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6화 (59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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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과 그 일행을 찾기 위해 양양성에 있는 흑풍대 본부가 발칵 뒤집어진 뒤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에 묵향의 속은 바싹바싹 타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뿌, 뿌, 뿌우~~.”

감시병의 급박한 뿔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병사들은 혹시 적의 습격인가 해서 창을 움켜쥐고 성문 쪽으로 부산히 달려갔다. 멀리서 뿌연 먼지를 가르며 수백 기의 기마대가 양양성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백기를 휘날리며 접근해 오고 있었는데 군장으로 봐서 금나라 기마병임에 확실했다.

잠시 후, 험악하게 생긴 장수가 성문 앞에 말을 멈춘 뒤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거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본인은 완옌 렌지에 대원수 합하(閤下)의 명을 받들어 금나라의 사신으로 왔노라!”

묵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현에 파견된 고수들이 소연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화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소연이 행방불명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는지 마화의 안색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금나라에서 2백여 기의 인마(人馬)가 도착했답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솔해 온 장수가 교주님 뵙기를 청한답니다.”

“나를?”

그 순간 묵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나라 장수가 왜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것인지 곧바로 눈치 챘기 때문이다. 묵향은 노기 어린 어조로 외쳤다.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려보내라고 해라.”

“소 소저 때문에 만나자는 것일 텐데요?”

“…….”

묵향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마화는 묵향을 설득했다.

“일단 만나는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쪽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으드득, 놈이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아!”

상대의 비열한 수작에 이를 갈던 묵향은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장 가서 그놈 목을 베어 장인걸에게 돌려보내. 본좌의 대답은 그거라고 알려 주란 말이야!”

이때 옆에 서 있던 관지가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그자를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데도!”

“지금까지 장인걸이 소 소저를 건드리지 않은 건, 교주님께서 철저하게 냉혈한처럼 행동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장인걸이 소 소저를 납치했다가도 그냥 돌려보냈었던 것도 위협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묵향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바뀌다니?”

“교주님께서는 만통음제 대협을 구출하기 위해 연경을 치는 무리수를 감행하셨습니다. 그걸 보고 장인걸은 깨달았겠지요. 교주님의 약점이 뭔지 말입니다.”

“이런 젠장!”

쾅!

묵향의 주먹질에 애꿎은 탁자만 박살이 나 버렸다.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교주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기회? 기회는 무슨 얼어 죽을 기회! 이제는 허세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텐데…….”

“일단 장인걸이 보낸 사신부터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쪽의 요구를 들어 본 후, 대비책을 강구해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좋을 듯하자 묵향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놈보고 들어오라고 해.”

“예, 교주님.”

금나라 장수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박살 난 탁자는 이미 말끔하게 치워지고 없었다. 장수는 오만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본 후, 태사의에 앉아 있는 묵향을 향해 간단하게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어투는 정중한 듯했지만, 그의 행동에는 상대를 무시하고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천마신교 교주님을 뵈오이다.”

금나라 장수는 군례를 올린 후, 가져온 상자를 두 손으로 바쳤다.

“완옌 렌지에 대원수 합하께서 교주께 이걸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협박을 하려면 서신만 보내도 충분할 텐데 왜 상자를 보냈지? 얄팍하게 독약이라도 넣어서 보냈나?’하는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묵향은 상자를 감싸고 있는 보자기를 풀었다.

계집들이 화장품을 보관하는 상자쯤 되려나? 제법 아름답게 세공된 나무로 만든 상자가 나왔고, 그 위에 곱게 자리 잡은 봉서도 보였다. 묵향은 먼저 봉서부터 뜯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장인걸이 원하는 요구 조건이 뭔지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미 묵향의 속마음은 웬만한 거라면 그냥 다 들어주고 소연을 빼내는 게 어떨까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서신을 읽던 묵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최대한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에 이 정도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 장수 놈에게 자신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들킬 뻔했다.

묵향이 급히 상자 뚜껑을 열자 퀴퀴한 썩는 냄새 같은 게 코를 찔렀다. 상자 속에는 하얀 소금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속에 묘하게 생긴 막대기 같은 것도 보였다. 가만히 보니 그건 소금에 절여놓은 손이었다.

소금 때문에 물기가 쫙 빠져 쭈글쭈글했지만, 뼈대가 굵은 것이 사내의 손이 분명했다.

묵향은 이 손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바로 진팔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묵향의 미간에 노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이따위 걸 선물로 보냈다니. 대원수는 본좌가 소금에 절인 고기보다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것을 더 좋아한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곁에 서 있던 마화는 묵향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자 급하게 전음을 날리며 말렸다.

<사신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마화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안그래도 묵향은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드는 저놈의 멍청한 낯짝을 두토막으로 만들어놓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손에 쥐가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묵향의 손이 일순 번쩍 빛나는 순간, 피보라가 일며 금군 장수의 왼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번쩍인 순간 귀가 떨어져 나갔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화는 급히 달려가 장수의 혈도를 찍어 지혈을 시켰다. 그녀가 움직인 후에야 금군 장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그의 얼굴은 공포감으로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본좌의 대답은 이거라고 전해라. 아참, 귀는 덤이다. 대접을 받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대가만 지불한다면 너무 몰인정하다고 욕을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금군 장수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절대 인질이 무사…….”

장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향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어조로 외쳤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인질로 잡은 애들을 몽땅 다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본좌는 절대로 양양성에서 철수할 생각이 없으니까.”

“후회하실 겁니다.”

자신이 돌아가면 인질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죽거리는 장수의 말에 이성을 잃은 묵향이 마화를 향해 외쳤다.

“저 새끼 주둥이를 찢어 버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금군 장수는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장인걸의 명대로 상자를 전한 만큼 자신이 할 일은 다 한 상태다.

사신으로 와서 왼손과 귀가 잘려 나간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번에는 입을 찢어 버리겠다니……. 그로서는 여진족 이상으로 잔인무도하고 야만스러운 묵향의 행태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장수가 밖으로 달아나고 난 후, 마화는 묵향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서신의 내용이 뭔데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직접 읽어 봐.”

서신을 받아 들고 읽어 보니 장인걸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마교가 전쟁에서 손을 떼는 것. 인질들은 전쟁이 끝난 후 돌려주겠다고 쓰여 있었다.

만약 자신의 제안을 듣지 않는다면 한 명씩 목을 잘라 상자에 잘 포장해서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물도 함께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

나무 상자 안을 들여다본 마화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도 그 손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알아본 것이다.

“진…, 공자의 손이군요.”

“가장 만만한 놈이 그놈밖에 없으니까. 서량은 패력검제를, 그리고 설취는 형님을 제어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아끼는 소연이의 손을 잘라 보낼 수도 없었겠지. 쯧! 불쌍한 놈.”

마화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묵향이 소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철수하실 건가요?”

“전혀! 놈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그리고 설혹 약속을 지킨다손 치더라도…, 놈이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는 본교의 힘으로 놈과 대적할 수도 없을 거야. 승산이 있는 지금 결판을 내야지.”

그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화는 소연을 생각하자 너무 가슴이 아팠다.

황제를 잃은 장인걸의 분노로 인해 절대 인질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렇게 하면…….”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그만!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다. 아마 소연이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차갑게 말을 끊었지만 묵향의 마음 역시 편한 건 아니었다. 만통음제의 경우에는 구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지만, 소연과 그 일행들은 구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자신의 약점을 발견한 장인걸이 그들을 결코 호락호락 놔두질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인걸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고 해도 그들이 살아날 확률은 역시 적었다. 어차피 장인걸과 자신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 안 그러면 끝이 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 죽을 운명인 것이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그 길로 갈 묵향이 절대로 아니었다. 실수는 연경을 치면서 한 것만으로도 족하고도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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