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수련을 끝마친 조령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객잔으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어 온 몸이 끈적거렸지만, 이제 곧 시원한 물로 목욕할 걸 생각하면 기분만은 상쾌했다. 그리고 지금껏 나약하게만 살아왔던 자신이 이런 고행을 참고 견디고 있다는 것에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조령은 낯선 인물이 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쟈타르가 앉아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쟈타르를 찾아온 손님인 모양이었다.
문득 조령은 짜증이 치솟았다. 매일 이맘때쯤 돌아왔고, 또 오자마자 자신이 목욕부터 한다는 걸 잘 알 텐데, 왜 손님을 아직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뒀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령이 쟈타르에게 뭐라고 톡 쏴 주려고 했을 때, 상대편에서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놀랍게도 그 말은 그녀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어 보는 언어. 즉, 여진어였다.
“처음 뵈옵니다, 황녀 마마.”
조령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쟈타르와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소신(小臣)은 대원수부 휘하 편복대에 소속되어 있는 이철륜이라 하옵니다.”
쟈타르는 얼이 빠져 있는 조령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의자에 앉자마자 조령은 두 사내를 둘러보며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여진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
조령의 걱정에도 이철진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황녀 마마, 오히려 이게 더욱 안전하옵니다. 하녀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엿들었다고 해도, 그 내용을 모르는 이상 발뺌할 수 있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니까요.”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조령은 이철륜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바마마께서는 일향(一向) 만강(滿康)하신지요?”
조령의 물음에 두 사내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이철륜은 이곳에 오자마자 그 일로 대화를 나눴기에 쟈타르도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속하가 온 것이옵니다.”
“혹, 아바마마의 신상에 무슨 변고라도?”
“폐하께서 승하(昇遐)하셨나이다.”
말을 듣던 조령은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던가. 바로 천하를 호령하는 금나라의 황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승하하셨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궁에서 몰래 도망치기 전날, 우연을 가장해서 아버지를 찾아가 시치미를 떼고 담소를 나눴었다. 설마,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 조령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궁에 그냥 남아 있는 건데…….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감히 짙은 슬픔에 빠진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기에 침묵은 더욱 길어졌다. 한참 후에야 조령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줬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인식했다는 듯.
“건강하신 분이셨는데, 어쩌다가……?”
“악적 묵향이 황도를 습격하여 폐하를 시해했사옵니다.”
묵향이 그랬다는 말에 조령의 표정이 아연하게 바뀌었다. 진팔을 통해서 알게 된 희대의 고수. 조령에게 있어 묵향에 대한 평가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되어 버렸다니…….
“원래는 마마를 즉시 황도로 모시는 게 옳겠지만, 그 전에 이걸 한번 읽어 보시옵소서.”
이철륜은 품속에서 봉서를 꺼내 조심스럽게 건넸다. 봉서를 받기 위해 손을 뻗던 조령은 봉서를 받기 전에 움찔했다. 이게 뭘까? 혹, 아바마마께서 남긴 유서일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죠?”
“그건 편복대주께서 마마께 올리는 서신이옵니다.”
“편복대주가……?”
조령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복대주를 만나 본 적도 없는데, 그가 왜 자신에게 서신을 보낸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신의 내용은 황제를 잃은 마마가 얼마나 상심할지 걱정이 된다는 따위의 말로 가득 차 있었지만, 쓸데없는 잡소리들을 다 뺀다면 단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바로 선황제 폐하의 복수를 하는 셈 치고 첩자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이다. 워낙 경계가 치밀해서 편복대에서는 마교 쪽에 첩자를 끼워 넣을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령은 그걸 너무나도 쉽게 해 버렸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진팔과 만나, 우연한 기회에 묵향 주변에 머물게 된 조령이야말로 편복대로서는 최적의 첩자였던 것이다.
서찰을 다 읽은 조령은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첩자라니…,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이철륜은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집어 촛불 위에 올려놓았다. 화르륵 타오른 서찰은 순식간에 하얀 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침통한 표정의 이철륜의 입에서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마께옵서는 폐하의 죽음이 원통하지도 않으시옵니까? 그자를 파멸시키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느냐는 말씀이옵니다.”
“무, 물론 복수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마마께서는 마교 쪽 사람들과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마화라고 하는 흑풍대 부대주하고 말입니다.”
조령은 힐끗 쟈타르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적을 쟈타르는 낱낱이 위쪽에 보고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걸 그녀도 탓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임무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쟈타르의 보고에 의하면, 천지문에 있는 소연이라는 여고수와 친분을 쌓고 계시다지요?”
조령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이철륜은 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얘기를 듣던 조령은 의아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마화와 친하게 지내라는 건 이해할 수 있겠는데, 왜 갑자기 여기에 소연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이해하건 말건, 이철륜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녀들과 나눈 대화를 저희들에게 모두 알려 주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원래 중요한 정보는 소소한 것들이 집약되어 얻어지는 것이니까요. 선황제 폐하의 복수를 하신다 생각하시고, 제발 저희들의 요청을 거절치 말아 주시옵소서. 마마.”
일급비밀을 빼내 오라는 것도 아니고, 대화 내용을 알려 주는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조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철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복을 하며 말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신 마마께 편복대주님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편복대가 조령에게 정보 수집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라는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가 살아 있다면 그가 총애하는 황녀를 첩자로 써먹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아무리 들킬 확률이 낮은 안전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쟈타르를 통해 찔끔찔끔 정보를 획득하는 것으로 만족했었던 편복대주였지만, 황제가 죽자 조령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철륜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던 조령은 마치 기갈이라도 들린 듯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신에게 그토록 잘해 줬던 소연을 팔아넘긴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봐야 뭐 하겠어. 벌써 다 끝난 일인데.’
아무리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지만 악적 묵향도 아닌 소연 일행을 편복대가 납치할 수 있도록 조령이 협조를 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독해서가 아니었다. 처음에 그러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을 믿고 아껴 주는 소연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연은 자신이 연모의 정을 느끼고 있는 진팔 공자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하지만 소연이 마교에서 돌아왔을 때 보여 준 진팔의 격렬한 반응을 본 조령은 질투에 눈이 뒤집혔다. 그 전에는 진팔 공자가 소연을 따르는 것이 같은 동문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진팔이 소연을 향한 속마음을 잘 숨긴 것도 있었지만, 온실 속의 화초와도 같이 주위의 떠받듦 속에서 성장한 그녀였기에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 있어서 비교적 둔감했다. 그래서 진팔이 소연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심에 눈이 먼 그녀는 편복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연적(戀敵)인 소연을 만현으로 유인하여 납치당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진팔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이철륜에게 신신당부해 놓았기에 그의 처우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첩자 생활에 지친 조령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진팔이 감금되어 있는 황도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진팔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힌 뒤 매달려 볼 생각이다. 남은 인생 동안 엄청난 부귀영화가 보장되는데 결코 자신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부실한 도사들
금나라와의 최접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양양성의 모습은 꽤나 평화로웠다. 봄이 되어 산천이 온통 푸른빛 물결로 뒤바뀌었음에도 양쪽 다 약속이나 한 듯 병사들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이 됨과 동시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예측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조용했다.
하지만 모두들 이 평화로움이 폭풍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고요함과도 같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양측 다 이쯤에서 휴전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휘부가 이 기간 동안 부대를 재정비하거나, 상대의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양양성의 내부는 오랜만의 평화로 왁자지껄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최일선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병사들이나 무사들은, 이 소중한 짧은 휴식 시간을 최대한 즐겼다. 만약 계속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 나간다면 몸과 마음이 버티지를 못한다.
군이나 무림맹의 수뇌부는 그들이 너무 흐트러진 모습만 보여 주지 않으면 적당히 눈을 감아 주었다. 쉴 수 있을 때 푹 쉬는 것이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기가 넘치는 사내들이 술을 마셔 대는데 사고가 터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인지 술에 취한 병사나 무사들이 가벼운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대열에 곤륜파의 도사들과 마교의 흑풍대 대원들 또한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대원들이 곤륜파 도사들과 패싸움을 벌이다 터지고 들어온다는 것을 흑풍대의 수뇌부에서는 아직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맞고 들어온 대원들 역시 도사들에게 두들겨 맞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윗선에 보고하겠는가. 오히려 대원들은 이를 갈며 나중에 곤륜파 도사들을 만난다면 반드시 이 빛을 되갚아 주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만약 사상자가 한 명이라도 나왔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아직까지는 가벼운 주먹다짐 정도에 그치고 있었기에 수뇌부에서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대원들이 두들겨 맞고 들어온다는 것을 몇몇 백인장급은 눈치를 챘다. 하지만 지옥과도 같은 전장을 헤쳐 나온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가벼운 주먹다짐 정도야 애교 정도로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부하들이 두들겨 터지고 들어온다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런 걸 가지고 부하들을 족칠 정도로 꽉 막힌 이들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군부처럼 알력이 심한 단체에서 성장한 그들이었기에, 해묵은 원한이 쌓인 상대와 동거하는 데 있어서 이 정도 충돌쯤은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회식이나 할까?”
소연이 납치되고 난 후,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을 하느라 핼쑥하게 변한 마화의 얼굴을 보기가 안타까웠던 임충이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나는 됐고, 애들이나 데리고 다녀와.”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아주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너가 이럴수록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더 힘든 거 몰라? 애들이 요즘 너 눈치 보느라 아주 설설 기드만.”
임충의 말에 마화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의 심기가 안 좋은데 마음이 편할 수하들이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부대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사기도 함께 떨어지는 법이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마화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마화가 승낙을 하자 행여 마음이 바뀔세라 임충은 잽싸게 천인장들을 소집해 저녁에 회식이 있음을 알렸다.
천인장을 보좌하기 위해 함께 따라왔던 백인장들 중 일부가 ‘언제 비상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냥 장원 안에서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제안을 했었지만,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임충은 그냥 가볍게 듣고 넘겨 버렸다.
그날 저녁 식사도 할 겸, 술도 마실 겸 마화는 흑풍대의 천인장들을 이끌고 객잔으로 갔다. 군부 출신들답게 모두들 하나같이 두주불사(斗酒不辭)를 자랑하는 술고래들이니 반주로 한두 잔 마시고 끝낼 리 없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몇 병 시켜 놓고 담소를 나누며 마셨지만, 어느 정도 술이 오르기 시작하자 모두들 본색을 드러냈다. 작은 잔으로는 감질나서 못 마시겠다며 사발에 술을 따랐고, 병으로 주문하던 것이 아예 통으로 바뀌었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의 입이 귓가에 걸린 것과는 달리 술통을 나르는 점소이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객잔에 비축하고 있던 술이 동이 나 버렸기에, 급히 술을 구해 오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마화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 주위로 빈병들과 비워진 통들이 굴러다니고, 모두의 얼굴이 몽롱하게 풀렸을 정도로 취기가 올랐을 때였다. 식사를 하러 왔는지 객잔으로 들어오던 도사들 중 한 명이 마화 일행을 발견하였다. 그는 곁의 도사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소곤거렸고, 말을 들은 도사는 빠르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도사들은 일단 구석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시킨 뒤 마화 일행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전포(戰袍)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면 장교급들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까지 나와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런 복장을 하고 여기서 술을 마시는 자들은 흑풍대원뿐이었던 것이다.
마화 일행을 곁눈질로 훔쳐보던 말상의 도사의 미간이 왈칵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들이 좀처럼 보기 힘든 미녀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왠지 모를 울화통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자, 옆에 앉아 있던 도사가 재빨리 손을 움켜쥐었다.
“자네 왜 이러나?”
“사형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처리하세. 보아하니 다들 술에 쩔어 고주망태가 된 것 같은데 말이야.”
지금까지 곤륜파 도인들이 흑풍대원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의 차이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는 기마전을 주로 익힌 흑풍대원들과 대인 격투를 중심으로 수련한 곤륜파 도인들이 맨주먹으로 패싸움을 벌인다면 어느 쪽이 유리하겠는가.
더군다나 곤륜파 도인들은 이른바 ‘쪽수의 법칙’이란 것에 충실했다. 언제나 두 배 이상의 숫자가 확보되었을 때에만 싸움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객잔에 들어왔을 때 마화 일행의 숫자가 자신들보다 많자, 곧바로 사형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잠시만 참게. 곧 사형들이 당도할 테니 말이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도인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곁눈질로 마화 일행을 훔쳐보았다. 우락부락한 사내들 틈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은 도인이 보기만 해도 행복할 만큼 예뻤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사발로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은가. 순간 그 주위에 둘러앉아 태연한 모습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흑풍대원들이 가증스럽게만 느껴지는 도인이었다. 여인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하게 만들려는 사내들의 속셈이 뻔하지 않은가. 도인은 내심 이를 으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원시천존이시여, 오늘만큼은 제발 눈을 감아 주시길. 내 저놈의 종자들의 아랫도리를 모조리 박살 내 버릴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