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 없다니까!
현천검제를 성문 앞까지 바래다 준 후 소연은 천지문으로 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은 먼발치에서 그녀를 알아보고, 놀라서 달려와 인사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이 행방불명된 그녀였기에 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
보고를 듣고 달려 나온 임연은 소연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사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느냐? 많이 걱정했었다.”
설명을 하려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았고, 또 어느 정도까지 말을 해야 할지 신경이 쓰였기에 소연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형께서는 언제 오셨어요?”
“그때 전투 이후, 문주님의 명을 받들어 네 대신 이곳의 문도들을 지휘하러 왔다. 여기 도착해 보니 네가 크게 다쳤다고 하더구나. 그래, 몸은 좀 어떠냐? 걱정과는 달리 크게 불편해 보이지 않아 우선은 안심이 된다만…….”
하지만 소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사제는…….”
그러자 임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듯하구나. 안으로 들어가자.”
“예.”
임연은 집무실로 들어가 소연에게 자리를 권한 후, 시비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전음으로 그간 사정을 빠른 어조로 설명해 줬다.
<그렇다면 사제를 내보내셨단 말인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본문이 싫어서 떠난 걸로 되어 있어. 그런 그가 여기서 문도들을 이끌고 있었다는 게 알려진다면 자칫 문주의 권위가 흔들릴 수도 있음이야.>
진 사제의 팔자가 참으로 기구하다고 생각하며 소연은 슬픔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렇군요.”
“문주께서는 다시금 3백 명의 무사를 증파하셨다.”
“3백 명씩이나 말인가요?”
천지문은 전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고작 2천 정도의 문도밖에 가지지 못한 중소규모의 문파였다. 그런데 이번에 5백이 죽어 나가자 새로이 3백을 증원했다니. 문주의 의지는 명확했다. 그는 이번 전쟁을 통해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천지문이 온 무림에 인정받게 되길 꿈꾸는 모양이다.
“얘기를 들으니 무림맹에서 만수 장로라는 사람이 왔었던 모양이야.”
“수 자 돌림이라면…, 현 무당파 장문인보다도 한 등급 높은 항렬이라는 말인가요?”
“맞아, 장문인의 사제라고 하더군. 그자가 와서 문주를 구워삶아 놓은 모양이야. 멋들어진 검 한 자루를 선물하며 ‘맹은 천지문이 흘린 피를 결코 잊지 않겠소’라고 한 그 한마디에 문주는 이성을 잃은 거지.”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임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소연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뭐, 우리로서야 문주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니. 그 얘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가 온 거냐? 녀석의 말로는 마교에 갔다고 하던데.”
“예.”
소연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마교의 중지(重地) 중의 중지라는 천마동에 들어갔었던 일. 그리고 반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신묘한 의술을 지닌 할아버지와의 만남 등등…….
이 모든 얘기를 하려면 교주가 왜 자신에게 그토록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지를 먼저 밝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충 꾸며서 임연이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교 분타로 안내되어, 신묘한 의술을 지닌 마교 고수에게서 치료를 받았다고 말이다.
* * *
천지문에 복귀한 소연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마화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며 놀았다.
지금까지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적당한 수준의 친분 관계만 유지했다면, 이제는 꼭 자매처럼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소연은 마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몇 년 정도 그리워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접어 버린 그녀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든 사랑을 그녀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말 없이 행방마저 묘연해져 버린 아버지를 무려 20여 년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니…….
소연의 조언에 따라 마화의 옷차림은 조금씩 여성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며칠 전, 묵향이 자신을 바라보며 기겁초풍한 걸 보면서 그녀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묵향도 목석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름답게 꾸미면, 그걸 묵향도 알아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그녀의 옷차림은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빈대까지 잡아먹는다는 말처럼, 때에 따라서는 짙은 화장까지 불사할 정도로 무서운 변신을 하고 있었다.
조령 역시 그런 마화에게 자주 찾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령은 부잣집 딸답게 옷이라든지 장신구에 대한 안목이 무림인인 그녀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탁월했다.
무조건 처바르기만 하면 좋은 줄 알았던 마화의 화장술도 조령의 조언에 의해 훨씬 맵시 있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녀들과 조령의 사이가 한층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기운이 완연해져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나무들이 꽃봉오리를 피우기 시작하자, 조령은 소연에게 설취를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며 꼬드겼다.
설취는 그때까지도 만현에 남아 사라진 사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만통음제를 장인걸이 납치해 구금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묵향은 소문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차단해 버렸다.
그래서 설취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금까지 사부를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찾아가는 길에 빼어난 경치까지 구경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니냐는 조령의 제안은 참으로 달콤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상태라…….”
요즘 가족 간의 정이라는 것을 듬뿍 느끼고 있었던 소연이 그 말에 응할 리 없었다. 만현까지는 꽤나 먼 길이다. 설취를 만나고는 싶었지만, 그곳에 갔다 오려면 묵향과 한동안 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마화가 조령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소연에게 만현으로 바람이나 쏘이고 오라며 권했다.
사실 지금 묵향은 양양성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전투단의 재편성 작업부터 시작해 해야 할 일이 태산만큼이나 널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대별산맥으로 갈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며 아직까지도 양양성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원인이 바로 소연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마화였기에 만현으로의 유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소연을 멀리 보내 버려야 묵향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화는 즉시 소연을 호위할 고수들의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조령은 물론이고 쟈타르조차 소연에 비해 무공이 훨씬 떨어졌다. 그런 하수들을 믿고 소연을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자신의 수하들을 딸려 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괜히 사람들의 이목만 쏠리게 될 것 같아 망설여졌다. 흑풍대원들은 떨어지는 무공을 말과 두터운 갑주로 보완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갑주를 벗기자니 상대적으로 무공이 떨어지기에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소연이 마교도들과 가깝다는 걸 공개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한동안 머리를 굴리던 마화는 이윽고 결정을 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