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묵향은 철영과 합류한 후, 곧바로 대별산맥으로 돌아왔다. 먼저 수하들을 보낸 후 철영과 묵향은 뒤로 처져서 뒤쫓는 적의 첩자들을 말끔히 정리해 버렸기에, 편복대주는 이번에도 묵향이 주력 부대를 어디에다가 감춰 두고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대별산맥에 자리 잡은 마교의 거점은 토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저기에다가 작게는 서너 명, 많게는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토굴들을 뚫어 놓은 것이다. 물론 그 안에 마교도들이 있을 때야 짙은 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두 다 어딘가로 떠난 상태일 때는 입구만 잘 위장해 놓으면 이곳이 마교도들의 근거지인지 알아내기는 아주 힘들었다.
겉으로 봤을 때 근거지는 떠나기 전과 바뀐 게 하나도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근거지에 도착하자마자 마교도들은 적이 침입한 흔적이 있는지 철저하게 수색했다.
적이 들어왔을 때 흥미를 느낄 만한 것들을 일부러 여기저기에 숨겨 놨다. 침입자가 보라고 놔둔 문서들 사이에 눈에 띄지 않게 머리카락을 살짝 걸쳐 놨기에, 만약 다른 사람이 그걸 봤다면 바로 표시가 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외인이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대주.”
그제야 한중평 장로는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묵향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수하들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했고, 양양성에 기별을 넣어 관지 장로에게 의원들과 약재를 풍족히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잘했네. 참, 아버지의 행방은 찾아냈는지, 그것도 관지에게 물어봐.”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묵향의 얼굴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안전한 거점에 도착하자 마음이 놓이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사실 이번 작전은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었으니까.
그걸 눈치 챈 철영은 한중평 장로에게 슬쩍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관지 장로에게서 연락이 올 동안 교주님께서도 잠시 휴식을 취하시지요. 나머지 일은 속하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그럼 부탁하네.”
수하들을 내보낸 뒤 묵향은 자신의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아주 작았지만 내부는 꽤나 널찍했다. 토굴의 구석에는 바짝 말려 놓은 건초를 두툼하게 깔아 놓은 다음, 그 위에 담요를 덮어 놨기에 제법 안락하다고 할 수 있는 잠자리였다. 아주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쉬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묵향은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젠장, 이놈의 빌어먹을 영감탱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꼭 필요할 때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
사실 아르티어스만 같이 있었다면, 만통음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광범위 수색마법을 통해 중원 전체를 뒤진다면, 화경급 고수 하나쯤 찾아내는 건 며칠 걸리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아르티어스야 과로로 인해 며칠 쭉 뻗어 버리겠지만……. 그건 묵향으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아르티어스만 옆에 있다면 부상을 입어 신음하고 있는 수하들을 단번에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경에서 급하게 의원들을 붙잡아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그런 것과 아르티어스의 마법은 비교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르티어스가 곁에 없다는 것이 아쉽게만 느껴지는 묵향이었다.
아무래도 잠이 안 왔기에 묵향은 생각을 바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묵향은 격동되어 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운기조식에 들어간 상황에서 잡념은 곧바로 주화입마로 연결되니까. 수하들에게 내색은 안 하고 있었지만 지금 묵향의 몸 상태도 썩 좋은 건 아니었다.
환혹파멸진이 폭발할 때 빠져나오면서 그도 사람인 이상 경미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상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곧바로 금군과 치열한 접전에 들어갔다.
외부의 기를 흡수할 수 있는 북명신공(北冥神功)을 익힌 초고수가, 한낮 무공도 모르는 병사들과 싸우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공이라는 게 만능은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힘은 근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근력을 떠받쳐 증폭시켜 주는 게 바로 내공인 것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만 명씩이나 되는 병사들을 죽이려 뛰어다니고 또 검을 휘둘러 대려면, 아무리 묵향급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근육들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전신을 든든한 갑주로 감싸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병사들보다 훨씬 더 무장이 잘 갖춰져 있는 근위병이었다. 그런 자들을 갑주째로 베어 버리려면, 강인한 근육의 힘은 물론이고 내공의 소모 또한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무공이라는 게 원래 강력한 능력을 지닌 소수를 상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지, 수만 명씩이나 되는 병사들을 학살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발전했다면 군부에서는 황궁 무예 따위를 발전시킬 게 아니라,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을 가져다가 사용했을 것이다.
그만큼 무림에서 사용하는 무공과 다수를 살상하기 위한 무예는 그 가는 길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연경 전투 당시 번쩍 하며 묵혼검이 빛날 때마다 수십 가닥의 강기다발들이 뿜어져 나갔다. 뭐든지 못 깨뜨리는 게 없다는 강기인 만큼 강기가 부딪친 곳은 두부처럼 박살 나며 찢겨졌다. 사람이건 건물이건 벽이건 전각이건…….
그 여파로 수많은 전각들이 먼지를 날리며 무너져 내렸지만, 사실 그 강기에 맞아 절명하는 병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잘해 봐야 수십 명이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이런 허약한 병사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놈들이 끝까지 화살을 쏴 대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부상을 입은 혈랑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묵향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오랜 전투로 인해 지친 묵향은 근력이 바닥을 기자, 될 수 있으면 내공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커다란 기술들을 위주로 싸워야 했다. 소모된 내공은 북명신공을 통해 계속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단순한 땜질도 한두 번이지, 전투가 계속될수록 그의 몸에는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교도들이 연경에서 찾아낸 의원을 통해 그럭저럭 치료받은 후, 완전히 철수를 완료할 수 있을 때까지 전투를 벌여 댄 묵향은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가 버렸다. 물론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한 듯 보였지만, 몸 안은 무리한 내공의 운용으로 인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별산맥에 돌아오는 동안에도 묵향은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혹사했다. 묵향이 그토록 헌신적으로 움직여 줬기 때문에 더 이상의 희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부하들이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을 게 분명하다.
운기조식을 통해 일단 급한 내상을 치료한 묵향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앉아 있자, 떠올리기 싫어도 이번 전투의 진행 과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특히 자신이 생각하기 싫은 부분들이 더욱 또렷한 영상으로 몇 번씩이나 반복됐다.
자신이 성급하게 내린 결정으로 인해 아끼던 수하들이 어처구니없이 떼죽음을 당했다. 당연히 묵향의 마음은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간 수하들이 떠오를 때마다 ‘조금 더 정보를 모은 뒤 들어가는 거였는데…’, ‘놈들의 함정이 있을지 모르는 만큼 한꺼번에 움직이지 말고 분산해서 움직이는 거였는데…’ 하는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순간의 자만심에 대한 결과는 혹독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회만이 남았다. 자신을 믿고 따랐었던 수하들을 그토록 허무하게 잃었다는 것이.
순간 묵향의 눈에서 옅은 물기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게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난 건 사실이었지만, 묵향은 그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겨우 수하 몇몇의 죽음으로 자신이 이토록 감상적이 되었다는 것 자체를 그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모든 분노를 장인걸에게로 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만은 용서할 수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묵향은 토굴 밖으로 나와서 한중평 장로를 찾았다.
“한중평 장로.”
“옛, 교주님.”
“지금 당장 총타에 기별을 넣어, 초류빈 부교주에게 염왕대와 자성만마대, 그리고 호법원 고수들을 몽땅 다 이끌고 이리로 달려오라고 해라.”
갑작스런 묵향의 명령에 한중평 장로는 깜짝 놀라 급히 입을 열었다.
“예? 하지만 그렇게 하면 총타가 텅텅 비게 됩니다.”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괜찮아, 원로원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원로원은…….”
“안 그래도 밥값도 못 하는 늙은이들잖아. 이렇게라도 써먹어야지.”
그렇게 대꾸한 묵향은 시선을 돌려 한쪽에서 운기조식에 몰두하고 있는 정예무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겨우 4개 전투단 정도로 장인걸을 상대하려고 한 본좌가 어리석었어.”
한중평 장로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 십만대산으로 전서구를 날리기 위해 급히 어딘가로 뛰어갔다. 드디어 마교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 * *
대별산맥에 도착한 지 3일쯤 흘렀을 무렵. 묵향은 언제나처럼 잠에서 깬 후 운기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불조차 밝히지 않았기에 토굴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런데 갑자기 굴 앞에 쳐 놓은 휘장이 젖혀지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순간 감미로운 은방울꽃 내음이 토굴 안을 감돌며 지나간다.
묵향은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교에서 이렇게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올 만한 사람은 마화뿐이었지만 마화가 풍기는 냄새와는 달랐으니까. 그는 급히 운기조식을 멈추고 눈을 떴다.
“이런, 마화 아냐?”
마치 김이 샜다는 듯한 목소리에 마화는 쌍심지를 돋우며 뾰족하게 외쳤다.
“아니, 그럼 누군 줄 알았어요?”
“그, 그게 냄새가 좀 달라서…….”
순간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듯한 묵향의 말에 마화는 표정을 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하는 거예요.”
“그, 그런가?”
처음부터 꼬이다 보니 뭔가 대화의 주도권을 뺐긴 것 같다. 그렇기에 묵향은 재빨리 반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묵사발이 난 후 얼마나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가 싶어 구경 온 거야?”
묵향의 가시 돋힌 말에 마화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설마요. 제가 위로해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서 달려왔죠.”
그렇게 말하며 마화는 들고 온 바구니를 토굴 한쪽 구석에 놨다. 입구를 막고 있던 휘장을 걷어 놨기에 미약하게나마 빛이 스며 들어왔다. 따라서 어두운 토굴 안이었지만 보는 데는 그다지 큰 지장이 없었다.
마화는 자리에 앉아 있는 묵향의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툭 내뱉었다.
“뭐야? 여기까지 달려올 필요도 없었잖아. 생각했던 것보다 평안해 보이네요?”
“괜한 걱정을 하는군. 본좌가 겨우 그까짓 일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을 줄 알았나? 그런데 그건 뭐야?”
마화는 바구니 쪽을 힐끗 본 뒤 곧 대답했다.
“갈아입을 옷가지 좀 하고 천일취를 몇 병 가져왔어요. 교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술인 데다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쓸데없는 짓을 했군.”
퉁명스런 묵향의 대꾸에도 마화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서는 여분의 옷 한 벌 정도도 안 가지고 다니시잖아요. 그리고 안 그래도 기분도 꿀꿀하실 텐데, 천일취 한잔하고 툭 털어 버리…….”
“이런, 사람 잡을 아가씨로고. 천일취 가지고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제명에 못 죽지. 이 술이 얼마나 독한데.”
“그런 말씀 마세요. 천일취 정도쯤 되지 않고서는 술맛조차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한중평 장로님께서도 교주님께서 연경에서 돌아오신 다음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고 많이 걱정하시던데, 마음이 불편할 때는 잔뜩 마시고 툭툭 털어 버리는 게 최고죠.”
다정스런 마화의 말에 묵향은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라, 내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있었지. 그리고 후회라는 것은 앞으로 절대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다짐이야. 그걸 술로 망각해 버리고 싶지는 않아.”
마화는 빙그레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묵향의 좋은 점이 바로 저것이었으니까.
“교주님께서는 정말 강한 분이세요.”
하지만 묵향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씁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도 내가 강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번에 당해 보니 그것이 아니었어. 겨우 몇만 명일 뿐이었는데…….”
“그건 신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을 거예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마화의 위로에 묵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책? 본좌는 자책하는 게 아냐. 사실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야.”
묵향의 자신감 있는 말에 마화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 교주님께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뭔데?”
“소 소저께서 양양성에 도착하셨어요.”
그 말에 묵향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뭐야! 그럼 숙소는 괜찮은 데로…….”
여기까지 말하던 묵향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참, 내 정신 좀 보게. 천지문으로 갔을 테니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가 없겠군.”
묵향이 토굴 밖으로 나오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부복하며 외쳤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누군가 하고 묵향이 보니 그들의 가장 앞에 있는 자는 여문기였다.
“우호법이 아닌가? 자네가 여기는 웬일로……?”
“양양성까지 아가씨를 뫼시고 왔습니다, 교주님. 총단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교주님께 임무를 완수했음을 고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마침 잘 왔군. 안 그래도 대호법 이하 호법원 고수들을 몽땅 다 불러들인 상태니 말이야. 대호법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돼.”
갑작스런 말임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여문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아무런 의문도 제시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예.”
“임무를 수행하느라 수고했을 테니 휴식을 취하도록 해. 한중평 장로에게 신고한 후 숙소를 배정받도록 하게.”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