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우퀴마이가 밀정을 보내 장인걸의 의사에 따르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 즉시 장인걸은 천마혈검대에 우퀴마이의 호위를 명령했다. 우퀴마이가 제위에 오를 것을 승낙한 이상, 언제 정적(政敵)들이 보낸 살수가 그의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지금껏 생각해 낸 장인걸의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시간 여유가 없는 그에게 그건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잠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리던 장인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경에 와 있는 다른 발극렬들을 차례로 찾아갔다.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6명의 대족장. 즉, 발극렬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우퀴마이를 황위에 올리는 데 있어 가장 우선해서 처리해야만 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중립을 취하고 있던 발극렬 2명의 지지를 얻어 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장인걸이 지지한다는 말은 곧 제국의 군부가 지지하는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거기에 장인걸은 선황제가 가장 신임했었던 인물. 황권에 대한 야망만 있었다면 이미 황제가 되어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장인걸이 지지하는 사람인만큼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장인걸이 지지하는 우퀴마이는 제국 최대, 최강의 부족인 완옌부의 발극렬이 아니던가.
하지만 다른 3명의 발극렬들은 황실과 이권이 걸려 있었기에 상황이 앞의 둘과는 전혀 달랐다. 즉, 그들은 황자들의 장인들이었던 것이다. 훗날 3명의 황자들 중 누군가는 아구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게 뻔한 만큼, 권력욕이 강한 발극렬들은 저마다 황실과의 결혼을 추진했었다.
그렇게 권력욕이 강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장인걸에게 우퀴마이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참살당할 것 같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범인들이 공포스런 마기를 흘리는 장인걸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5명의 발극렬들을 찾아다니며 우퀴마이를 지지하겠다는 확약을 받았지만 장인걸은 편복대를 시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강한 야망은 죽음의 공포조차 이겨낼 수 있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마기(魔氣)에 짓눌려 대답을 하긴 했지만, 야망이 강한 발극렬들은 기회만 있으면 뒤통수를 치려고 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장인걸이 내심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발극렬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편복대주가 보고를 하기 위해 들어왔다.
“국론홀로가 황성을 떠나셨습니다.”
“뭐야! 언제?”
“교주님과 독대를 하고난 다음 날 새벽이옵니다.”
“쯧, 멍청한 놈.”
결국 자신의 사위에게 황위를 주기 위해 장인걸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사위가 황제만 될 수 있다면, 그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꿰찰 수 있을 테니까.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의 사위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말을 듣던 장인걸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고수들을 보내 놈을 없애 버려!”
단호한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되옵니다, 교주님.”
“뭐가 안 된단 말이냐?”
“그가 갑자기 죽는다면, 그의 일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옵니다. 그렇다면 셋째 황자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렇다고 지금 셋째 황자를 죽여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옵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침음성만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흐음…….”
“아무리 작은 규모라 해도 내전을 벌인다는 건 국력 낭비이옵니다. 일단 분쟁이 시작되면 서로 간에 없었던 원한도 생길 테고, 그렇다면 화합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옵니다. 또, 내전이 시작되면 다른 두 발극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않사옵니까.”
장인걸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다. 마교에서도 그 웬수같은 놈과 내전을 벌이다가 몽땅 다 말아먹었던 전례가 있었지 않은가. 치솟는 화를 억지로 억누른 장인걸은 편복대주를 향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국론홀로에게 사람을 보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황도로 돌아오라고 전해라. 본좌와 겨뤄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일 테니까.”
“존명!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몽고쪽 정세는 어떤가?”
최근 황위 계승 문제로 골머리가 아팠던 장인걸이었다. 더 이상 그놈의 황위 계승 따위의 대화는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기분 전환삼아 꺼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장인걸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수하들의 추측으로는 아마 날이 풀리기만 하면 서남부 최대의 부족장인 옹칸과 테무진이라는 신흥 부족장이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뭔가?”
“작년 가을에 그 둘이 연합하여 타타르라는 대부족을 멸망시켰사옵니다. 이제 몽고 초원에는 그 두 세력을 당할 자가 없게 되었으니, 누가 몽고의 맹주가 될 것인지 결판을 내야 할 게 아니겠사옵니까.”
“흠, 맹호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중얼거리던 장인걸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쪽 국경을 건드리고 있는 게 테무진이라는 놈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교주님.”
편복대주의 대답에 장인걸은 환히 웃으며 무릎을 쳤다.
“잘됐군! 그렇다면 북방의 병력을 좀 빼도 상관없겠어. 놈은 지금 옹칸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말이야.”
“그건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서 편복대주는 현재 몽고가 금나라 국경을 침입해 들어오는 건 단순한 약탈을 위한 것이지, 대대적인 침입이 아님을 강조했다. 척박한 몽고의 대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부족한 식량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 바로 약탈이었다.
“식량 보충을 위해 놈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계절은 봄이옵니다. 일 년 중 가장 식량이 모자라는 계절이니까요. 그런 만큼 지금 국경에서 병력을 빼낸다는 건 수비를 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곤란하옵니다.”
편복대주의 설명에 장인걸은 분노 어린 어조로 외쳤다.
“대대적인 침입도 아니고, 몇 십, 몇 백 기 정도가 기습해 들어온다고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니……. 참으로 무능한 놈들 같으니라구!”
장인걸의 분노에 편복대주는 잽싸게 고개를 숙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면으로 붙는 것도 아니고 틈만 나면 이곳저곳에서 쑤시고 들어오기 때문에, 장대한 국경선 전체를 철통같이 막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몽고와의 국경 일대는 지금 완전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으니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동력이 좋은 몽고 도적 떼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와 분탕질을 일삼고 있었기에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편복대주의 보고를 듣던 장인걸의 가슴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단 한 명의 병사도 아쉬운 판에, 하찮은 몽고놈들까지 딴죽을 걸고 있다니…….
“뭔가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답답해서 해 본 말에 편복대주가 이렇게 대답을 하니, 장인걸은 오히려 의외라는 듯 급히 되물었다.
“방법이 있다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었느냐!”
장인걸의 질책에 편복대주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것이라서…….”
“당장 말해 보거라! 네 계책을 쓸지 안 쓸지는 본좌의 몫이니.”
“선황제께서 몽고에 파견한 사신 일행이 며칠 전 황성에 도착했사옵니다.”
“몽고에 사신을 보냈었다고? 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며 편복대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황제께서는 남쪽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북쪽의 안정을 도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대족장 테무진과 동맹을 맺는 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말을 듣던 장인걸은 고개를 주억거려 자신의 생각도 같음을 표시했다. 사실, 지금 몽고 국경에 배치된 병력의 수는 엄청난 것이다. 놈들과 동맹만 맺을 수 있다면 그 병사들 중 일부를 남쪽으로 빼돌릴 수 있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처는 송나라가 있는 남쪽이었다.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것은 양보해도 상관이 없다. 나중에 다시 뺏어오면 그만이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장인걸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기대가 섞인 어조로 물었다.
“선황제는 여진족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지. 그래, 놈의 대답은?”
“저…, 그게…….”
편복대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장인걸은 약간 표정을 굳히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 촌놈이 원하는 게 뭐라던가? 가감없이 정확히 말해 보라!”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으시옵소서.”
편복대주가 서두를 이렇게 꺼냈을 정도로 테무진이 요구한 건 엄청난 것이었다. 그중 가장 말도 안되는 것 4가지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과거 송에서 요에 바쳤던 세폐와 동일한 액수의 세폐를 매년 보내 줄 것.
둘째, 매년 20만 관(750톤)의 철을 보내 줄 것.
셋째, 도검(刀劍)을 제작할 수 있는 우수한 장인 천 명을 보내 줄 것.
넷째, 황녀를 시집보내 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