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8화 (594/930)

곤륜파의 수뇌부들은 하급 제자들이 흑풍대원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걸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양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때까지 무림맹 무사들을 책임지고 있던 서문세가로부터 각종 문서들을 인수인계 받아야 했고 또 다른 문파들의 책임자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양성에 집결한 정파 무림인의 수는 엄청났지만 그들은 모두 대의명문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금이라도 자신들의 문파로 돌아간다고 하면 맹으로서는 그들을 제재할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만큼 각 문파의 책임자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마교가 자리 잡은 장원이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반해, 곤륜파가 자리 잡은 장원은 며칠 지나지 않았음에도 제법 그럴듯한 도량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가장 큰 방에는 원시천존의 초상화가 걸렸고, 그 밑에 마련된 제단의 청동 화로에는 향이 타며 아련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을 듯싶은 젊은 도사에게 쉰은 넘어 보이는 중년의 도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들의 뒤바뀐 듯한 모습에서 뭔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그들은 전혀 그런 걸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왜냐하면 그 젊은이가 바로 곤륜무황이었으니까.

“서문 시주에게 들으니 본문이 도착하기 전에 마교가 독단적으로 금나라와 대대적인 충돌을 일으켰었다고 합니다. 서문 시주도 우연히 그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군요.”

곤륜무황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교가 금나라와 왜 혼자서 싸웠는지는 알아 봤느냐?”

“들리는 소문을 종합해 보면, 그 당시 황실이나 무림맹과 꽤나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런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마교 쪽에서 화끈하게 성의를 보인 것일 거라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뭔가 맞지 않았는지 곤륜무황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성의라……. 정말 소문이라는 건 믿을 게 못 되는군. 이곳에 오자마자 내가 교주를 찾은 것은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노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느니라. 그를 본 순간, 나는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소문이 헛되다는 걸 느꼈지. 그는 묵룡(墨龍)과도 같은 존재야. 역린(逆鱗)만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평화를 추구하는…….”

“마교의 교주가 그토록 평화스런 인물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곤륜무황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입을 열었다.

“무량(戊樑)아, 네가 아직까지도 사람을 보는 눈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구나.”

무량진인은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조아렸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언제나 선입관을 배제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만으로 결론을 도출해 내야 하는 것이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평화를 추구한다는 말은 그의 겉모습일 뿐, 철혈을 추구하는 마교에서 도인이 태어났다는 말은 아니니라. 그자는 단순히 귀찮아서 가만히 있을 뿐인 게야.”

무량은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귀찮다고요?”

“그래, 아주 재미있는 인물이지. 세상을 뒤집어엎을 광기를 온몸에 지니고 있음에도, 그걸 ‘게으름’이라는 것으로 덮고 있었으니 말이야. 마교가 왜 곤륜으로 쳐들어오지 않는지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더니, 결국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더란 말이야. 그와 만난 것이 너무 늦었어. 그의 본성을 노부가 보다 일찍 꿰뚫었다면 본문의 중원 진출이 20년은 앞당겨졌을 텐데 말이다.”

무량진인은 곤륜무황의 말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들은 소문이나 개방을 통해 얻은 정보로는 마교 교주인 암흑마제는 천하에 그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흉폭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개방이 건네준 정보에는 심심할 때마다 찾아와 정보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당한 한이 서려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문파의 어른이신 곤륜무황의 평가에 감히 반박하기 힘들었던 무량진인은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렸다.

“문제는 마교도들은 천성이 호전적인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가 가만히 있자고 한들 밑에서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곤륜무황은 무량진인이 왜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는지 금방 눈치 챘다. 제대로 사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랜 연륜과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무량진인에게 그걸 기대하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문파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키운다는 마음으로 곤륜무황은 빙그레 웃으며 자세히 설명해 줬다.

“너는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만, 그는 절대적인 지도력을 지닌 인물이야. 그를 봤을 때는 그게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의 눈빛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그들이 얼마나 교주에게 충성과 존경을 바치고 있는지 말이다.”

그제서야 자신이 뭘 놓쳤는지 깨달은 무량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허,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방금 전에 네가 말한 그것이다. 그런 인물이 솔선해서 금나라와 일전을 벌인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게다. 너는 그게 뭔지 소상히 알아 보거라.”

“예.”

곤륜무황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던 무량진인은 불현듯 몸을 돌려 품 안에서 봉서를 하나 꺼냈다.

“깜박 잊을 뻔했습니다. 무림맹에서 보내온 공문입니다.”

봉서를 펼쳐 본 곤륜무황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허어, 이런. 어쩌자고 잠자던 용의 수염을 건드렸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곤륜무황은 말없이 봉서를 무량진인에게 건네줬다. 봉서에는 마교를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던 왜군을, 황실의 요청에 의해 무림맹의 무사들이 박살을 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런 만큼 언제 마교가 검을 거꾸로 겨눌지 모르니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무림맹주의 전언이었다.

설민의 계책

곤륜파가 도착한 지 3일 후, 조령과 쟈타르가 양양성에 도착했다.

조령은 여전히 철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를 보호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쟈타르의 모습은 과거 강건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이 솟구치게 했다. 조령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하지만 않았다면 저 정도 중상을 당했을 리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묵향은 먼발치에서 마교 무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조령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소연이는 잡혀갔는데, 어떻게 저런 형편없는 계집은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

노골적으로 조령을 폄하하는 묵향의 말에 마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꼭 생포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소 소저를 비롯해서 설 소저, 그리고 서 공자 정도예요. 나머지는 필요 없었다는 말이죠.”

과연 생각해 보니 마화의 말이 그럴듯했다. 자신이 만약 이번 납치 계획을 짰다고 해도 휘하의 모든 고수들에게 그 셋만을 노리라고 명령했을 테니까.

“어쩌면 일부러 저들을 놔준 것일 수도 있어요. 자신들이 소 소저 일행들을 납치해 갔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죠.”

“빌어먹을! 꼴 보기 싫으니 저 계집애보고 이쪽에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고 해.”

묵향은 그렇게 명령했지만 마화는 차마 조령이 장원에 출입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설취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해 이런 사태가 벌어졌기에 죄책감이 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투덜거리며 묵향이 집무실로 들어간 후, 마화는 조령에게로 걸어갔다. 조령은 흑풍대원들에게 소연의 행방을 찾았는지, 찾았다면 구출 계획은 있는지 등에 대해 열심히 묻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마화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자 황급히 아는 척을 했다.

“어머, 언니. 안녕하셨어요?”

우울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자신을 보고 살갑게 인사하는 조령을 마화는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여기저기에서 정보들을 모으고 있으니, 조만간에 그들을 구출해 낼 수 있을 거야.”

“하, 하지만 제가 설 언니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던 게 너무나도 한스러워요.”

“그리로 갔다가 납치된 게 네 탓은 아니야.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조령은 일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조령의 모습에 마화는 다시 밝게 웃어 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답답하면 언제든지 놀러 와.”

“예,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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