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9화 (595/930)

* * *

묵향이 집무실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관지가 들어왔다.

“군사가 전서를 보내왔습니다.”

“설민이? 줘 봐.”

묵향에게 건넨 보고서는 암호로 기록되어 있던 전서를 해독하여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직접 해독한 관지는 보고서의 내용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다 읽은 묵향은 심각한 표정으로 관지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장인걸을 밖으로 꾀어내야 한다는 것에는 속하도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본진에다가 어떤 함정들을 파 놨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그걸 놈도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 작년 가을에도 놈은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휘하의 장졸들만 움직였어.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

“본교가 지닌 최대의 강점은 소수 정예라는 것입니다. 소수 정예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적의 약점을 단숨에 파고들어 짧은 시간 안에 끝장을 내 버려야 한다는 거죠.”

맞는 말이었기에 묵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워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 쪽에 유리한 전장으로 놈을 끌어들여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군사의 계책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고리타분한 무림맹의 대가리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지가 가장 큰 관건이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겠죠. 시간은 많습니다. 총타에서 고수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던 묵향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옥화무제에게 연락을 보내. 본좌가 만나자고 말이야.”

“예? 왜 갑자기 옥화무제를 만나시려고……?”

“현재로서는 우리의 제안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 물론 적당한 대가를 제공해야 움직이겠지만.”

그러자 관지는 애매모호한 얼굴로 반론을 꺼냈다.

“옥화무제 여협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게 좋을지 속하로서는…….”

“왜?”

“지금은 그쪽에서 우리 쪽에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만, 교주님의 약점을 파악하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옥화무제는 뱀같은 여인입니다. 교활하기 그지없는 뱀을 너무 가까이 두시면 교주님께 자칫 독니를 들이댈까 걱정이 되는지라…….”

그 말에 묵향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뱀이라…….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로군.”

잠시 후, 웃음을 멈춘 묵향은 관지에게 명령했다.

“괜찮아, 대충 얼버무리며 설명할 거니까. 만남을 주선하도록 해.”

“존명.”

“그리고 철영이 입수한 그거 있지? 두어 개만 줘 봐.”

묵향의 말에 관지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설마 그것까지 주실 생각이십니까?”

묵향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어때. 우리 쪽에서는 모방해서 만들 수도 없다며? 이런 때는 인심을 팍팍 쓰는 게 좋은 거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게 되면 본좌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일 테니 말이야.”

듣고 보니 충분히 말이 됐다. 관지는 묵향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오랜만이야.”

괜히 친한 척하는 묵향에게 옥화무제는 새침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찾은 거죠?”

“아아, 그렇게 딱딱하게 얘기하지 말라고. 자, 우선 자리에 앉지?”

옥화무제가 자리에 앉자, 묵향은 점소이에게 명령했다.

“아까 시킨 음식 가져와.”

“예, 대인!”

말 한마디에 점소이가 굽신거리는 걸 보면 아주 비싼 음식을 시킨 모양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용문객잔이 자랑하는 가장 호화로운 음식들이 줄을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옥화무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별일이군요. 생전 안 하던 행동까지 하는 걸 보면 이번 부탁은 꽤나 어려운 일인 모양이죠?”

“눈치가 너무 빨라도 피곤하군. 그냥 자연스럽게 즐기면 안 되나?”

“미안하군요. 영문도 모르는 음식을 먹었다가는 배탈이 날 것 같아서 말이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음식부터 들지?”

“무슨 일이죠?”

계속되는 묵향의 권유에도 옥화무제는 응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자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봉서 하나를 꺼냈다.

“어쩔 수 없군. 이게 내 생각이야.”

묵향이 건넨 봉서를 옥화무제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윽고 서신에서 그녀가 눈을 떼는 순간,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 서신은 한순간 불에 타올라 재가 되어 흩어졌다. 옥화무제가 삼매진화로 서신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옥화무제는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단단히 미쳤군요. 이딴 계책을 맹주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나요?”

말도 안 된다는 옥화무제의 반응에도 묵향은 태연했다. 그는 음식을 접시에 덜어서 먹으며 말했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어요. 그런데 뭐 하려고 맹주가 그런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려 하겠어요?”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교는 이번 전쟁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으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옥화무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흡!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두고 보면 알 거야. 본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허튼소리는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묵향의 말투에 옥화무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어떻게 협박하더라도 맹주가 이 계책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드러났다가는 맹주직에서 쫓겨날 가능성마저 있으니까요.”

“실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내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 생각을 해 보라구. 이번에 본좌가 연경을 친 것은 알고 있겠지?”

옥화무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주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연경의 절반을 불사르고, 황제까지 참살하는 쾌거를 이뤘는데 그걸 모를 리 없죠. 그리고 남양으로의 양동 작전은 아주 훌륭했어요. 장인걸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쯧, 천하의 무영문도 별수 없구먼. 겉으로 드러난 것만 알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이죽거리는 묵향의 말투에 옥화무제의 미간에 내천자(川)자 새겨졌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무영문을 씹어 대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대꾸를 하는 옥화무제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내가 모르는 뒷얘기라도 있다는 거예요?”

“이번 작전에서 본교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어. 거의 1개 전투단에 준하는 전력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지. 이런 피해를 한 번만 더 당한다면 아무리 본교라고 해도 밑천이 거덜 날지도 몰라.”

옥화무제는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묵향이 말한 1개 전투단이, 특1급 고수들로 구성된 1종대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챘기 때문이다.

“놈은 우리가 쳐들어갈 만한 예상 지점 곳곳에 함정을 설치 해 놨더군. 이번 작전을 통해 그게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아냈다는 게 큰 성과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역으로 그걸 뻔히 알면서 놈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수 없다는 점도 절실하게 깨닫게 됐지. 그 사실을 알기 위해 내 목숨을 대가로 치를 뻔했으니 말이야.”

“그, 그럴 리가…….”

옥화무제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특1급 고수로 구성된 1종대와 묵향이 직접 움직이는 마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군.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걸 꺼내야겠군.”

묵향은 품속에서 어린애 머리통만 한 시커먼 쇠구슬을 두 개 꺼냈다.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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