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7화 (613/930)

죽음을 각오한 탈출 작전

며칠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 정도 부상을 치료한 진곡추와 이진덕은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탈출 계획을 짰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탈출 계획이었지, 그들은 모두가 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은 살아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가 상부에 전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놈들의 속셈을 알 수가 없군. 왜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걸까? 동생은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나?”

발 빠른 제자를 시켜 밤에 슬쩍 주위를 둘러보게 하자, 우이 마을을 중심으로 촘촘히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적들이 포위망을 구축만 하고 있을 뿐, 그 어떤 도발도 해 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진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놈들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들을 단숨에 해치우지 않고 가짜 패력검제까지 접근시킨 걸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그놈이 우리에게 물은 것이라고는 용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있냐는 정도였으니, 거참…….”

“크크, 그거야 형님이 갑자기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까 당황해서 떠벌인 소리겠죠. 이쪽에 잠입을 시키려면 좀 똘똘한 놈으로 보낼 것이지, 그런 어설픈 놈을 보내다니.”

“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그가 가짜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어설픈 가짜 패력검제를 떠올리며 연신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진덕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으득, 쫓길 때 전서구들만 죽지 않았다면 벌써 본부에 연락해 지원군을 요청했을 텐데…….”

그 말에 진곡추 역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짜 섬전수가 공격이 개시되기 전에 이미 비둘기 우리에 손을 썼던 것이다. 놈이 무슨 독약을 먹여 놨는지 모르겠지만, 멀쩡하게 보였던 비둘기들이 우리에서 꺼내자 전혀 날지를 못했다. 그리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전서구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가장 먼저 공격 목표가 되었다.

이진덕이 가짜 섬전수를 죽이기는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봐야 뭣 하겠나?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놈들이 선수를 치기 전에 탈출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짠 계획대로 탈출을 시도하세. 동생만 믿겠네.”

이진덕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진곡추의 두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형님, 소제에게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훌륭한 형님을 만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하늘이 도와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제 평생을 형님만을 위해 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나야 천하에 피붙이 하나 없는 홀몸이지만, 동생은 부모님과 마누라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미끼가 되어 자네라도 살리는 게 훨씬 이익인 셈이지.”

두 사람이 며칠 동안 짠 계획은 이랬다. 먼저 진곡추가 가짜 패력검제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며 적들의 이목을 모으면, 이진덕은 그나마 부상이 적은 개방도들과 적의 포위망이 헐거워지는 틈을 타 발 빠르게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세부적인 계획을 점검한 후, 진곡추는 패력검제가 묵고 있는 객잔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동안 푹 쉬셨는지요, 대협.”

본의 아니게 발목이 묶인 패력검제의 마음이 결코 편할 리가 없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이들을 외면하고 그냥 떠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없으면 죽을 게 뻔했으니까.

“도대체 구원 부대는 언제 오는 건가?”

“아마 틀린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갔다 오겠네. 그게 최선일 것 같으니 말일세.”

물론 화경급 고수가 한밤중에 몰래 지원군을 요청하러 간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자가 적이 보낸 첩자라는 데 있었다.

“하, 하지만 대협께서 안 계신 동안에 적들이 공격해 들어온다면…….”

진곡추가 이렇게 말한 건, 가짜를 이용해 탈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없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러자 패력검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여야겠어. 여기에 계속 죽치고 있어 봐야 상황만 더욱 악화될 뿐이야.”

“안 그래도 부분타주와 제가 짜 놓은 탈출 계획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곡추는 손가락으로 물 잔에서 물을 찍어 탁자 위에 우이 마을과 그 주위를 그려 놓고, 자신들이 짠 탈출 계획을 설명했다.

“오늘 밤, 묘시 초쯤에 이쪽을 돌파하는 겁니다.”

묘시 초라면 새벽 5시 무렵으로 하루 중 가장 많은 피로가 몰려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포위망을 구축하는 적들의 신경 또한 느슨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중상자들은 어떻게 할 건가?”

진곡추는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을에 놔두고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요. 괜히 데리고 가 봐야 짐만 될 뿐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출발할 때 각자 다른 방향으로 탈출하는 척하면서 적들의 혼란을 야기시킬 생각입니다.”

“알겠네. 그럼, 이따 보기로 하세.”

“예, 대협.”

가짜에게는 북쪽으로 난 산길을 통해 모두 다 도망갈 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진곡추는 몸 상태와 무공을 중심으로 4개의 조로 나눴다. 1조에 속한 운신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은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우이 마을 곳곳에 숨겼다. 운이 좋다면 한두 명쯤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게 그들의 바램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모아 3개의 조를 만들었다. 이진덕과 진곡추가 계획한 탈출 작전의 핵심은 가짜와 함께 움직일 2조의 희생을 통한 3, 4조의 탈출이었다. 물론 탈출 작전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마을 곳곳에 상부에 전달할 정보를 숨겨 놓았다. 설혹, 놈들이 마을을 통째로 불사른다고 해도 그걸 다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탈출 작전의 개요는 이랬다. 가짜에게 북쪽으로 도망칠 거라고 말해 놓으면, 당연히 그 정보가 새서 외곽에 포위하고 있는 적들에게로 전해질 것이다. 적들이 북쪽을 중심으로 두텁게 포위망을 치고 있을 때, 가장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로 구성된 3, 4조가 포위망이 헐거워진 남쪽으로 탈출을 하는 것이다.

만약 적들이 많아 도저히 탈출이 힘들 것 같으면, 3조가 적들의 이목을 끄는 동안 4조는 우회하여 탈출한다. 은신술이 뛰어난 무영문도들인 만큼, 3조가 놈들의 이목을 끌어 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이진덕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가짜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에 대한 감시를 풀었다. 적들이 마을 주변에 구축하고 있는 강력한 포위망을 흔들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건넨 정보가 그쪽에 전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을을 탈출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진곡추는 이진덕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부디 살아서 정보를 상부에 전달하기 바라네.”

진곡추는 이진덕에게 어떤 방식으로 탈출할 것인지 아예 묻지 않았다. 자신은 미끼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만큼, 죽거나 놈들의 포로로 사로잡힐 확률이 높았다. 죽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다 보면 3, 4조의 탈출로를 놈들에게 말하게 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진곡추의 마음을 익히 아는 이진덕의 심정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처음에 진곡추에게 뭔가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자신이 일부러 접근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곡추는 진짜 형제와도 같은 정을 자신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목숨을 버려 가며 자신의 탈출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진덕은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마음 놓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맹에 정보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군. 가능하면 모두들 다시 살아서 만나세.”

개방도들은 한곳에 모여 서로 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거지들의 단체인 개방인 만큼, 방도들 간에는 다른 문파에서는 볼 수 없는 끈끈한 정이 흘렀다. 창고나 다름없는 허름한 거처에서 함께 뒹굴다 보니 없던 정도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서로 굳게 잡은 그들의 손은 쉽사리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진곡추는 객실의 문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대협, 진곡추입니다.”

곧바로 안에서 가짜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정말 목소리 하나만큼은 진짜 뺨칠 정도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진곡추는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따뜻한 차가 반쯤 들어 있는 찻잔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가짜는 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가? 출발을 하겠다고 한 시간은 아직 먼 것 같은데 말일세.”

“조금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짜에게 정보를 받아 묘시에 자신들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적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 진곡추는 탈출 시간을 앞당긴 것이다. 설마 진곡추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패력검제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검을 집어 들며 밖으로 나갔다.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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