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7화 (593/930)

게으른 절대자

손과 귀가 잘린 금군 장수가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양양성에 대규모의 무림인들이 합류했다.

그 수는 거의 5천에 달했고, 두 눈 가득 정기가 어린 것이 하나 같이 상당한 고련을 쌓은 자들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림맹이 끌어들인 곤륜파가 이제야 양양성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서둘러 양양성에 도착해 봐야 득 될 게 없었으니, 여유롭게 양양성에 온 그들의 선택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도인들 사이에서 곤륜파는 무당파만큼이나 뛰어난 명문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마교로부터 가해지는 지독할 만큼의 압박으로 인해 오히려 도가의 도량으로서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혹독한 겨울을 넘긴 매화꽃이 더욱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이치와도 같을지 모른다.

수라도제라는 화경급 고수를 이미 접한 전례가 있는 양양성의 고수들은 곤륜무황이 이제 갓 30대 초반쯤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명리를 뛰어넘는 듯한 그의 탈속적인 모습은 세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세속에 찌든 중원의 도인들과 달리, 그에게서는 탈속한 선인(仙人)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곤륜무황은 양양성에 도착하자마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교의 장원에 찾아가 교주를 만나는 파격적인 행동을 단행했다. 그건 고리타분한 정파의 명숙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다.

정파의 명숙이, 그것도 무림연합의 수장으로 임명된 사람이 직접 사파의 거두를 찾아가 인사한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서 오시구려.”

“처음 뵙겠습니다. 빈도는 평천(平泉)이라 합니다.”

곤륜무황은 너무나도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3황에 꼽힐 정도로 무서운 무공을 지닌 데다가 15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기에 세속에 찌들만도 하건만,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해맑았다.

‘오랜 세월 도만 닦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과거 무림맹주 옥청학과의 악연을 기억하고 있는 묵향이 그런 그의 겉모습에 현혹될 리 없었다. 옥청학 역시 공동파가 배출한 위대한 도인이었지만, 겪어 보니 세속적인 놈들과 그 나물에 그 밥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더욱 지독했다고 봐야 할까.

“묵향이라고 하오.”

“교주의 위명을 그동안 귀가 따갑게 들었으나 서로가 가는 길이 달라 찾아뵙기 어려웠었는데, 오늘에야 존안을 뵙게 되니 빈도로서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무량수불.”

“그건 본좌도 마찬가지외다.”

곤륜무황 쪽이 묵향에 비해 훨씬 더 연배가 높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공손하게 나오니 묵향으로서도 기분이 나쁠 리 없다. 자연히 정, 사파의 거두가 모인 자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부드럽게 변했다.

처음에는 일상생활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로 출발한 두 사람은 점차 공동의 적인 장인걸을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각자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상대의 성격이나 전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알아야 연수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겠는가.

“허허, 오늘 교주를 만나러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그려.”

“별말씀을요. 오늘 만남은 참 유익했던 것 같소이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자 두 사람은 만족한 듯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곤륜무황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이런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요.”

“좋은 말씀이십니다.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사가 끝난 뒤 곤륜무황이 돌아가자 묵향은 마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좌는 지금까지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이 가장 훌륭한 도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그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저런 탈속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곤륜산이 아직까지도 도가의 성지들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겠지.”

마화도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

“본교에 떠도는 소문과는 너무 달라서 저도 당혹스러워요.”

“소문이라니?”

“마교라면 치를 떠는 아주 호전적이면서도 무자비한 인물이라고 들었거든요.”

그 말에 묵향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본교가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할 때마다 그 길목에 위치한 곤륜은 언제나 막대한 피를 흘려야만 했지. 벼랑 끝에서 문파의 존망(存亡)을 건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 어찌 도를 논할 수 있겠나? 만약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까지 도를 찾고 앉아 있다면 오히려 그놈이 바로 위선자겠지.”

꽤나 그럴듯했기에 마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 * *

묵향이 곤륜무황을 좋게 생각한 것과 같이 곤륜무황 역시 묵향에 대해 꽤나 후한 점수를 줬다. 하지만 다른 곤륜파의 도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곤륜파의 구성원들이 도사들이라고 해서 모두들 온후하고 점잖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완전히 오산이다. 그들은 마교와의 투쟁을 통해 단련된 강골들이었고, 오랜 세월 마교와 싸워 온 만큼 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장검을 뽑아 들 정도로 원한이 골수에까지 맺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마교도들과 한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충돌은 예정된 것이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 충돌이 대규모로 벌어지지 않고 있었던 건 이곳에 와 있는 마교도들이 정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흑풍대의 경우 곤륜파와 직접 싸워 본 적이 없다 보니, 곤륜의 도사들에게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군부 출신들이기에 도사를 존중할 줄 알았고, 또 규율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예상외로 시비는 도사들 쪽에서 먼저 걸어 왔다. 수천 명이나 와 있다 보니, 그중에는 남들보다 더 성격이 괄괄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대부분의 무사들은 장원에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몇몇 무사들은 식사 때 배식을 기다리기보다 밖으로 나와 객점을 이용하곤 했다.

그건 흑풍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9천 명이나 되는 대원들이 식사를 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몇몇 대원이 장원을 빠져나와 근처 객점을 찾았다.

최근 교주인 묵향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식사를 주문하는 그들의 표정도 그리 썩 밝은 건 아니었다.

그런 흑풍대 대원들의 귀로 왠지 이죽거리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허~, 누가 마교도들이 아니랄까 봐 객점에서까지 저렇게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쯧, 입맛이 달아났군.”

말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그곳엔 얼굴이 붉은 것이 척 보기에도 성질깨나 있어 보이는 곤륜파 도인 10여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흑풍대 대원들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괜히 사소한 일로 칼부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흑풍대 대원들의 귀로 또다시 곤륜파 도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들려왔다.

“너무 그러지 말게. 보아하니 무공도 약한 시주들 같은데, 자네가 그러면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나?”

“그건 그렇지. 그런데 참 웃기는 일이야. 예전에 빈도가 마교 놈들을 때려잡을 때만 해도 놈들이 내 모습만 봐도 부리나케 도망을 쳤는데, 지금은 이렇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으니 말이야. 참으로 원시천존님의 깊은 뜻은 알 수가 없구먼.”

흑풍대 대원들이 대꾸를 하지 않자 곤륜파 도사들의 이죽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그건 누가 들어도 상대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죽거리고 있는 도사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흑풍대원들뿐이라는 게 문제였다.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있는 점소이들은 도사들과 흑풍대원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미묘한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도발을 받고도 참아 넘길 만큼 흑풍대 대원들이 소심한 자들로 이뤄진 건 아니다. 몽고 벌판은 물론이고, 마교라는 아수라장에서까지 뿌리를 내린 강골들이었으니까.

화가 치민 흑풍대원 중 하나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도사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우리들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그 말에 얼굴이 붉은 도사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급하게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허, 얼마나 심성이 고약했으면 입을 열자마자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구먼.”

인내하려고 노력했지만, 흑풍대 제218대원 왕적삼은 결국 꼭지가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새끼들이 정말. 야, 이 개새끼들아! 말코 도사면 말 엉덩이나 붙잡고 놀아.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질이야, 고자 같은 놈들이.”

“뭣이!”

“이런 망할 시주를 봤나!”

이런 식으로 시작된 싸움은 누구 하나가 뻗을 때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드러눕는 쪽은 거의 흑풍대원들이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다수의 도사들이 소수의 흑풍대원들에게 싸움을 걸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흑풍대원들은 전장에서 검을 익힌 무사들이다. 그런 그들이 검을 쥐지 않고 맨주먹만으로 상대를 하려니 더더욱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두들겨 맞은 것도 억울한 판에 소문마저도 마교 쪽에 불리하게 났다. 도사들이 낮은 목소리로 시비를 건 걸 듣지 못한 점소이들은 흑풍대원들이 도사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오히려 두들겨 터졌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복수전이라도 펼치겠답시고 동료들을 끌고 가 도사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는 주위 사람들의 공적(共敵)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말코 도사 놈들이 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정말 인자한 도사처럼 행동하고 돌아다녔으니까.

시비를 먼저 건 쪽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도사 놈들인데, 두들겨 터지고 욕은 욕대로 먹으니 흑풍대원들로서는 정말이지 억울해서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고육지책으로 그들은 될 수 있으면 밖으로 나갈 때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것으로 도사들의 도발을 봉쇄하고자 했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어느 날, 38명으로 이뤄진 흑풍대원들이 60여 명의 도사들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