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6화 (612/930)

마교 고수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패력검제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문파 간의 다툼은 이해 관계가 얽혀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전처럼 마교가 적이었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개방도들이 뭔가 잘못을 저질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패력검제의 입장만 난처해지는 것이다.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자 골치가 아픈지 고개를 흔들던 패력검제는 곧 난감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개방도들을 둘러봤다. 이들이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보살펴 주어야 할 의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두고 가기에는 협의를 숭상하는 그의 마음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가 망설이고 있을 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개방도들 중 한 명이 힘겹게 일어나 패력검제를 향해 다가왔다.

“패력검제 대협, 생명을 구해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개방도를 바라보던 패력검제는 곧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자네는 누군가?”

“진곡추입니다요, 비을걸개 진곡추.”

패력검제는 상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몰골이 워낙 엉망진창이라 본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자를 언젠가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진 타주였군.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혈겁의 흔적을 추적해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혈겁의 흔적?”

진곡추는 최근 무림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소문파의 의문의 혈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허어, 무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네. 그렇다면 그 음모를 획책한 자들이 혹시 마교인가?”

개방도들을 쫓아 주살하던 마교의 무사가 떠올랐기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마교이긴 한데, 장인걸 쪽입니다.”

“그렇다면 좀 전의 마교 고수들이 장인걸 쪽이었단 말인가?”

진곡추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패력검제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자신의 착각으로 인해 살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런 그의 귓가로 여기저기서 신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주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중상자들이 터트린 신음성이었다.

패력검제는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본 다음 진곡추에게 말했다.

“중상자들이 많으니, 일단 어디 가서 치료를 하는 게 좋겠구먼.”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우이(牛耳)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리 가도록 하시죠.”

패력검제의 도움 덕분에 진곡추 일행은 무사히 우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곡추는 일단 부상자들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원에 옮겨 놓은 후,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객점으로 패력검제를 안내했다.

잠시 후, 객점에서 나와 의원으로 돌아가는 진곡추의 양손에는 독한 죽엽청과 오리 구이가 하나 가득 들려 있었다. 수하들의 상태를 확인한 진곡추는 그래도 상태가 양호한 거지들에게 오리 구이를 던져 줬다. 그런 다음 자신 또한 이진걸과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진걸 역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라,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면서도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이 쑤셨던 것이다.

“형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술을 그렇게 드셔도 되겠습니까?”

“크크, 그렇게 몸이 걱정되거든 자네나 마시지 말게.”

부상당하기는 이진덕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제 끝장이라 생각하고 완전히 생을 포기했다가 운 좋게 살아났더니, 이상하게도 술맛이 더욱 기가 막히다. 마치 기갈이라도 들린 듯 허겁지겁 술잔을 들이키던 이진덕은 술이 올라오자 붉게 물든 얼굴로 연신 히죽히죽 웃었다. 죽음의 끝자락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뻤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하더니 진곡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거~ 참, 이상하네요, 형님.”

“뭐가 이상해?”

이진덕은 주위를 슬쩍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 사람 진짜 패력검제 대협이 맞습니까? 뭐, 초상화에서 본 대로의 생김새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좀 수상쩍어서…….”

진곡추는 이진덕의 말을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록 잠깐이지만 예전에 그와 만난 적이 있었던 진곡추는 그와의 만남을 두고두고 수하들에게 우려먹었던 것이다. 천하의 영웅과 자신이 친교를 맺고 있다는 식의 허풍을 떨며 말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분이 패력검제 대협이 아니라면 누구라는 말이지? 내 일찍이 그분과 친교를 맺고 있었기에, 그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 그런 헛소리는 그만하게.”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이진덕은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는 진곡추의 말에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봤다. 못 믿겠다는 뜻이다.

“허어, 이 사람 보게. 아까 대협께서 날 한눈에 알아보고 ‘오, 진 타주 아닌가?’ 하는 걸 못 들었어?”

물론 들었다. 하지만 한눈에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을 쳐다본 후에 말이다.

이진덕이 알고 있는 패력검제는 마교를 끔찍이도 증오하여, 보이기만 하면 마교도의 시체로 산을 쌓는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기에 마교도들이 가장 대면하기 싫어하는 인물 1순위에 꼽혀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마교도를 대함에 있어서 부드러운 미소까지 짓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간에 오고 간 대화를 옆에서 들어 보니, 패력검제가 그들을 현재 동맹을 맺은 마교의 고수들이라고 착각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가 들어 왔던 패력검제의 모습과 오늘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패력검제와 같은 거물이 왜 이런 외진 곳에 와 있었을까? 그것도 자신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그 순간에 딱 맞춰서 나타나다니, 뭔가 협잡(挾雜)이 있지 않고서야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이진덕을 향해 진곡추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이놈의 자식이! 대협께서 애써 생명까지 구해 주셨거늘,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고 개지랄이야!”

그 말에 이진덕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얼마 전에 섬전수(閃電手)라는 놈한테 속아서 죽을 고생을 했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닙니까!”

이진덕이 입에 거품을 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의문의 혈겁에 대해 조사해 들어가던 도중 섬전수 이창(李彰)이라는 협객을 우연히 만나게 됐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창이 그들의 조사에 많은 도움을 줬기에, 당연히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놈이 바로 자신들의 뒤를 캐고 있던 진곡추 일행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적들이 파견한 첩자였을 줄이야.

이창의 말에 속아 이런 외진 곳에까지 오게 된 진곡추 일행은 적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되었고, 만약 패력검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씨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패력검제 대협 같은 분을 의심하는 건 좀…….”

“일문을 대표하시는 분께서, 아무리 일이 있다고 해도 시중들 사람 하나 없이 이런 외진 곳에 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언제 금나라 놈들과 전쟁이 재개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인데, 이렇게 오랫동안 양양성을 비우고 돌아다닐 수 있을까요?”

우이 마을로 올 때 본 패력검제의 모습은 오랜 야영 생활을 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 우이 마을은 양양성과는 하루 이틀 거리가 아닌 것이다. 며칠 동안 말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말을 듣던 진곡추는 기억을 더듬어 본 뒤,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며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이진덕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생각해 보십쇼. 너무나도 공교롭지 않습니까? 제가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시의적절할 때 나타났다는 점과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의 행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진짜 패력검제였다면 우리를 쫓아왔던 그놈들은 지금쯤 모두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어야 옳았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정말……. 대협께서 뭔가 이곳에 일이 있으셨던 거겠지. 그분 덕분에 목숨을 구원받은 주제에 술맛 떨어지게 별 쓸데없는 소리를…….”

“저는 무영문에 입문한 뒤, 우연이라는 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웠습니다. 형님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계통의 사람들이 제일 처음에 배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뭐든지 한 번 의심해 봄으로써 그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내는 것. 그렇게 잘 훈련된 정보원들이 있었기에 무영문과 개방이 무림의 정보를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패력검제 대협을 의심하는 건 좀…….”

“섬전수 그놈도 그랬지 않습니까?”

“…….”

마치 조개라도 된 듯 진곡추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가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자 이진덕은 더욱 신이 나서 입을 놀렸다.

“패력검제 대협이 맞다면 별 상관이 없지만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나 역용술을 썼다면 얼굴쯤 바꾸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곡추는 과거 패력검제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워낙 오래 전에 만났던 터라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진덕의 말을 듣다 보니 지금 만난 패력검제가 예전의 그 패력검제의 모습인지 조차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분이 들고 계셨던 검은 패왕검처럼 보이던데…….”

“역용을 했다면 당연히 패왕검도 가짜를 만들었겠죠. 그게 그분의 신물인 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하지만 검강까지 뿜어 내시지 않으셨나?”

“화경급 고수는 검술에 의존하지 않고 강기를 뿜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화경급이 아니라도 검술에 의존해 강기를 뿜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뭔가 저희들이 모르는 사기적인 수법을 동원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말에는 진곡추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자네 말은 패력검제 대협이 가짜라는 말인가?”

“제 예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놈은 섬전수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놈들의 첩자일 겁니다. 아니, 그게 분명합니다. 아니라면 제 모가지를 걸어도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말을 하는 데야 진곡추로서는 대수롭게 받아 넘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로서도 패력검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도 패력검제가 가짜일 가능성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긴 채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진곡추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만약 그가 가짜라고 가정한다면, 저쪽에서 원하는 게 대체 뭘까?”

“사실 저도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들을 몽땅 다 죽여 버리는 것보다 살려서 어딘가에 써먹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음모를 꾸미려는 것인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쉿!”

갑작스러운 진곡추의 행동에 이진덕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패력검제의 모습이 보였다. 이진덕과 진곡추는 벌떡 일어서며 정중히 포권했다.

“대협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대협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자네는 누군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곡추가 대신했다.

“부분타주입니다요.”

부분타주는 분타에 남아 진곡추를 대신해 분타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여기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진덕을 부분타주라고 둘러댄 것이다.

패력검제는 별 의심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부상자들의 상태는 어떤가?”

“반수 이상이 중상을 입어 운신하기 조차 힘든 상황입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진곡추가 대답하자,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자네가 뭘 알아냈기에 그들에게 그렇게 쫓겨다닌 겐가?”

진곡추는 슬쩍 이진덕을 바라봤다. 이진덕은 패력검제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뻔히 알고 있는 걸 구태여 감출 이유는 없었으니까. 괜히 감춰 봐야 놈의 의심만 살 뿐이다.

“놈들이 무림에 일으켜 놓은 흙탕물의 정체입니다요.”

“호오, 흙탕물의 정체라……. 뜸을 들이는 걸 보니, 꽤나 대단한 정보를 얻은 모양이군.”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감탄사까지 터트리는 패력검제의 모습에 진곡추는 어쩌면 그가 가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모습은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애써 내심을 감추며 진곡추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바로 그것. 즉, 기연이라는 거죠.”

“기연?”

“보물지도 말입니다.”

패력검제는 어이없는 듯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보물지도라고?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그런 허황된 소리를 믿겠나?”

진곡추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전혀 허황된 얘기가 아니니 문제지요. 요나라가 개봉을 휩쓸기 직전, 오랑캐의 대군이 황성인 개봉의 코앞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황제는 비고(秘庫)에 쌓여 있던 보물과 무공비급 등을 각지에 분산하여 숨겨 놨다고 합니다.”

요나라의 대군이 황도 개봉의 코앞에 주둔한 기간이 몇 달은 족히 된다. 불안감을 느낀 황실에서 비고의 귀중품들을 어딘가로 수송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방금 전까지 엉터리 소리로 치부하던 패력검제였지만 흥미가 동한다는 듯 되물었다. 무인인 그에게 있어 보물 따위야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새로운 무공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인가?”

진곡추는 빙긋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입죠.”

순간, 뭔가 농락당한 듯한 느낌에 패력검제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하지만 진곡추는 패력검제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귀중품을 어딘가로 수송하는 게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황실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죠. 그리고 본방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따로 수송해서 숨겨 놓을 만큼 많은 보물은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답니다. 전란이 오랫동안 계속된데다가, 해마다 요나라에 갖다 바쳐야만 했던 막대한 액수의 세폐. 더군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못 차리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파묻혀 흥청망청 써 댄 멍청한 황제. 황실에 돈이 남아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뻔한 거짓말에 무림이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겐가?”

하지만 진곡추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뭣한 게, 좀 전에 대협께서 욕심을 내셨던 무공비급들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진곡추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빤히 쳐다보며 말했기에, 패력검제는 무안한 마음에 짐짓 헛기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험험…, 노부가 언제 욕심을 냈다고 그러는가?”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대협께서는 이미 지고하신 경지에 오르셨는데, 왜 다른 무공에 욕심을 내시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예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일 겁니다. 새로운 무공에 대한 관심은 어느 무인이든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 말은 맞았기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 정도의 고수도 그런데, 일반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유혹이었을 겁니다. 특히, 제대로 된 내공심법 하나 갖추지 못해 갖은 설움을 당해야만 했던 군소방파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이라도 걸 수 있는 일이었습죠.”

“허허, 그렇군.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런데 그런 비급을 왜 황실에서는 딴 곳에 몰래 숨겨 두지 않았던 것이지?”

“그런데 웃기는 일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황궁 쪽 등신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죠.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들이 무공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그러니까 오랑캐 따위에게 황도가 짓밟히는 치욕을 당한 거겠지만 말입니다.”

“정말이지 황당한 얘기로구먼.”

진곡추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비급을 확보한 오랑캐 놈들은 무림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보물지도를 만들어 뿌렸고, 그 농간에 걸려든 수많은 군소 방파들이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여 댔습죠. 그것도 쥐도 새도 모를 정도로 비밀스럽게 말입니다. 사실, 지도가 가르키는 곳에 비급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그런 지도가 경쟁 관계에 있는 문파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혈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흑살마왕의 수하들까지 끼어들어 분탕질을 일으키다 보니, 그 전개가 더욱 음험해진 것이구요.”

장인걸의 공작 덕분에 지금 무림맹은 세력 결집에 막대한 장애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중원 여기저기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혈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보니, 규모가 작은 방파들의 경우 자파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림맹에 무사의 파견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방과 무영문이 장인걸이 획책해 놓은 치졸한 속임수를 파악해 내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맹에서 보물지도라고 떠돌아다니고 있는 게 장인걸이 만들어 놓은 속임수라는 걸 만천하에 공포한다면, 이제 더 이상 이런 함정에 걸려들 문파는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중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도 급속도로 수습될 것이 분명했다.

순간, 패력검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음모가 세상에 밝혀진다면 장인걸 쪽에서 받을 타격은 상상 이상으로 클 게 분명했다. 당연히 무림이 혼란에 휩싸여 있는 게 그들로서는 훨씬 유리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저쪽에서 정보의 누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순순히 물러날 리가 절대로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화경급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맹에는 알렸나?”

갑작스런 패력검제의 질문에 일순 이진덕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설마…, 이쪽이 맹에 연락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 접근한 거였나?’

진곡추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이진덕이 그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마을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전령을 보냈습니다, 대협.”

“흠, 사고 없이 잘 도착해야 할 텐데…….”

패력검제는 그냥 노파심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를 의심하고 있던 이진덕의 귀에는 그들이 절대 임무를 완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투로 들렸다. 사실 부상자들을 수습하느라 아직 전령을 보내지 못한 진곡추와 이진덕이었다. 만약 보냈다면 보내는 족족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생각에 이진덕은 온 몸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게 느껴졌다.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진곡추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이진덕이 한 말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잠시 망설이던 진곡추는 패력검제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협께서는 양양성에 계시다고 들었었는데…, 어쩐 일로 이곳으로 오신 겁니까?”

“그, 그게 말이지……. 뭔가를 찾기 위해 중원을 돌아다니고 있다네.”

“대체 어떤 것을 찾으시길래 이런 오지에까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던 패력검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진곡추를 보자 뭘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 혹시 용(龍)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좀 있나? 사는 곳이라든지, 아니면 누가 어디서 용을 봤다고 하는 소문이라도 좋으니 말일세.”

뜬금없는 패력검제의 말에 진곡추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려야 했다.

“요, 용이라니요……? 설마 그 신화 속의 동물을 말씀하시는 건?”

“맞네, 천하에서 가장 많은 정보가 취합되는 곳이 바로 개방 아닌가? 그런 개방의 분타주니까 혹시 용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일세.”

“그, 글쎄요……. 제 기억으로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총타로 가시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패력검제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집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이진덕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보검이 혹시 패왕검입니까?”

기대와는 달리 용에 대한 소재를 모르겠다고 하자 낙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패력검제는 이진덕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구경할 수 없을까요?”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낸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진곡추가 당황해서 외쳤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겐가? 제령문의 신물을…….”

하지만 패력검제는 모든 걸 좋게 생각했다. 사실 이 정도 보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무인이 보검에 환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력검제는 무인들의 그런 집착을 잘 알고 있기에, 이진덕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그는 허리에 매여 있던 패왕검을 검집째 풀어 건네주며 털털하게 말했다.

“신물은 무슨. 여기 있네.”

은은하고 고풍스런 문양의 패왕검은 화려하거나 현란스러운 장식이 붙어 있지 않았다. 금이나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보석이 박혀 있는 것도 아니다. 검에 대해 뛰어난 안목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명성과는 달리 너무 수수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검들이 이렇게 겉보기에는 수수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진덕은 검집을 자세히 살펴본 뒤 검을 천천히 뽑아 보았다. 사실 아무리 해도 모방할 수 없는 게 바로 보검의 본체인 서릿발 같은 검신(劍身)이었으니까.

하지만 검신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겉보기에는 서릿발처럼 시퍼런 광채를 내뿜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이빨이 상해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이런 보검이, 그것도 화경급 고수가 사용하는데 검날이 상할 리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검신의 끝부분에는 얇은 금까지 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자 검의 부러진 부분을 실력도 없는 장인이 대충 때운 흔적임이 분명했다.

그걸 본 이진덕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패왕검이 아니라,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임에 틀림없으니까 말이다.

사실 패왕검에 나 있는 상처들은 과거 묵향과의 충돌에서 생긴 흔적들이었다. 그 후에 보검을 수리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장인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냥 놔뒀다가, 양양성 전투에 참전한 이후에 검이 파손당한 게 떠올라 그곳의 대장간에서 급히 수리를 받은 것이었다. 부러진 검을 들고 전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용하던 게 지금에 이른 것이었는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던 이진덕은 이게 가짜가 틀림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잠시 후, 패력검제가 객잔으로 돌아간 후 이진덕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우연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군요.”

지금까지 태연을 가장하고 있던 진곡추의 표정도 역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 당장 놈을 없애…….”

“괜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필요는 없죠.”

“그건 그렇군. 놈에게서 연락이 끊기면 저쪽에서도 계획이 탄로 났다는 걸 눈치 챌 테니까.”

“어쩌면 가짜를 잘만 이용한다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진덕의 말에 진곡추의 눈빛에는 희망이 물씬 솟아올랐다. 그는 재빨리 물었다.

“그, 그것이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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