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문기와 헤어진 묵향은 곧장 철영 부교주에게로 갔다. 마화가 양양성에서 의원들을 데려왔는지, 여기저기 낯선 인물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 중 일부는 한쪽 구석에 약탕기를 올려놓고 약을 달이고 있었다.
묵향은 철영 부교주가 기거하고 있는 토굴 앞에 서서 안쪽에 대고 말했다.
“본좌는 양양성으로 갈 테니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철영 부교주는 급히 토굴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실 겁니까?”
“그래, 이곳을 잘 부탁하네.”
“염려 놓으십시오, 교주님.”
이번 일전을 통해 수하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묵향을 보고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된 철영이었다.
* * *
묵향이 양양성에 돌아오자 그를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관지 장로였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를 찾은 건 소연과 현천검제였다.
소연은 천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교의 장원에서 현천검제와 함께 묵고 있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느라 수고해 준 현천검제를 홀로 놔두고, 천지문으로 쪼르르 달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조령은 물론이고, 진팔 등과는 따로 만나 재회의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말이다.
문이 열리며 소연과 현천검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물기가 가득한 눈길로 멍하니 묵향을 바라보던 소연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소연이 아버님을 뵈옵니다.”
아버님이라는 말에 묵향은 흠칫했다. 그토록 비밀로 했건만, 막상 그녀에게서 아버님이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찡했던 것이다.
1백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며 감정이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가슴이 저릴 줄은 묵향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뭔가 말을 해야 함에도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는다. 대신 묵향은 소연을 꽉 끌어안아 줬다. 다시 찾은 딸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묵향은 소연의 전신을 살펴보며 물었다.
“그래, 부상을 입은 곳은 모두 회복했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단순한 몇 마디였지만 소연은 그 말 속에 자신에 대한 묵향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 아주 건강하답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자리에 앉거라.”
묵향은 뒤에 서 있는 마화에게 말했다.
“술…, 아니 차가 있나?”
습관적으로 술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적이 당황해하는 묵향이었다.
“준비해 오겠습니다.”
마화는 생긋 미소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마교의 장원에는 단 한 명의 하인이나 하녀도 없다. 밥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빨래까지 모든 걸 자신들이 직접 알아서 처리했다.
그 때문에 편복대주가 여기저기에 첩자들을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곳 마교만큼은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 한 명을 죽여서 얼굴 가죽을 벗겨 집어넣는다고 해도 곧바로 들통 날 게 뻔했으니까.
잠시 후, 마화가 손수 끓여 온 차를 마시며 부녀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과거 살아온 얘기,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추억담 등등……. 둘의 얘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현천검제는 감히 둘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옆에 찌그러져 경청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꽤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사형에 대해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소연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역시 사형은 겉보기와 달리 정이 깊은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현천검제는 묵향과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소연을 돌려보낸 후 묵향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사형.”
묵향은 현천검제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먼 길, 딸아이를 보호해 줘서 고맙구나. 네가 함께 오고 있는 줄 알았다면 한결 마음을 놨었을 텐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묵향의 인간적인 모습에 현천검제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질녀의 무공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던데, 소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니야,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그런데 패력검제는 함께 오지 않았나?”
“오던 도중에 갑자기 무슨 볼일이 있다면서 헤어졌습니다.”
“흠, 그랬단 말이지?”
묵향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 버리자 현천검제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며칠 함께 여행한 패력검제가 이런 사소한 일로 무섭기 그지없는 사형의 노여움을 받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도 호법원에서 10여 명의 고수를 보내 경호를 해 주고 있음을 알고 안심하고 떠난 것이겠지요.”
“맞아, 우호법이 호위했었다고 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호법도 참 눈치가 없군. 기왕에 보내려면 확실히 할 것이지, 겨우 열한 명이라니. 쯧쯧.”
사랑에 눈이 멀면 맹목적이 된다고 했던가. 사실 현천검제 한 사람만 옆에 붙어 있어도 현 무림에서 감히 그녀를 건드릴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처음에는 1백여 명쯤 왔었는데 질녀가 돌려보냈으니 말입니다. 질녀는 정파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 그녀 주위에 마기를 풀풀 풍기는 자들이 떼거리로 따라다니면 질녀의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흠, 그건 그렇군.”
일단 수긍한 묵향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몸은 완전히 완쾌된 거냐?”
그 말에 현천검제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묵향에게 감사를 표했다.
“예, 모두 사형 덕분입니다.”
“덕분은, 결국 따져 보면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그리고…, 화산파를 놔두신 것…, 그 또한 감사드립니다.”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너를 위해 놔둔 게 아니다. 괜히 불을 질러서 화산파에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으니까. 덕분에 십만대산까지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지.”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현천검제는 묵향이 자신을 위해 마음을 써 준 것이라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형께서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면 화산으로 돌아가 후진을 양성하는 데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사형의 은혜에 보답해야겠지만, 화산파 장문인으로서의 의무 또한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장문으로 선택되었을 때, 조사님들의 영전에서 한 맹세를 어찌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면 모르되, 소수이긴 하나 아직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는데…….”
묵향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꺼낸 말이었지만, 의외로 묵향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숨에 대답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네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현천검제가 큰 힘이 될 걸 잘 알면서도 묵향이 선선히 허락한 것은 그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 혼자의 힘으로 모든 걸 헤쳐 나갈 자신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듯이.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달랐다. 생각 외로 묵향이 쉽게 승낙을 하자 현천검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현재 마교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자신과 같은 초절정고수가 필요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묵향이 이런 식으로 말한 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형.”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다오.”
묵향의 말에 현천검제는 처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는 현재 완전히 무너져 사형께서 신경 쓰실 필요조차 없…….”
하지만 묵향의 태도는 단호했다.
“약속해라.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화산파가 정파에 남아 있는 한 언젠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제서야 현천검제는 묵향이 왜 자꾸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지를 깨달았다. 말투는 죽이고 싶지 않다는 식이었지만,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자신을 걱정하는 따스한 마음을 느꼈던 것이다.
“봉문한 후 다시는 무림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 약속이면 충분하다.”
그 말을 끝으로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묵향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현천검제는 묵향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천천히 몸을 돌려 주춤주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무심한 듯한 묵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일이 해결되면 찾아가마. 사부님과 함께 술이라도 한 잔하자꾸나.”
“예, 사형.”
문득 뒤돌아보니 묵향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다시 볼 리도 없건만 현천검제는 정성을 다해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는 길이 다를 뿐, 그는 정말 존경해 마지않는 그의 사형(師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