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사위가 온통 시커먼 암흑에 잠겨들었을 때 묵향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들 시커먼 야행복으로 온몸을 감싼 채, 엄청난 속도로 밤하늘을 가르며 성을 향해 돌진했다.
혈랑대원들은 하나같이 마교가 자랑하는 최정상급 고수들인 만큼 어둠 속에 녹아들자 그들의 움직임을 발견해 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기는 이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적으로 하여금 무한한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내성(內城) 안쪽 깊숙한 곳에서 엄청난 마기들이 느껴졌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천마혈검대원들임에 분명했다. 마기를 느끼자마자 앞서 달려가고 있던 동방뇌무 장로는 등에 메고 있던 4척 3촌이나 되는 긴 기형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저쪽이다!”
공격조로 선택된 5개 대가 동방뇌무 장로의 뒤를 좇아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뒤쳐져서 수색조 5개 대가 묵향과 함께 뒤를 따랐다. 천마혈검대가 있는 곳에 황제가 있을 게 뻔했기에, 형식상 두 개 조로 나눴을 뿐이지 그들의 움직임은 함께였다.
금나라 수비군 수천 명이 미지의 공포감에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는 게 먼발치로 보였다. 동방뇌무 장로는 가소롭다는 듯 그들을 힐끗 바라본 후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자신들의 적은 저 앞에 있는 장인걸이 키운 고수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변이 벌어졌다.
“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자신의 뒤를 바짝 뒤따라오던 수하들이 모두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만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요란한 괴성을 흘리고 있다.
“헉! 모, 모두들 어디로 간 것이냐?”
동방뇌무 장로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 챘다. 오랜 관록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닌 것이다. 그는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진법에 빠졌구나.”
이때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동방뇌무 장로는 번개처럼 신형을 돌리며 검으로 막았다. 그의 손에는 뭔가와 격돌한 듯 강렬한 반탄력이 느껴졌지만, 이럴 때 들려와야 할 그 어떤 격타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기괴한 괴물의 울음소리뿐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이는 것도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의 모습뿐이다.
동방뇌무 장로는 자신의 손을 힐끔 쳐다봤다. 방금 전에 손을 통해 느껴진 반응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뭔가가 자신의 검과 충돌했음이 틀림없었다.
“눈도, 귀도 믿지 못한다는 건가? 이런 지독한 진법이 있을 줄이야…….”
혈랑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건 너무나도 간단했다.
혈랑대와 천마혈검대 양쪽 다 마공을 극한까지 익힌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서로 간의 위치는 10리 밖에서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함정을 가운데 놓고 상대가 달려오는 그 반대편 쪽에 서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기만 하면 상대는 마치 불을 본 불나방처럼 알아서 함정에 빠져 주게 되는 것이다.
혈랑대의 첫 번째 목표는 천마혈검대였다.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어가 다른 세력들이 끼어들기 전에 제압하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혈랑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혈랑대원들이 전각 앞의 넓은 광장 중앙을 막 통과할 무렵 구양운 장로의 차가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발동시켜!”
그와 동시에 혈랑대원들의 눈에 비친 주위 경관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바로 코앞에 황제가 거주함직한 거대한 전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원 위를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더군다나 동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물들만 보였다.
이런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진세에 빠졌을 때! 그것도 아주 지독한 환영을 보여 주는 진세에 빠졌을 때뿐인 것이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혈랑대원 각자는 반사적으로 진세를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갔다. 일부 대원들은 전속력으로 앞으로 치달렸다. 일직선으로 달리다 보면 진세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다.
그리고 어떤 대원들은 전력을 다해 위로 솟구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 위로 까마득히 솟구쳤음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평원의 모습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진세가 얼마나 큰 거야?’
혈랑대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진세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도 모르게 광장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위로 솟구친 대원들도 진세가 지니는 지독한 견인력 때문에 자신은 높이 날아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리 높이 솟구치지 못했을 뿐이다.
진세를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날뛰다 보니 꿈에 볼까 두려운 괴물들과 접촉하게 된다. 이게 동료일까? 아니면 적일까?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환영일까?
주위는 온통 지독한 마기와 사기, 요기가 들끓고 있어 마공을 익힌 마교 고수들 특유의 마기조차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그들이 엄청난 고수였기에 지금 이 안에서 날뛰고 있었던 거지, 만약 무공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진세가 지닌 가공스러운 기운에 짓눌려 죽던지 아니면 미쳐 버렸을 것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혈랑대원들. 간혹 가다가 자기들끼리 적으로 오인해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곧바로 멀어졌다.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접전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 * *
진세가 발동됨과 동시에 구양운 장로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
적들이 함정에 빠지자마자 구양운 장로는 독 안에 든 쥐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적은 마교의 최정예. 엄청난 무공을 지닌 놈들로 구성된 특급전투단이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줬다가는 어떻게든 진법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게 분명하다.
놈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최대한 피해를 입혀야만 한다. 놈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 길만이 최선이었다. 지금 여기서 얼마나 많은 놈들을 죽이느냐에 이번 전투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구양운 장로였기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자리를 잡는 대로 모두 화살을 쏴!”
구양운 장로는 사격 명령을 내리며, 자신도 손수 활을 쏘기 시작했다.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천마혈검대원들은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혈랑대를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쉬이이잉! 쉬잉!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괴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며 광장으로 화살들이 빗살처럼 날아들었다.
진 속에 갇힌 혈랑대원들에게 이 공격은 정말이지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과도 같았다. 진세로 인해 온 천지 사방이 환영으로 뒤덮여 코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상태다. 더군다나 괴수들의 울부짖는 괴성으로 인해 다른 소리를 들을 수조차 없다.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 강맹한 내공을 머금은 화살 세례까지 받다 보니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워낙 뛰어난 무공의 고수들이었기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강맹한 기의 흐름을 놓칠 리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한 듯했지만 그들은 곧이어 침착한 표정으로 살벌한 공격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적들의 공격은 점점 더 거세졌다. 연경에 배치되어 있던 1천5백에 달하는 모든 고수들도 서둘러 달려와 공격에 가담했다.
그들이 가세해서 쏴 댄 화살만 해도 엄청난 양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만에 달하는 근위병들이 도착한 다음에는 그야말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화살들이 밤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들이 날리는 화살은 전혀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았기에 자신의 몸에 도달하기 직전쯤에나 알 수 있었다. 진세의 틈새로 포착할 수 있었던 기의 흐름만으로 적의 화살을 어렵게 막아 내고 있었던 혈랑대원들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아 위력이 떨어졌기에 온몸에 철갑처럼 둘러놓은 호신강기로 막아 내며 버티고 있었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연신 활을 쏘아 대고 있던 구양운 장로는 이런 엄청난 공격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버티고 있는 혈랑대의 놀라운 무공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지독한 새끼들! 이렇게 퍼붓는데도 버티다니……. 하지만 전력으로 호신강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계속 쏴 대다 보면 언젠가는 내공이 바닥나겠지.”
“차라리 진천뢰(震天雷)를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편복대주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두 번째 화약 병기가 바로 진천뢰다. 커다란 쇠구슬처럼 생긴 폭탄으로 그 속에 철질려를 무려 2백여 개나 집어넣어 놨다.
화약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강력한 힘으로 철질려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 인마를 살상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였다. 아무리 고수라도 사방에서 폭풍처럼 날아드는 수백, 수천 개의 철질려를 전부 막아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구양운 장로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재수 없으면 진세를 발동시키고 있는 기관 장치가 부서질 수도 있다.”
진천뢰의 엄청난 위력이야 충분히 믿음이 갔지만, 자칫 진세가 파괴되어 애써 우리에 가둬 놓은 호랑이를 밖으로 내보내는 자살 행위에 가까운 짓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자노를 이리 운반해 오라고 할까요?”
그렇다. 초대형 쇠뇌에서 발사하는 강맹한 화살이라면 호신강기만으로는 막기 힘들 게 분명하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빨리 가져오라고 해.”
“존명!”
수하를 보내 놓고 다시금 활을 쏘려고 하던 구양운 장로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무기가 시선을 끌었다. 짤막하면서도 완만하게 휘어진 기형검. 바로 반역도 묵향의 애검 묵혼이 아닌가. 그걸 지닌 흑의복면인 역시 탈출로를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건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에는 긴장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헉!”
구양운 장로는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직접 여기에 왔단 말인가? 구양운 장로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묵향으로 추정되는 흑의복면인을 향해 조준해서 화살을 날렸다.
흑의복면인은 다른 놈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마지막 순간에는 기를 이용해서 조금씩 각도를 틀어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유도한 화살도 흑의복면인은 검을 휘둘러 간단하게 처리해 버렸다.
구양운 장로는 급히 주위에 있는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모두들 저기 생쥐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놈을 노려라. 시커멓고, 짤막한 기형검을 가지고 있는 놈! 서둘러!”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그의 옆에 서 있던 10여 명의 대원들이 일제히 활 끝을 돌려 흑의복면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방어막을 뚫을 수는 없었다.
“과연! 역대 최강이란 게 헛소리는 아니었군.”
이때 흑의복면인이 아무리 달려 봐야 답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위로 뛰어올랐다. 기세 좋게 위로 솟구쳤지만 3장 정도 올라가자 뭔가에 막히기라도 한듯 멈칫거렸다. 아래 쪽으로 빨아들이는 진세의 강력한 흡인력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몇몇 혈랑대 고수들이 위쪽으로 뛰어올라 진세를 벗어나려고 시도했었지만 모두들 실패한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자신은 진세가 가져다주는 환각에 의해 평소처럼 수십 장을 날아오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전혀 위쪽으로 올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은 달랐다. 다른 고수들이 3장을 고비로 아래쪽으로 내려왔음에 비해, 그의 몸은 3장쯤에서 멈칫 하더니 다시금 조금씩 위쪽으로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구양운 장로의 눈에 경악심이 어렸다. 진세의 흡인력이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양운 장로는 정신없이 외쳤다.
“빨리 폭발시켜라!”
“예? 폭발은 최후에나…….”
“잔말 말고 빨리!”
구양운 장로는 묵향으로 추정되는 고수가 진세를 탈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자마자 심지에 불을 붙이라고 명령했다. 저런 엄청난 고수가 진을 벗어나게 되면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가 없을 게 뻔하니까.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제3대장은 진세 밑에 설치되어 있는 자폭 장치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특별하게 제작된 심지는 말이 달려가는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타 들어갔다.
환혹파멸진의 아래쪽에는 대략 3만여 근(약 11톤)에 달하는 화약과 1천5백여 개의 진천뢰가 깔려 있었다.
처음 진세를 구축할 때, 편복대주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그때까지 제작된 화약과 진천뢰를 몽땅 다 이 진세 밑에다가 설치했다. 이건 최강의 적들을 상대하기 위한 함정이었고 그런 만큼 진세만으로 상대하기 벅찬 경우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적들을 아예 진세 채로 날려 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편복대주는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편복대주의 말에 구양운 장로는 이런 엄청난 진세에 뭣 때문에 아까운 화약과 진천뢰까지 묻어 두냐고 불평을 늘어놨었다.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천마혈검대를 이끄는 대주였기에 자신들을 믿지 못해서 편복대주가 이런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구양운 장로는 애타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도 이렇게 많은 화약이 폭발하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보여 줄지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상대는 무림 최고의 고수. 과연 이걸로 놈을 없앨 수 있을까?
편복대주는 진세 아래에 묻은 화약의 양이 웬만한 성(城)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양이라고 장담했지만, 이 진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흡인력을 뚫고 올라오는 흑의복면인의 가공할 만한 신위를 생각하면 전혀 미덥지가 못했다.
‘완성되는 시일을 조금 더 늦추더라도 더 많은 양을 묻으라고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그렇다고 지금 땅을 파고 화약을 더 가져다 묻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차피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흑의복면인이 진세를 돌파하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것뿐이었다.
“대주! 화약이 터지기 전에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달려온 제3대장의 말에 구양운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여기서 저자를 잡지 못한다면 우린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만약 저자가 내 예상대로 묵향 부교주라면 같이 죽는다고 해도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야. 자네는 무공이 떨어지는 자들에게 폭파 범위 밖으로 나가라고 해라.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
“존명!”
말을 마친 구양운 장로는 입술을 꽉 깨문 뒤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등에 메여 있던 검 네 자루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스르르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흑의복면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구양운 장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이 시전된 것이다.
불과 몇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구양운 장로에게 있어서 그건 마치 영원과도 견줄 만큼 긴 끔찍한 시간이었다. 점점 위쪽으로 상승하고 있는 흑의복면인. 만일 그가 진세를 탈출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구양운 장로가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그는 화약이 터질 동안 조금이라도 흑의복면인의 움직임을 늦추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린 것이다.
콰콰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미리 지시를 받은 고수들은 뒤로 빠졌지만, 후퇴 명령을 받지 못한 근위병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온몸이 산산이 찢겨 나갔을 정도로 폭발의 충격파는 엄청난 속도로 사방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뛰어난 고수인 구양운 장로의 눈에는 마치 천천히 흘러가는 연극이라도 되듯 하나하나가 다 보였다.
1차 폭발의 압력에 의해 1천5백여 개의 진천뢰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고, 그 진천뢰들이 폭발함과 동시에 가공스러운 2차 폭발이 이어졌다.
땅속에 묻혀 있던 진천뢰들이 불과 1장 정도 떠오른 후 폭발했기에, 1차와 2차 폭발 간의 시간 차는 거의 순간이라고 불러도 무색할 정도로 짧았다.
구양운 장로는 폭발의 여파로 몸이 휘청거리는데도 불구하고 흑의복면인이 있는 쪽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광장을 몽땅 집어삼킨 검붉은 화염과 빗살처럼 날아다니는 철질려들. 그리고 처절한 비명성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더라도 결코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것도 폭발의 중심점인 저 안쪽에서는 더더욱.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구양운 장로는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엄청난 기의 파장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시뻘겋게 솟아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로 그 흑의복면인이었다.
“이, 이런 젠장! 그 속에서 살아남았단 말이냐?”
구양운 장로는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며 주위에 있는 천마혈검대원들과 고수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전력을 다해 탈출해라! 빨리!>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흑의복면인과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함정 속에서 살아남은 괴물을 무슨 수로 당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