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5화 (611/930)

양양성으로 돌아가자마자 관지 장로는 곤륜파의 대장로를 찾아가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진의를 묻고 싶소이다. 얼마 전에 벌어졌던 치욕적인 사건을 되풀이하자고 하시다니…….”

무량진인은 관지 장로의 제안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문도들에게 예전처럼 뒷골목에서 싸우도록 해 달라니,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말이다. 이러다 이쪽에 모든 책임을 홀딱 뒤집어씌우려는 간계일 수도 있었다. 혹시 아니라고 하더라도 만약 이런 소문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그 창피를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완강하게 거부하는 무량진인의 모습에 관지 장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양양성에는 장인걸이 파견한 첩자들이 암약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들에게 이쪽의 치부를 보여 주자는 말입니다.”

무량진인의 눈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치부를?”

“예. 지금 양양성에 와 있는 무림인들의 양대축을 형성하고 있는 게 우리와 그쪽이 아니겠습니까?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해묵은 원한도 있는 만큼, 그걸 이용해 이쪽에서 자중지란(自中之亂)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꾸며 적들을 속이자는 것이지요.”

“…….”

자세히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량진인은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관지 장로가 입을 열었다.

“대의를 위해 잠시 오욕을 감수하자는 말씀이외다. 만약 그 마저도 부담이 되신다면 우리의 요청에 곤륜파는 어쩔 수 없이 협조를 했다는 문서라도 작성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귀 문파에 절대로 누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제야 무량진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지필묵을 달라고 해서 문서를 작성해 건네준 뒤 관지 장로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그전에 일어났던 대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소규모로 뒷골목에서 투닥거리는 것 정도로 말이지요. 중상자가 나오지만 않도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대답을 하는 무량진인의 머릿속에는 좀 전에 관지 장로가 말한 대의(大義)라는 단어가 커다랗게 맴돌고 있었다.

“아, 그리고 곤륜무황 님과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무황 님께 직접 전하라는 교주님의 서신을 가지고 왔거든요.”

잠시 후, 무량진인의 안내로 곤륜무황과 독대를 한 관지 장로는 흡족한 표정으로 마교의 장원으로 돌아갔다.

뭔가 수상쩍은 패력검제

화톳불 위에 올려놓은 토끼 두 마리가 기름을 뚝뚝 흘리며 노릇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할 만도 하련만, 그걸 바라보고 있는 패력검제의 안색은 썩 밝지 못했다. 지금까지 중원 곳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그리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더 오랜 시간 중원을 뒤지고 다녀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량이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아무래도 아들놈과 함께라면 조금쯤은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놈은 무공은 뛰어났지만, 우물 안 개구리라서 강호 경험이 떨어졌다. 아들 녀석에게 강호 경험도 시킬 겸, 말벗도 삼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패력검제였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마음 놓고 중원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다 아들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만약 녀석마저 없다면 양양성의 문도들을 이끌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잠깐 양양성에 들러 진팔이라도 데려올 걸, 너무 서둘렀어.”

패력검제는 나뭇가지로 토끼를 쿡쿡 찔러 봤다. 이제 대충 익었다고 판단한 그는 품속에서 소금을 꺼냈다. 그리고 다리 한쪽을 쭉 찢어 소금에 찍으려는 순간, 그는 멈칫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화경에 달한 섬세하기 그지없는 그의 기감(氣感)에 저 먼 곳에서 마교 고수들이나 내뿜을 수 있는 강렬한 마기(魔氣)가 어렴풋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별일이군. 교주의 수하들이 이런 곳까지 나와 있다니…….”

그는 별 관심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리를 소금에 찍어서는 탐욕스럽게 베어 물었다. 평상시 같으면 야외에 나왔을 때 으레 그렇듯 건량(乾糧) 몇 조각 씹어 먹고 끝냈겠지만, 요즘 식욕이 별로 없어 토끼 사냥까지 하는 수고를 한 참이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구수한 냄새에 모처럼 식욕이 동하는 판이니 어지간한 일은 식후로 미루고 싶었다.

더군다나 마기가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라면 그들과의 거리는 예상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마교 고수들이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토끼 고기를 한참 맛나게 씹어 먹고 있던 패력검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자리에 머물고 있었던 마기들이 갑자기 속력을 내어 자신이 있는 쪽으로 접근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그리고 잠시 후, 패력검제의 귀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마교 고수들이 지금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싸우는 상대라면 필히 장인걸 패거리임에 틀림없을 것이라 판단한 패력검제는 먹고 있던 토끼 다리를 내버려 둔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쏜살같이 신법을 전개했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 심사가 꼬여 있던 차라 한바탕 살풀이를 하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본 건 아니었지만 패력검제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한눈에 파악했다. 허름한 복색의 사내들이 도망치는 중이었고, 마교 고수들은 그들을 추격하며 잔인하게 주살(誅殺)하고 있었다. 비록 허름한 복색의 사내들의 수가 훨씬 많았지만, 피투성이에 부상자가 많은 걸 보면 곧이어 마교 고수들에게 일망타진 될 게 확실해 보였다.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걸 역시 마교의 한 갈래다. 그런 만큼 마교 고수들끼리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어야 아귀가 맞다. 그런데 허름한 복색의 사내들에게서는 마기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장인걸의 전투 조직이 아니라, 첩보 조직인가?

갑자기 장내에 엄청난 고수가 출현하자 모두들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경공술 하나만 봐도 그 무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주위로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 내는 고수들이 그자를 둘러싸고 있었음에도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무자비한 살육전을 전개하고 있던 마교 고수들은 모두들 전투를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쩌면 새로 출현한 고수와 싸워야 될지도 몰랐으니까.

이때, 그들 중 가장 강한 마기를 내뿜던 사내가 앞으로 쓱 나섰다. 그의 등에는 길이가 무려 4척이나 되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존성대명을 알려 주실 수는 없는지…….”

그의 말투는 아주 정중한 것이었다. 자신이 뿜어 내는 강렬한 마기 앞에서 단 한 점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고 있는 정체불명의 고수를 상대로 가급적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내가 그걸 알려 줄 이유라도 있나?”

퉁명스런 패력검제의 대꾸에 잠시 갈등하던 4척 장검의 사내는 주저주저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갈고닦아온 그의 본능은 상대가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었기에 성질대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시다시피 이쪽은 천마신교에서 나왔소이다. 본교와 은원에 얽매여 계신 분이 아니시라면 못 본 척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소이까?”

예전이었다면 마교도가 그의 눈에 띄는 그날이 바로 놈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림맹과 동맹까지 맺은 상태니, 한식구나 다름없는 처지가 아닌가. 더군다나 상대가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는데 그냥 무시하기에는 그랬다. 패력검제는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본좌는 패력검제라 한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 장내를 벗어나려던 패력검제에게로 갑자기 허름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이 죽을 힘을 다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 대협!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를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장인걸의 수하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패력검제는 허름한 사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누비고 기워서 입은 옷들은 모두 때에 절어 지독한 악취를 뿜어 내고 있었다.

“혹…, 개방도들이냐?”

“그, 그렇습니다요, 대협.”

그 말에 토끼 구이가 기다리는 야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려던 패력검제는 우뚝 멈춰 섰다. 마교가 개방도들을 쫓으며 주살하는 이유는 몰랐지만,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개방도들의 죽음을 그냥 외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패력검제는 천천히 검을 뽑아 검강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고풍스런 패왕검의 검신에 푸른빛의 검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맹 관계인 마교의 무사에게 손을 쓰기도 그렇고, 개방도들의 일방적인 학살을 보기도 싫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무공을 보여 마교의 고수들이 조용히 물러가기를 원한 것이다.

패력검제가 일으킨 검강을 본 4척 장검 사내의 눈매가 놀라움에 살짝 일그러졌다. 위험한 인물 같다는 육감에 긴장을 하긴 했지만, 설마 상대가 화경급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상황 판단을 한 4척 장검의 사내는 주위로 전음을 날렸고, 그에 맞춰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살을 찌푸린 패력검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순간, 4척 장검 사내의 지시에 일제히 움직인 마교의 고수들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던 부상자들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만약 손을 쓴다면 싸그리 죽여 버리겠다는 시위인 것이다.

수하들이 인질을 확보하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4척 장검의 사내는 고개를 살짝 조아리며 패력검제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공손하기는 했지만, 패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런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쪽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 이해하시길…….”

4척 장검의 사내는 패력검제의 눈치를 슬쩍 살핀 후 말을 이었다.

“손을 쓰지 않겠다는 약조만 해 주신다면 조용히 물러나겠소이다.”

원래의 목적이 그것이었는지라 패력검제는 흔쾌히 검을 거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4척 장검의 사내는 패력검제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그런 다음 주위에 흩어져 있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던 수하들까지 또렷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모두들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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