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7화 (583/930)

똑같은 공격이 반복되면 아무리 바보 멍충이라도 적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대략 예상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적들은 마교도들 중에서 극마급 고수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철영이 숨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세 명의 흑의인들이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땅속에 굴을 파는 것이었다. 우선 숨을 자리부터 확보해 두고,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생각이리라.

“그렇게 하니까 재미있냐?”

뒤쪽에 슬그머니 접근한 철영이 이죽거렸지만, 놈들은 그게 동료가 한 말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물론 재미있지.”

“멍청한 새끼들! 여기 낙엽 속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허둥대는 꼴이란…….”

“이런 쳐 죽일 놈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자가 동료가 아니라 정체 모를 괴한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너무 놀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철영은 순식간에 그들 세 명을 제압한 다음 끌고 내려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멍청한 새끼들!”

그렇게 말하면서도 철영은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이들로 인해 큰 고생을 했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들을 보낸 놈은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 분명했다. 마교도들의 장단점을 제법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놈들을 심문해라.”

포로 세 명을 던져 준 다음, 철영은 그들로부터 압수한 진천뢰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놈들이 사용하는 걸 봤기에 이것의 사용법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위력을 지닌 암기를 장인걸의 수하들이 가지고 있는지는 철영도 알지 못했다. 이런 암기는 난생 처음 봤으니까.

한참을 보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한중평 장로가 진천뢰를 보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이거 놈들이 던지던 진천뢰가 아닙니까?”

“한 장로는 이런 암기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글쎄요, 저야 워낙 총타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물정에 어두워서…….”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하던 한중평 장로는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혹 사천당문에서 만든 게 아닐까요?”

“사천당문이 암기의 명가라는 얘기는 들었네. 한 장로 말대로 거기서 흘러나온 물건인지도 모르지. 어쨌건 교주님께 드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그 말에 한중평 장로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로워야 선물이 되겠죠. 교주님께서도 이미 이 녀석의 맛을 보셨을 가능성이 큰데…….”

“그렇구먼. 하지만 교주님께서 직접 가셨으니 무슨 일이 있겠는가? 되려 놈들이 교주님의 신위에 질려 혼비백산하겠지.”

그 후로도 쌍방은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지만 첫날처럼 그렇게 치열한 대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장단점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무모한 충돌을 일으킬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묵향이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끝나는군.”

철영은 짙은 잿빛으로 어두워지고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밤은 구름이 많이 끼어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내릴 게 분명하다.

‘야습을 할까? 말까…….’

짙은 구름이 달을 가리는 만큼 저쪽도 야습에 대비할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마기를 내뿜는 마교도들을 데리고 야습을 해 봐야 곧바로 저들이 눈치 챌 게 뻔하다. 그 때문에 그동안 몇 번이나 야습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시원찮았던 것이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철영을 보며 한중평 장로가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내 마음이 편하게 생겼나? 옥관패 장로는 전사했고 수하들도 많이 잃었네. 교주께서는 절대로 적과 정면충돌은 피하라고 신신당부까지 하셨는데, 내 욕심이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어. 교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가 다 되어 가는 데…, 쩝, 내가 무슨 낯으로 교주님을 뵙겠나? 정말 막막하구먼.”

“피해는 컸지만 교주님께서 내린 임무는 완수해 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장인걸의 발목을 꽉 틀어잡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교주님께서도 그리 크게 문책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더군다나 놈들의 신무기를 입수하는 쾌거까지 이루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위로하기는 했지만 한중평 장로 자신도 교주의 문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안색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부상자들은 좀 어떤가?”

“모두 치료를 마친 후 운기조식에 들었습니다.”

이곳에 온 마교도들은 모두 창상(創傷)과 내상에는 익숙했기에 웬만한 상처는 자체적으로 치료가 가능했다. 하지만 상처가 아주 심할 때는 전문적으로 의술을 익힌 의원에게 가야만 했다.

문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곳에 의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손을 쓰기 힘든 중상자들은 임시방편으로 치료만 한 뒤, 임무가 끝나 퇴각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습을 준비할까요?”

“오늘은 쉬기로 하지. 야습하기 딱 좋은 날인 만큼 저쪽도 대비를 충분히 할 거야. 오히려 밤보다는 새벽에 치고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다. 양쪽 다 조건은 비슷했다. 이쪽은 무공이 뛰어난 만큼 체력이 좋고, 저쪽은 숫자가 많으니 교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저쪽은 밤에 닥칠지도 모를 기습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이쪽은 편복대의 쥐새끼들이 던져 대는 진천뢰 때문에 위쪽에 대한 경계를 엄중히 하다 보니 피로가 가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계획대로 또다시 푸닥거리를 전개한 후였기에 모두들 상처를 치료하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철영은 자신의 무능을 교주가 책망할 것도 두려웠고, 또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소모전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었다. 묵향이 언제 정확히 돌아온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하니 잊고 있었던 장인걸에게 한 대 맞은 곳이 쓰라려 왔다. 독기를 내공으로 억누른 후, 나중에 살을 찢고 부패한 곳을 잘라 내 버렸기에 상처는 아주 깨끗하게 아물고 있었다.

하지만 꿰매 놓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기에 한 번씩 쓰라려 왔다. 철영은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 위에 바르며 투덜거렸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나도 그 망할 흑살마공이나 익혔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이쪽은 한 대만 맞아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그 새끼는 웬만큼 두들겨도 끄떡도 하지 않으니 원…, 이거 더럽고 치사해서 싸우겠나.”

이때, 경계를 서고 있던 수하가 달려오며 외쳤다.

“교주님께서 오십니다.”

순간 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하지만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그날이 온 것이다.

철영은 한중평 장로 등을 거느리고 재빨리 교주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철영은 교주 일행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놀랍게도 혈랑대원들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로들 중에서도 무공이라면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동방뇌무 장로의 왼팔이 날아간 모습에는 정말이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엉망진창인 몰골을 하고 있는 피로한 듯한 교주의 모습을 보고, 철영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저런 묵향의 모습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오, 자네 왔구먼.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네.”

“아니, 어떻게 되신 겁니까? 교주님.”

묵향은 허탈한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장인걸 그놈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네. 그래도 자네가 이곳에서 잘 싸워 준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여기까지 후퇴할 수 있었지.”

철영은 지체하지 않고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임무를 잘 수행했다니, 속하는 그 칭찬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놈의 발목을 잡기는 했지만 초기에 기습을 당해 옥관패 장로까지 잃었습니다. 교의 인재를 허무하게 잃은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허, 옥관패 장로가 죽었다고?”

철영의 말에 묵향은 가슴이 쑤셔 왔다. 묵향과 꽤나 인연이 깊었던 장로가 바로 옥관패다. 처음 무림에 출도하여 부분타주로 일했을 때나 나중에 천지문과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당시 옥관패 장로가 외총관이었기에 그와 함께 일을 했었다.

곱추인 데다가 흑수마공(黑手魔功)까지 익혀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 버린 시커먼 손을 가진 추악한 몰골의 인물이 옥관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향이 그를 좋아했던 건 그가 외모 따위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니…….

묵향은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장인걸, 이 쥐새끼 같은 놈으로 인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어.”

분노한 묵향의 모습에 철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분노가 가라앉은 묵향은 철영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인걸 그놈이 이번 전투를 대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뒀는지는 본좌도 잘 알고 있네. 그래도 자네가 지휘를 잘해서인지 이쪽은 그나마 피해가 덜한 듯하니 다행일세.”

초기에 당한 매복 기습으로 인해 철영 쪽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하지만 혈랑대의 몰골을 보면 자신들이 받은 건 피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정도였다.

거의 극마급에 근접한 특1급 고수들만을 선발해서 구성한 전투단이 혈랑대인데, 그중 절반에 가까운 42명이 전사했다는 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한동안 거동도 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중상을 입었으니…….

철영 부교주는 동방뇌무 장로를 나중에 따로 만나 그간의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금군 병사들이 끈질기게 화살을 날리며 저항한 탓에 사망자가 더욱 늘었다는 것이다. 만약 연경의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된 그놈의 전투만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사망자의 수는 최소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거라는 말이다.

심각한 중상을 입은 혈랑대원들의 상당수가 운기조식 중 산공(散功)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갔다.

역천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지닌 숙명이 바로 산공이다. 평상시에는 상관없지만 노화나 부상으로 인해 내공을 지탱할 만한 여력이 없게 되면, 고무풍선이 터지듯 지금까지 모아 뒀던 내공이 일순간에 흩어지며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연경을 탈출한 후 약간의 시간을 얻게 되자, 묵향은 내상이 심한 대원들의 운기조식을 도와 그들의 내공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많은 대원들이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연경에서 이미 사망한 후였다.

그때의 치열했던 전투를 들으며, 철영은 자신이 연경으로 가지 않게 된 걸 하늘에 감사했다. 만약 자신이 갔다면 절반은커녕, 어쩌면 아예 연경에서 몽땅 다 뼈를 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음에 뭣도 모르고 연경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던 걸 생각하면 뒷골이 서늘해지는 철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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