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1화 (607/930)

무황과의 대화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객잔으로 조사를 보낸 제자들이 보고를 하기 위해 들어왔다. 심기가 편치 못했던 무량진인의 눈치를 살피는 그들의 얼굴은 회담 전에 조사를 끝마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침울해 보였다.

“제자들이 시간을 맞추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대장로님.”

“됐다, 그건 그렇고 저쪽에서 먼저 도발을 했다는 증거는 확보해 왔겠지?”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는 것이었다. 무량진인은 답답한 마음에 짜증스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허, 뭣들을 하는 게냐? 가서 보고 들은 바를 어서 말하지 않고!”

질책을 듣자 한 제자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무량진인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뭣이? 우리 쪽에서 먼저 주먹을 날렸다고?”

계속되는 제자의 보고에 무량진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누가 먼저 도발을 했는지에 대한 증거와 증인은 사건이 벌어졌던 객잔에 도착하자마자 주위에 널려 있었다. 문제는 그게 곤륜파에 안 좋은 것이었다는 데 있었다. 패싸움에 대한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곤륜파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객잔 주인이 쏜살같이 달려와 입에 거품을 물며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객잔 주인으로서는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시켜먹고 가는 흑풍대원들에게 틈만 나면 시비를 거는 곤륜파 도인들이 사실 눈엣가시였다. 기껏해야 소면이나 시켜 먹는 주제에 말이다. 더군다나 어제는 한동안 장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객잔을 박살 내 놓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조사관이 나왔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근처 객잔 주인들까지 몰려와 곤륜파를 성토하기 시작했는데 흥분한 그들을 달래려 제자들이 무척 당혹스러웠다는 것이다.

보고를 다 들은 무량진인은 머리가 아픈지 한동안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다 제자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지금 당장 이 사건에 연루된 제자들을 불러들여 책임을 추궁해! 아니, 객잔 주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했으니, 그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도 진행하거라. 그래서 이런 못된 짓을 한 제자들이 누군지 철저히 발본색원(拔本塞源)하란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로님.”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던 대장로의 입에서 격한 호통이 터져 나오자 제자들은 당혹한 표정으로 황급히 복명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허, 정말 답답하구나. 도대체 평소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켰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중에 나온 조사 결과에 무량진인은 완전히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하급 문도들이 지금까지 조직적으로 흑풍대 무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니……. 그것도 우발적이 아닌 의도적으로 말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관지에게 정중한 사과를 받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무량진인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러움은 제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다.

급하게 수뇌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한 무량진인은 말을 꺼내기 전에 치솟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낮은 소리로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경문부터 외워야만 했다. 만약 지금 경문이 아니라 다른 말을 꺼내게 된다면, 자신이 어떤 명령을 내리게 될지 그 자신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평생을 곤륜파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무량진인이었기에, 문파의 얼굴에 먹칠을 한 제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마교이지 않은가.

무정진인(戊正眞人)은 그런 사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게 옳겠으나, 이 일에 연루된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중징계를 내린다면, 오히려 징계로 인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경문을 중얼거리고 있던 무량진인이 문득 탄식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허허,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니……. 도대체 자네들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겐가?”

“송구스럽습니다, 사형. 이쪽으로 이동해 온 후, 자리를 잡느라 모두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보니 아랫것들을 살피는 데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허탈한 마음에 연신 탄식을 터트리던 무량진인은 잠시 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 일에 연루된 자들 중,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닌 자 10여 명을 골라 징계토록 해라. 단,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확실한 본보기가 되어야만 할 것이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형.”

회의를 끝마친 후, 집무실로 돌아온 무량진인은 허탈한 안색으로 원시천존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삶에 지친 그에게 언제나 큰 위안을 안겨 줬던 인자한 얼굴이었건만, 오늘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사숙께서는 단번에 핵심을 집어 내셨는데, 나는 어찌하여 아직까지도 이토록 미숙하단 말인가? 원시천존이시여, 제발 제게 세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혜안(慧眼)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가 한탄하고 있을 때, 제자 하나가 달려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황께서 대장로님을 찾으십니다.”

곤륜무황이 그를 찾는 이유는 뻔한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원인을 어느 쪽에서 제공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을 듣고 싶은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곤륜무황을 찾은 무량진인은 먼저 고개를 깊이 숙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사죄했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지만 사숙께서 하신 말씀이 옳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의 전모를 모두 말했다. 말을 들은 곤륜무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교주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거라.”

뜻밖의 말에 무량진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대꾸했다.

“필요하면 제가 마교로 찾아가 사과를 하고 오겠습니다. 이런 일로 문의 제일 어른이신 사숙께서 직접 나서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곤륜무황은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교주와 만나 담소라도 나누고 싶은 것이니 말이다.”

완강한 무황의 말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량진인은 입을 열었다.

“사숙의 뜻이 정히 그러하시다면 즉시 사람을 보내 사숙께서 방문하셔도 좋을 날짜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무량진인이 나가고 난 후, 곤륜무제는 혓바닥을 찼다.

“원대한 꿈을 안고 중원으로 나왔거늘, 체면과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큰 것을 자꾸 놓치고 있으니……. 쯧쯧, 못난 놈 같으니라구.”

하지만 교주와 곤륜무황의 두 번째 만남은 다음 기회로 미뤄졌다. 왜냐하면 그때 묵향은 양양성을 떠나 대별산맥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곤륜무황은 자기 이름으로 다시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과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에 양양성에 오신다면 같이 향기로운 차나 한잔 나누자는 말로 끝을 맺으며.

여우의 꼬리를 잡아라

관지로부터 일주일간의 근신 처분을 받은 마화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조령의 잦은 방문은 너무나도 반가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조령의 언행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필요 이상으로 마교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묻고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납치된 소연 일행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만약 마화가 근신처분을 받지 않았다면 일에 치여 눈치채지 못하고 넘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에 처박혀 하는 일 없이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지내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처음에 마화가 조령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진팔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짓는 미묘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건 걱정과 근심이 아닌 아련한 그리움이었다. 마화는 진작부터 조령이 진팔을 은근히 사모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었다. 만약 진팔에 대한 연모의 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면, 조령이 지어야 하는 표정은 그게 아닌 것이다.

마화는 아직까지도 20여 년 전, 묵향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던 그 절망적인 시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마치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미친 듯 묵향의 행방을 찾았었다. 그때 얼마나 애간장이 끓었는지 지금도 당시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면 묵향의 그 뻔뻔스런 낯짝을 두들겨 패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의 조령을 보면 전혀 그런 절박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진팔은 행방불명된 것이 아닌 납치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진팔의 손이 잘려 상자에 담겨져 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자신과 조령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기에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녀로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조령의 묵향에 대한 태도였다. 평소 부대의 이동이나 작전에 대해 은근히 물어보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 묵향의 행방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령의 눈빛에서 강한 증오심을 엿볼 수 있었다. 묵향이 그녀를 꼴도 보기 싫어하는 걸 알기에 조령 역시 좋은 감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령이 보인 증오심은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조령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여진족이라는 그녀의 출신이었다. 그리고 은밀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대의 작전이나 이동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납치된 동료를 걱정해서 하는 행동으로는 너무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마화는 근신이 풀리자마자 무영문에 기별을 넣었다. 그냥 덮어 두기에는 조령의 행동이 너무 의심스러웠고, 혼자 은밀히 조사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비마대(秘魔隊)를 움직이자니 자칫 그 사실이 묵향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조령을 싫어하던 묵향이었으니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뛸 게 분명했다. 만약 자신의 육감과는 달리 조령에게 아무 죄도 없다면,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화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무영문에 그 조사를 의뢰했던 것이다.

무영문과의 연락은 마화가 책임지고 있었기에 무영문 쪽의 연락책과 접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화의 설명을 다 들은 무영문의 연락책은 의뢰 내용을 종이에 써 내려가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조령 낭자를 조사해 달라는 겁니까?”

“예, 혹시 모르니 조령과 쟈타르 둘 다 부탁해요.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절대 그쪽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해 주세요.”

마화의 부탁에 연락책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천하의 무영문을 어떻게 보고 그런 초보적인 주문을 한단 말인가.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연락책의 모습에 마화는 잠시 고민을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무영문을 못 믿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에요. 혹시 그들과 연관된 제3의 세력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지요. 만약 그들이 먼 곳에서 조령이나 쟈타르를 항시 관찰하고 있다면, 어설프게 조사를 하다가는 금방 그들에게 들키지 않겠어요?”

순간 연락책은 눈빛을 빛내며 되물었다. 어쩌면 뭔가 큰 건수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제3의 세력이라고 하시면……?”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던 마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추측일 뿐인데, 그녀가 장인걸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조령과 쟈타르는 여진족 출신이거든요.”

“…….”

전혀 예상도 못 한 마화의 말에 연락책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다.

“그저 추측일 뿐이에요. 그래서 내 수하들에게 그들의 감시를 맡기지 못한 거죠. 잘해 줄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셨는데 실수를 할 저희 무영문이 아닙니다. 최대한 주의해서 은밀하게 그들을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조사 결과는 저에게만 보고해 주세요.”

조사 결과는 의뢰주에게 통보되는 게 불문율이었고, 또 마교와 무영문 간의 정보 소통에 있어 마교쪽 당사자는 마화였다. 그렇기에 그런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결국 마화에게 결과가 통보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새삼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연락책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안 좋을지도 모른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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