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될 수 없는 3가지 이유
묵향에 의해 황도가 기습 공격당한 후유증은 예상외로 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팠던 것은 황제의 서거였다. 장인걸은 혼란에 빠진 정국을 추스르면서도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일이 차기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자신의 마음대로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주인 없는 밥상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에서 숟가락을 걸쳐 놓으려는 노골적인 움직임 때문이었다.
현재 황위 계승권을 인정받고 있는 황자는 3명이다. 모두 다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들 중 쓸만한 재목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장인걸은 두말 않고 그를 황제로 추대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들 욕심만 목구멍까지 찼을 뿐, 황제가 될 만한 소양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자신이 내심 점찍은 차기 황제감에게 비밀리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자들이라면 몰라도 그라면 미래를 함께 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늦은 밤에 갑자기 자신의 집에 찾아온 장인걸의 행보에 완옌 우퀴마이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님을 맞이했다. 상대는 낮에 다시 찾아오라고 돌려보낼 만큼 만만한 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안판 발극렬(諳版 勃極烈 : 제1부족장).”
“대원수께서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자, 이쪽으로…….”
장인걸을 자리로 안내한 우퀴마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 있는 호위병들에게 밖으로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이런 늦은 밤에 사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면 뭔가 비밀스러운 용건이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호위병들이 밖으로 모두 나가자 장인걸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우퀴마이가 차기 황제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뜻밖의 제의에 선황제였던 아구다의 동생, 우퀴마이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으르렁거렸다.
“대원수께서는 형님의 아들들이 있는데, 저에게 황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장인걸은 침중한 안색으로 답변했다.
“만약 황권이 안정되어 있고, 제국의 앞날이 반석 위에 놓인 것처럼 튼튼하다면 자네에게 이런 부탁은 하지도 않았을 걸세.”
“그 말씀은 인정하기 어렵군요. 물론 적들이 쳐들어와 황도를 불사르고, 형님을 시해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 아닙니까. 송나라 최고의 장수라던 악비도 죽었고, 이제 적들의 최후 방어선만 돌파하면…….”
우퀴마이의 반론에 장인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네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있다네. 아니, 자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신(大臣)들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
그러면서 장인걸은 지금 적이 망하기 일보직전이 아니라는 걸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송나라 하나만 두고 생각한다면 별것도 아니지만, 무술에 능한 집단들이 이 전쟁에 끼어들어 송나라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송을 돕는 무림인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에 대한 장인걸의 설명에 우퀴마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론을 했다.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뭐,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장인걸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들고 힘을 가했다.
퍽!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벽옥으로 깎아 만든 찻잔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자, 보고 있던 우퀴마이의 얼굴은 경악감으로 가득 찼다. 힘이 쌘 사람이라면 손아귀 힘만으로도 찻잔을 깰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가루로 만든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가볍게 손을 쥔 것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장인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나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네. 하지만 이 손으로 장정 수백 명이라도 때려죽일 수 있지. 이게 바로 무공의 힘이라네.”
우퀴마이는 그럼에도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반론을 꺼냈다.
“압니다. 대장군께서 하늘도 놀라게 할 정도의 용력(勇力)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리 금나라에는 수십만의 정예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그 무림인이라는 자들이 우리의 병사들을 모두 쳐부술 만큼 강하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우퀴마이의 예상과는 달리, 장인걸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을지는 붙어 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나는 무림인들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네. 자네 혹시 이번에 연경으로 습격해 들어온 자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 있는가?”
“그, 그건 잘…….”
그러고 보니 소문만 무성할 뿐 적들의 자세한 규모는 밝혀진 것이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몇만 명이 한꺼번에 기습 공격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하지만 그건 혼란을 염려한 장인걸이 사전에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안판 발극렬인 우퀴마이조차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번에 황도로 쳐들어온 적의 수는 겨우 백여 명뿐이었다네.”
“헐!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황도에서 전사한 근위병의 숫자만 만 단위가 넘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금나라 내에서도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채 피신을 못 한 황제까지 서거했다. 그런데 그런 참사를 저지른 적의 수가 겨우 백 명 남짓밖에 안 된다는 말에 우퀴마이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을 우리는 무림인이라고 부른다네. 그리고 이번에 황도에 쳐들어온 자들은 그런 무림인들 중 일부에 불과하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무림인들이 지금 송 황실의 편을 들고 있는 게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장인걸은 묵향과 그 부하들이 무림에서도 정상급의 실력자들이라는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퀴마이가 무림인들이 모두 이번에 습격해 들어온 자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게 자신의 말을 풀어 가는 데 있어 수월했기 때문이다.
장인걸의 예상대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우퀴마이는 잠시 후, 힘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과연 우리가 승리할 수는 있는 겁니까?”
그러자 장인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가 전력으로 상대한다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일세. 하지만 지금처럼 황권이나 차지하겠다고 집안싸움을 해서는 절대 승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것일세.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
우퀴마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급작스런 제의를 받았으니 아무래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며 장인걸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고민을 끝냈는지 우퀴마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장인걸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릇이 모자라는 저에게 그런 청을 하실 게 아니라, 차라리 대원수께서 황위를 이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야속 형님께서 예전에 대장군을 후계자로 지목한 전례가 있으니, 다른 발극렬들도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이 군부의 힘을 휘어잡고 있는 장인걸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문제는 장인걸이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황제와 같은 권력이 아닌 무(武)의 극(極)이었고, 묵향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무림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우퀴마이를 상대로 그런 걸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자네의 말은 고맙지만, 3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제국의 황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네. 첫째, 내가 완옌의 성씨를 가지고 있다지만, 내 몸속에는 성스러운 완옌의 피가 단 한 방울도 흐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리고 둘째로는, 내가 황위를 차지할 마음을 먹기에는 선황제를 너무 좋아했었지. 그리고 그 이유는 아직도 유효하다네. 나는 선황제 못지않게 자네도 좋아하거든.”
말을 듣던 우퀴마이의 얼굴에 희미하긴 하지만 감동의 물결이 흘러갔다. 자신을 그토록 높게 평가해 주고, 또 신뢰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에는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부족의 미래에 대해 꿈을 나눴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저마다 워낙 바빴기에 한 자리에 앉아 차 한 잔 나누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내가 황제 노릇까지 하면서 상대하기에는 적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세. 나는 선황제 때처럼 뒤를 걱정하지 않고 전쟁에만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란다네. 알겠는가? 황자들 중에는 그런 능력을 지닌 놈이 단 한 명도 없지만, 자네에게는 나의 바램을 이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저를 생각해 주시는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자들을 제쳐 두고 제가 황위를 잇는다는 것은…….”
장인걸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원통하게 죽은 선황제의 복수는 하지 않을 생각인가?”
복수라는 말에 우퀴마이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형을 잃은 슬픔만 생각했지 그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우퀴마이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그러지,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