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0화 (606/930)

편견과 진실의 간극

항의 서한을 발송하기는 했지만, 마교의 장로급이 이곳으로 직접 방문하겠다는 회답은 곤륜파 수뇌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예 무대응으로 있던지, 아니면 기껏 당주급 인물이 와서 뭘 그딴 일로 이렇게 난리를 치느냐며 뻔뻔스럽게 대응을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수십 명의 문도들이 다치기는 했지만 대다수가 하급 문도들이고, 무엇보다 사상자가 전혀 없지 않은가. 곧바로 수뇌부가 소집되어 누가 대응을 전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수뇌부의 골머리를 썩인 것은 마교의 장로급에 걸맞은 인물을 선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동안의 토론 끝에 이곳 양양성에 와 있는 곤륜 문도들 중 무황 다음의 끗발을 지니고 있는 무량 대장로가 접객을 맡기로 했다.

무량 대장로는 선임이 되자마자 급하게 제자들을 사건이 터진 객잔으로 보내 마교에서 먼저 도발을 했다는 명확한 증거를 모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혹시라도 이번 사건이 곤륜파에서 먼저 잘못을 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나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걸 마교의 장로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마교 장로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뭣! 벌써?”

객잔으로 보낸 제자들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제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수밖에.

그런데 이런 상황이 무량진인으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를 제자들이 들고 오기 전까지 마교의 장로라는 자에게 궁색한 주장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던 것이다.

잠시 고심하던 무량진인은 대기하고 있던 제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탁을 연못에 마련하고, 손님들을 그리로 모시거라. 풍류를 논하며 시간을 끄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다과를 나르는 여제자들의 행색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야.”

“염려 놓으십시오, 대장로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는 제자를 불러 세운 뒤 무량진인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얼마나 많은 무사들을 거느리고 왔다고 하더냐?”

마교 무사들이 내뿜는 마기는 워낙에 무시무시해서 무력 시위로는 최고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장로급이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많은 무사들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면 수뇌부들을 전부 끌어 모으는 한이 있더라도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게 무량진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자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 그게 호위무사 한 명만을 대동하고 왔다고 합니다.”

“한 명뿐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비록 지금이야 손을 잡고 있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문파의 한복판으로 호위무사 한 명만을 달랑 거느리고 들어온다니. 게다가 좋은 일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얼마나 자신들을 얕잡아 보았으면 이렇게까지 방자하게 구는 것인지 무량진인의 청수하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잠시 후, 연못 중앙에 만들어진 정자에서 손님을 맞이한 무량진인은 관지 장로의 뒤에 시립해 있는 호위무사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을 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록 호위무사가 상당한 미모의 여인이었지만 곧 마교 장로와 치열한 머릿싸움을 벌여야 하는 그였기에 여인에게 눈길을 보낼 만큼 마음이 한가롭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여인의 두터운 화장 밑에 감춰져 있던 푸르둥둥한 멍 자국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관지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무량진인은 정자 안에 마련해 놓은 의자를 권했다.

“여기가 이 장원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곳인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소이다, 무량수불.”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연못에는 커다란 비단잉어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고, 정자 위로 폭포가 쏟아지듯 흘러내린 연못가의 능수버들 가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린다. 과연 풍류를 논하며 시간을 끌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봐야 했다.

관지 장로는 예의상 힐끗 주위를 둘러본 다음 단조로운 음색으로 대꾸했다.

“아름다운 곳이군요.”

너무나도 메마른 대답에 무량진인의 눈에 난감함이 어렸다. 단순무식하기 그지없는 마교도를 상대로 풍류를 논할 생각을 했다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진 무량진인이었다. 저쪽에서 뭐라고 해 줘야 이쪽에서 물고 늘어지면서 대화가 연결될 텐데, 저쪽은 아예 그럴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먼저 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부터 밝히는 게 순서겠군요.”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말을 꺼내다니, 회담의 예의도 모르는 놈이라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무량진인은 침착하게 대꾸를 했다.

“허허,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는데 우선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목을 축이시는 게…….”

말을 하던 무량진인은 일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마교의 장로가 자신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사죄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안 좋은 일로 오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 안 좋은 일이라니요. 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헛헛헛.”

뭔가 묘한 허탈감이 감도는 억지 웃음.

“이미 엎질러진 물인 만큼 다시 주워 담지는 못하겠지만, 그 사후 처리는 이쪽에서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큰 부상자가 나오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수하들을 엄히 단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관지 장로의 솔직한 사과에 무량진인의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상대가 이렇듯 잘못을 시인해 올 줄은 전혀 예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대책 회의에서도 상대가 위협을 해 오면, 이쪽은 어떻게 받아치는 게 좋을지 그런 것들만 논의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아무리 노회한 무량진인이지만 지금 머릿속이 온통 엉켜 버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귀관도 용서를 청하는 게 좋지 않겠나?”

관지의 말에 뒤에 시립해 있던 미모의 호위무사가 공손히 포권하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킨 점 사과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미모의 여인이 어젯밤의 패싸움을 일으킨 당사자 중 한 명이라니……. 하기야 무림에는 겉모습과 달리 표독스런 여시주들도 많았기에 그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비록 마교의 무사이기는 하나, 상당한 미모의 여인이 사과를 청해 오자 무량진인의 마음도 저으기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무량진인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 사과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쪽 제자들의 잘못도 분명 있었겠지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이 일은 이쯤에서 묻어 두고 앞으로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동맹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무량진인의 말에 관지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래야겠지요.”

이곳에 온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한 관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마교로 돌아갔다.

손님을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무량진인의 마음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얘기가 잘 풀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로급 인물로부터 정중한 사과까지 받아 내지 않았는가.

그때였다.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던 무량진인을 부르는 청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곤륜무황이었다. 무량진인은 급히 뒤돌아 서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찾으셨습니까? 사숙.”

“방금 찾아왔던 이는 누구였는고?”

원한이 골수에까지 사무쳐 있는 원수인 마교도들에게 문도들이 쥐어 터진 사건이다. 괜히 이런 안 좋은 일을 무황께 아뢰 심려를 끼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곤륜의 수뇌부는 아예 이번 일을 무황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질문을 받은 무량진인은 곤혹스러움에 일순 안색이 창백하게 바뀌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지만, 무황은 지금까지도 그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사숙이었다. 인간적인 정을 느끼기에도 황송스러울 정도로, 위대한 분이었던 것이다. 아니, 무량진인에게 있어 어쩌면 사숙은 살아 있는 신선이나 다름없었다.

“그…, 그게…….”

“누구였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잠시 고민하던 무량진인은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관지라고…, 마교의 장로입니다. 지금 양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흑풍대의 대주이기도 하지요.”

“마교의 장로라고? 그러고 보니 뒤에 서 있던 여시주의 얼굴이 조금 낯이 익더라니…….”

처음 양양성에 도착해서 교주를 만나러 갔을 때, 무황은 관지를 보지 못했다. 관지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더냐?”

“그, 그게…….”

“허허, 왜 대답을 못 하는 게냐? 어서 말해 보거라.”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무량진인은 더듬더듬 어젯밤에 있었던 사건을 이실직고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잘못은 저쪽에 있었음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마교의 장로급이 급히 달려와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간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마교도에게 줘 터지고 들어왔다는 것만 본다면 무황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저쪽이 먼저 도발을 해 벌어진 일이고, 마교로부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겠다는 정중한 사과까지 받아 낸 것을 감안한다면 곤륜파로서는 충분히 면목이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을 다 들은 무황은 뭔가 석연찮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더냐?”

“어찌 사숙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사실입니다, 사숙.”

“거~ 참, 이상한 일이로다. 너는 그자의 뒤에 서 있던 여시주의 얼굴을 봤더냐?”

“그, 그게…….”

중요한 회담을 앞두고 어찌 여인에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의도적으로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무량진인은 급작스런 무황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시주의 얼굴을 살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던가?’

질문의 진의가 뭔지를 몰라 무량진인이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무황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쯧, 한 문파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눈길이 가야 하는 법이거늘. 도인이라는 틀에 사로잡혀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게로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시주의 얼굴에 짙은 분 사이로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보이더구나. 아마 어젯밤 난투극에서 입은 상처겠지.”

무량진인도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관지 장로의 명에 따라 여시주도 제게 사과했었습니다. 그 여시주도 난투극에 참가했다고 하더군요.”

“너는 그 여시주의 무위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했더냐?”

마화가 정통마공을 익힌 고수였다면 무량진인이라도 그녀의 무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온 몸에서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마기를 내뿜고 있었을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녀는 마공을 익힌 게 아니었고, 그 때문에 웬만큼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그녀의 무공 수위를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그, 그게…….”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데려온 호위 여고수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무량진인이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사숙께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미숙한 놈이라고 핀잔만 들을 게 뻔했으니까.

“겉보기에는 가녀리게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제법 높은 경지를 이룩한 여시주였느니라. 본문의 제자 수십 명이 덤빈다 해도 멍 자국 하나 내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상대가 이쪽을 봐주며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이쪽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여자에게까지 주먹을 날렸다는 말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고 무량진인은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는 재빨리 항변했다.

“하, 하지만 그 여시주는 술에 취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숙.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술에 대취한 상태라면 하수들에게도 몰매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무황은 무량진인의 지적을 인정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너는 그곳에서 그녀 혼자서만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예, 모두 열한 명이라고…….”

“그녀의 무위로 봤을 때, 꽤나 고위직에 있음에 분명해. 그런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던 자들이 일부러 주위에 있는 도사들에게 시비를 걸었겠느냐?”

“그, 그렇다면…….”

“내가 알기에는 여시주들은 자신의 얼굴을 생명처럼 아낀다고 들었다. 대취한 상태였다고 해도 자신의 얼굴에 멍 자국을 만든 사람을 그녀가 가만히 놔뒀을 것 같으냐?”

“…….”

“그녀 정도의 실력자라면 한 순간만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본문의 웬만한 문도들은 목숨을 내놔야 할 게야.”

그녀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에 무량진인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그 정도였습니까?”

“얼굴에 상처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무위를 드러내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끝낸 걸 보면, 그녀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노부는 생각한다. 찬찬히 다시 한 번 조사해 보거라. 내 생각에는 잘못은 아마도 이쪽에 있었을 게다.”

곤륜무황의 말에 무량진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했다.

“마교도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를 청할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굽히고 들어온 건, 큰일을 앞두고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데 따른 배려였겠지.”

“…….”

“네게 누누이 일렀듯 선입관을 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거라. 교주를 만나러 그의 장원에 찾아갔을 때, 흑풍대원들의 모습을 노부와 함께 보지 않았더냐? 그들은 마공이 아니라 정파의 무공을 통해 절정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는 자들이었느니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마교에 적을 두고 있지만, 그 전에는 내노라 하는 이름 있는 고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게다. 그런 자들이 그토록 몰염치한 짓을 했겠느냐?”

도저히 사숙의 말을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드러나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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