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은 진세에서 탈출하자마자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적의 고수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망할 새끼들!”
편복대주가 연경에 만들어 놓은 함정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진세에서 막 탈출한 묵향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야행복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화기에 새까맣게 그을렸다.
묵향은 찢어진 복면을 벗어 땅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적들을 추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크으으윽!”
마음 같아서는 자신에게 이토록 큰 곤욕을 치르게 만든 놈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갈면서도 묵향은 뒤로 신형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적을 쫓기보다는 부상을 입고 쓰러진 생존자를 구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동방뇌무 장로가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의 왼팔이 통째로 찢겨 날아가고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향의 안위를 걱정해서 달려온 것이다.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동방뇌무 장로! 몸은 괜찮은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동방뇌무 장로는 강인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얼굴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대폭발로 인해 외상은 물론이고 꽤 깊은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다.
“우선 살아남은 대원들을 한곳으로 모아라.”
“송구스럽습니다. 속하가 불민하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대원들부터 모아.”
“예? 예.”
“그리고 누구 한 명 보내서 이 근처에 의원이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해라. 부상을 입은 대원들을 모두 다 살려야만 한다. 알겠나!”
“존명!”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동방뇌무 장로는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묵향의 명령을 실행하는 한편, 비교적 부상이 적은 세 명의 고수를 차출하여 황제를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동방뇌무 장로와 비교적 부상이 적은 자들은 분주히 움직여 광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던 대원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태반이 심각하리만큼 큰 외상과 내상을 입고 있었다.
중상자와 경상자를 가려 어느 정도의 전력이 손상됐는지 파악하고 있을 때, 성 외곽에 포진해 있던 금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폭발의 여파에 간신히 살아남은 금군들과 합류하여 마교 고수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화살을 쏴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림고수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들로서도 양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곳은 그들의 지존 황제와 그의 일가가 기거하는 황궁이었으니까.
“쏴라! 쏴!”
“놈들을 벌집으로 만들어라!”
평상시라면 병사들이 쏴 대는 화살쯤이야 그리 대단한 위협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외상은 물론이고 내장까지 뒤흔들려 버린 상태였다.
몇몇 대원들은 척 봐도 도저히 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공이 담겨 있지 않다 하더라도 금군들이 쏘아 대는 화살은 치명적으로 작용할 게 뻔하다.
묵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천마혈검대가 탈출해 버린 이상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사 놈들이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새끼들! 꼭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린단 말이냐?”
지금껏 무공도 모르는 장졸들을 상대로 그가 칼부림을 한 건 몽고에서의 전쟁 때뿐이었다.
중원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그였기에 적군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병졸들에게까지 칼을 빼 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약 칼을 빼 든다면 그건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게 뻔하다. 하지만 그는 오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새끼들! 오늘 다 죽었어!”
분노한 묵향의 온몸에서 일순 살이 찢겨 나갈 정도의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묵향의 허리를 떠난 묵혼검이 앞쪽으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시퍼런 강기 다발들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번쩍! 콰콰쾅!
묵혼검을 통해 뿜어져 나간 기의 폭풍이 금군을 강타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금군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강기 가닥이 뚫고 들어간 벽과 전각 여기저기에는 구멍들이 숭숭 뚫렸다.
묵향은 미친 듯 주위를 돌아다니며 금나라 병사들을 학살했다. 묵혼검이 번쩍일 때마다 금나라 병사들의 몸은 피를 내뿜으며 갑옷째로 토막 났다.
한 5백여 명 정도 죽였을까? 묵향은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쯤 자신의 학살극에 질려 금군 병사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금군은 그의 기대와 달리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병사들의 눈에는 전혀 공포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묵향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원래가 일반 병사들의 경우 초월적인 존재를 눈앞에 두면 도망치기 바쁘지,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다 제령단이라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약물의 힘이었지만 묵향이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황제라는 놈이 이토록 병사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던가? 그게 아니면 장인걸인가? 그도 아니라면 놈들을 지휘하는 장수가 꽤나 유능한 인물인지도 모르겠군.”
상대 쪽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다. 좀 더 피를 흘려 놈들이 깨닫게 만드는 수밖에.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말이지? 그래, 끝까지 버텨 봐라. 어떻게 되는지 본좌가 가르쳐 주마!”
그날, 연경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게 뭔지 경험해야만 했다.
지루한 소모전
장인걸의 발목을 잡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남양의 군량미를 몽땅 불사르겠답시고 만용을 부렸었던 철영은 되려 매복에 걸려 된통 뜨거운 맛을 봐야만 했다.
더군다나 적들이 보도 듣도 못 한 신무기들까지 써 대니 그 피해는 더욱 가중되었다.
하지만 마교 고수들은 곧바로 평상심을 회복했다. 마교가 자랑하는 최정예들인 만큼, 지금까지 오직 무공만을 벗 삼아 고련에 고련을 거듭한 그들에게 그런 얄팍한 잔재주가 계속 통할 리는 없었던 것이다.
철영은 더 이상 정면 대결을 해 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전투를 산발적으로 진행하면서 수하들을 천천히 후퇴시켰다. 숫자가 적은 만큼 적들에게 포위당하면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철영은 퇴로 확보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철영은 일차적으로 성벽이 있는 곳까지 수하들을 후퇴시킨 후 점차 뒤쪽으로 빠져 처음의 돌격선이 있는 곳까지 물러섰다.
일단 마교도들이 숲이 있는 곳까지 물러서자, 장인걸은 병력을 뒤로 물렸다.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가득한 숲 속에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 * *
토성으로 돌아온 장인걸은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놈들이 계속 숲 근처에서 무력시위를 한다면, 그들을 토벌할 대책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바라보며, 장인걸은 자신에게 좀 더 많은 고수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놈들이 숲 속으로 후퇴했다고 해도 끝까지 추격해서 격멸해 버릴 수 있었을 게 아니겠는가.
“안색이 어두우시옵니다, 교주님.”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회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은 내 익히 알고 있으나 오늘 놈들의 용맹스런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한스럽구먼. 만약 저들이 내 수하였다면, 진작에 중원 전체를 무릎 꿇려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된 고수가 없어, 놈들이 숲 속에 숨었다고 후퇴해야만 하는 신세가 되다니……. 너무나도 통탄스럽구먼.”
묵향에 의해 마교 교주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해 자괴감을 곱씹는 장인걸을 편복대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교주님. 놈들이 무공에서 앞서 간다고 하지만, 결국은 무림이라는 우물 속의 개구리일 뿐이옵니다. 어찌 대 금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계신 교주님만 하겠사옵니까?”
“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자네는 뭔가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군.”
“수하들에게 일러 야습을 준비하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마교의 전술을 잘 아는 장인걸은 상대방이 다음에 취해 올 행동을 뻔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밤이 되면 은밀히 공격을 해 올 것이다. 그런데 방어가 아닌 공격이라니…….
“야습? 놈들이 야습해 올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거늘, 어찌 우리 쪽에서 야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수의 수를 봐도 저쪽이 월등하게 많다. 더군다나 양쪽 다 마공을 익혀 서로의 위치를 빤히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놈들이 기습을 가해 온다면 몰라도, 이쪽의 고수들을 동원해서는 기습작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편복대주는 그런 모든 것을 이미 감안하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진천뢰가 있지 않사옵니까? 이미 수하들에게 지시를 해 뒀사오니 교주님께서는 결과만 지켜보시옵소서.”
일단 위치를 파악한 이상,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교도들의 위치를 편복대가 놓칠 리 없었다. 지금 그들의 행동은 편복대원들에게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장인걸 휘하에 있는 다른 고수들과 달리 편복대원들은 정파의 무공을 익혔다.
내공의 발전 속도가 형편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마기 때문이다. 마공을 익혀 자신의 위치를 상대가 훤히 알 수 있다면 첩자로 써먹을 수가 없지 않은가.
편복대주에게 기습 공격 명령을 하달받은 편복대원 다섯 명은 마교도들보다 조금 더 높은 장소에 자리 잡았다. 저 아래쪽에 야영 중인 마교도들은 아주 느긋한 자세로 저마다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사방에 경계를 세워 놨기에 적의 고수들이 접근해 온다든지 아니면 궁수들의 저격을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궁수가 마공을 익혔다면 금방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고, 일반 병사가 화살을 날려 봐야 자신들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설마, 진천뢰를 날릴 줄이야. 물론 진천뢰는 쇠로 만들어져 있기에 매우 무거워 멀리 던질 수가 없다. 편복대원들이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일반인들보다 수십 배나 멀리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편복대원들은 적들보다 높은 위치를 점했던 것이고, 그들이 던진 진천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도 데굴데굴 굴러서 밑으로 내려왔다.
뭔가 이상한 소음이 들려오자 쉬고 있던 마교도들은 어느새 무기를 움켜쥐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그런 그들의 눈에 시커먼 쇳덩이가 자신들을 향해 굴러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어라? 낮에 봤던 그거 같은데?”
“꾸엑! 바로 그거다. 빨리 피해!”
낮에 벌어진 전투에서 진천뢰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 혼줄이 난 마교도들은 저마다 경호성을 질러 대며 재빨리 사방으로 몸을 굴렸다.
사실 심지에 불을 붙여 던지는 진천뢰 따위로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걸 편복대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가 이런 짓을 시켰느냐 하면, 적들이 가만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만들어 신경을 긁으려는 의도였다.
꽈꽈꽝!
일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질려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놀라서 이리저리 피했던 마교도들은 진천뢰가 폭발한 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는 편복대원들을 찾아 산꼭대기로 내달렸다.
하지만 한밤중에, 그것도 꽁꽁 숨은 첩자들을 산속에서 잡아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구석에 숨어 들어갔는지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찾다가 찾다가 포기하고 다시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또다시 날아오는 진천뢰.
철영은 이빨을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다니. 철영이 직접 일어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가자, 한중평 장로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렸다.
“부교주님께서 손수 나서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만간에 그 쥐새끼들을 잡아낼 겁니다.”
그 말에 철영은 약간은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언젠가는 잡아낼 거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래서는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기도 힘들어. 이런 때는 기척을 숨길 수 있는 본좌가 나서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그리고 품속에서 복면까지 꺼내 덮어쓰자, 철영 부교주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