는 그였지만, 워낙 바짝 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실제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아니, 그의 키가 커 보이는 것은 몸매 때문만이 아니라,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길게 째진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만들어지는 무서운 인상 때문인지도 몰랐다.
무시무시한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동방뇌무 장로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 다가왔다. 마교의 전설적 고수인 묵향과의 동행이 내심 편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교주가 딱딱한 육포 쪼가리나 씹어 먹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내일 점심나절쯤에는 돌격선에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교주님.”
묵향은 씹고 있던 육포를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모두들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고 해라. 오늘도 경계는 본좌가 서겠다.”
순간 동방뇌무 장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경계를 모두 교주님께서 서지 않으셨습니까? 교주님께서도 휴식을 취하셔야…….”
“본좌는 이 정도에 운기조식까지 취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네들은 다르지 않은가. 모두들 내일 전투에서 지닌 바 실력을 전부 발휘하려면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둬야지.”
“그, 그래도…….”
쭈뼛쭈뼛하면서도 동방뇌무 장로가 그대로 서 있자 묵향은 슬그머니 짜증이 일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생각해 저러는 것인데 화를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본좌가 경계를 서는 걸 못 믿겠다는 것인가?”
“그, 그건 아닙니다, 교주님. 너무 송구스러워서…….”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네. 본좌에게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수하들을 위해서 경계쯤 서 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러는 겐가?”
사실 교 밖에만 나오면 거의 잠을 안 자는 묵향이었다. 안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주변의 모든 게 느껴지는 판에 따로 보초를 세워 둘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동방뇌무 장로의 입장은 달랐다. 존귀한 천마신교의 교주가 자신들을 위해 피곤을 무릅쓰고, 직접 경계를 서겠다는 의미로 다가왔으니까.
동방뇌무 장로는 감격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떨며 교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자네도 가서 좀 쉬도록 하게.”
재차 묵향이 이렇게 말하니 동방뇌무 장로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존명!”
다음 날 새벽부터 또다시 강행군이 이어졌다. 혈랑대가 연경 외곽에 도착한 것은 동방뇌무 장로의 추측대로 점심나절쯤이었다.
“이대로 곧장 돌격하라고 명령할까요?”
묵향은 하늘을 한번 힐끗 본 후, 시선을 지평선 저 먼 곳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연경의 성곽 위로 향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동방뇌무 장로의 눈에는 기다란 성벽만이 보였지만, 묵향에게는 성벽 위 병사들의 얼굴까지 자세히 보였다. 나른한 듯한 표정으로 하품까지 하면서 옆에 서 있는 병사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
묵향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아직까지 장인걸 쪽에서 포착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병사들의 경계 태세가 저렇게 느슨할 리 없으니까. 잠시 궁리하던 묵향은 자신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방뇌무 장로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야습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의견을 물은 것이었지만 동방뇌무 장로는 그걸 묵향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옛,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적회색 땅거미가 음산하게 사위를 물들일 무렵, 작전토의가 시작됐다. 동방뇌무 장로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고 땅바닥에 대충 지도를 그리며 수하들에게 설명했다. 주위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모두들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기에 그 누구도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동방뇌무 장로는 한켠에 앉아 자신의 작전을 듣고 있는 묵향을 향해 긴장된 시선을 간혹 날렸다. 자신의 작전이 교주의 마음에 들었는지 내심 걸렸기 때문이다.
동방뇌무 장로가 세운 작전은 아주 단순했다. 먼저 혈랑대를 공격조와 수색조 두 개로 나눠, 공격조는 자신이 지휘하고 수색조는 제1대장이 지휘한다. 공격조가 천마혈검대를 중심으로 하는 적의 수비진을 제압하는 동안, 수색조는 전력을 다해 황제를 찾는다는 게 작전의 핵심이었다.
황제는 황궁 내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있을 것이고, 수많은 병력들이 첩첩히 포진해서 지키고 있을 게 뻔했다. 바로 그 점을 역이용하면 손쉽게 황제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게 동방뇌무 장로의 생각이었다.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건 없다. 성내에는 수만에 달하는 수비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명심해라.”
마지막을 훈시로 장식한 후 수하들을 둘러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자,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하도록!”
그러자 제1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황제를 어떻게 찾아내죠? 만약 그놈이 병사들 사이에 섞인다면 알아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동방뇌무 장로는 그런 질문이 나올지 알았다는 듯 자신 있게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종이를 한 묶음 꺼내 들었다. 종이에는 초상화와 함께 뭔가 글씨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내 이럴 줄 알고 놈의 용모파기를 준비해 왔지. 자, 모두들 한 장씩 받으라구.”
황제의 얼굴은 의외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천연색 물감으로 초상화를 그려 놔도 알아볼까 말까한 판국에, 먹물로 그려 놨으니 도무지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황제가 쓰고 있는 화려한 모양의 관(冠)만 아니라면, 여기 모여 있는 혈랑대원들 중 비슷한 얼굴이 몇 명은 있을 정도로 평범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초상화를 펼쳐 본 대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아니, 이걸 가지고 어떻게 찾으라구…….”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러면서 옆에 있는 동료와 초상화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언제 금나라 황제 노릇 했었나? 그러고 보니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겼구먼.”
웅성거리는 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묵향으로 인한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동방뇌무 장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그러면 그런 줄 알 것이지, 교주님 앞에서 이런 개망신을 안겨 주다니. 나중에 두고 보자!’
동방뇌무 장로는 재빨리 교주의 안색을 한 번 더 살핀 후,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황제란 놈은 분명 온몸에 금은보화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용모파기를 참·조·하·여 놈을 찾는다면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알겠나!”
동방뇌무 장로의 험악한 인상에 장난기 어린 대화를 주고받던 혈랑대원들은 모두 긴장 어린 어조로 외쳤다.
“존명!”
복명음이 터져 나오자 동방뇌무 장로는 내심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황제는 황궁 가장 중심지에, 그것도 수많은 호위병들에 의해 호위되고 있을 거다. 혹시 모르니 수비진을 돌파한 후 옷차림이 근사한 놈들은 몽땅 다 제압해라!”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