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곡추는 가짜 패력검제를 데리고 객잔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세 명의 방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다.
“출발하자.”
진곡추는 일행을 데리고 마을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행여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발각이라도 될새라, 그들의 움직임은 아주 은밀했다. 적들은 마을 외곽을 포위하고 있을 뿐,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살금살금 전진하던 진곡추가 살짝 손을 들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적이 있다는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그를 따르던 거지들의 걸음이 딱 멈췄다.
뒤를 돌아보며 진곡추는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각 조가 돌격선상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여기서 대기.”
그 말에 패력검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진곡추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리 탈출을 하기 위해 서너 명만 모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소수정예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겠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며칠 전에 보냈다던 전령이 벌써 구원 부대를 이끌고 근처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무공을 고도로 익히면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도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몸속을 따라 흘러가는 생체의 리듬을 통해 시간을 읽어 내는 요령이 생기기 때문이다. 굳이 별을 보고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약속된 묘시 초가 되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런데 휴식을 취하면서 잠시 시간을 가늠하는 것 같았던 진곡추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준비!”
묘시 초가 되려면 아직 1각(15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개방도들은 각자 무기를 쥔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진곡추가 손을 앞으로 쭉 내뻗자, 그 신호에 맞춰 개방도 세 명이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 순간 가짜 패력검제 역시 앞으로 내달렸다. 개방도들이 언제 달려 나갈지 알 수 없었기에 한 박자 늦게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진곡추도 달려갔다. 지금쯤 가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을 게 분명했다. 이쪽 방향으로 모두 다 탈출할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실상 여기 모인 것은 자신을 포함해도 다섯 명밖에 안 되니 말이다.
놈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걸 적에게 알리려고 할 게 분명했다. 진곡추가 한사코 이 죽음의 조에 남은 이유는 바로 그것을 저지하고자 해서였다. 정보가 적들에게 넘어가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지니까. 비록 가짜라고는 하지만 화경급 고수의 행세를 하는 걸 보면 놈은 꽤 무공이 높을 게 뻔했다. 그런 자를 없애는 걸 수하들에게 맡겨서는 도저히 안심이 안 됐던 것이다.
이때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을 뚫고 울려 퍼졌다. 매복하고 있던 적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휘파람 소리는 그들의 앞에서도 울려 퍼졌고, 그들의 등 뒤쪽에서도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마 3조가 돌진해 들어가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이리라.
진곡추는 젖 먹던 힘까지 몽땅 다 끌어 올려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가짜의 뒤를 잡아야 놈을 해치우기가 용이하니까.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가짜와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앞서 달려갔던 개방도 세 명과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제는 그들이 진곡추의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가짜의 경공 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진곡추는 품속에서 수리검을 끄집어냈다. 도저히 가짜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만큼, 암기를 날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씨발! 예상보다 훨씬 더 무공이 고강한…….’
하지만 진곡추는 가짜를 향해 수리검을 던지지 못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수많은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화살을 피하거나 쳐 내야만 했다. 한순간이라도 다른 데 정신을 팔았다가는 목숨을 내놔야 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옆에서 둔중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고개를 숙인 방도의 등 뒤로 화살이 삐죽 솟아 나왔다. 화살이 폐를 꿰뚫은 것이다. 그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진곡추는 다른 수하들을 향해 달려갔다. 가짜를 없애는 건 이미 포기했다. 놈을 따라잡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남은 부하들도 화살의 밥이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사방에서 쏟아져 오는 화살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진곡추는 상황이 조금 안정되자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서야 그는 적이 날리는 화살의 대부분이 가짜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들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마……?”
그때쯤 패력검제는 매복하고 있는 적들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 쌓인 짜증스런 감정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듯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콰콰쾅!
패력검제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빛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기에 강기의 파편들이 뿜어내는 푸르스름한 빛은 너무나도 밝고 영롱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생명이 한순간에 소멸되는 것이기도 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의 주위로는 피의 비(血雨)가 내리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진덕과 자신이 패력검제에 대해 엄청난 오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패력검제는 가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진곡추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자신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한 3, 4조원들이 그의 시야에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처절한 비명성을 터트리며 죽어 가는 수하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3, 4조가 위험해!”
뒤돌아선 진곡추가 채 몇 발자국도 내딛기 전에 수하들 중 한 명이 비명성을 터트렸다.
“크윽!”
천천히 앞으로 쓰러지는 그의 이마에는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어디선가 화살이 또 하나 날아와 그의 배에 박혔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신음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진곡추는 이제 하나 남은 수하에게로 달려갔다. 방금 수하 한 명이 쓰러지며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줬던 것이다. 그 혼자 3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봐야 시체 한구를 더 늘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만큼 적들의 무공은 뛰어났다.
“이, 이럴 수가!”
이제 그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패력검제였다. 하지만 패력검제도 지금 그리 한가한 상태가 아니었다. 적은 처음부터 패력검제와 정면 대결을 펼칠 생각이 없었던 듯,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다 그와 거리를 벌린 다음 사방에서 화살만을 날리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엄청난 경공술을 발휘하며 적들을 주살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곡추가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수많은 수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자책감에 젖어 있을 때, 패력검제는 앞쪽에 있는 적들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천천히 검집에 패왕검을 집어넣고 있는 패력검제를 향해 진곡추는 허겁지겁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자책감과 비통함이 깔려 마치 흐느끼는 듯 들렸다.
“대, 대협!”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군. 자, 가세.”
“그, 그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과연 마을 남쪽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성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세.”
만약 패력검제가 의문을 표시했다면 진곡추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해야 좋을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패력검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곡추는 이렇듯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패력검제를 지금까지 의심했고, 또 그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꼬인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때, 진곡추의 뒤쪽에서 화살 몇 대가 날아왔다. 패력검제를 피해 도망쳤던 적들이 멀리서 화살을 날린 모양이었다. 놈들과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기에 화살에는 그리 많은 힘이 실려 있지 않아 진곡추는 별 어려움 없이 화살을 막아 냈다. 하지만 무공이 낮아 제일 뒤쪽에 쳐져서 달려오고 있던 거지는 그렇지 못했다.
“크윽! 타주님…….”
재빨리 뒤로 돌아가 쓰러진 수하를 일으켜 세운 진곡추는 상처가 아주 깊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살은 수하의 등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힘내라. 마을로 돌아가서 치료해 줄 테니 말이야.”
“저, 저는 괜찮습니다. 동료들을…, 동료들을 먼저…….”
진곡추는 수하를 업고 마을 안쪽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이따금씩 적의 화살이 등 뒤로 날아오는 게 느껴질 때마다 돌아서며 쳐 내긴 했지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화살 한 대 맞지 않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자신이 생각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돼!”
화살이 날아오기 힘든 담벼락 뒤쪽에 도착한 진곡추는 재빨리 수하를 내려놨다. 그리고 응급처치를 하려던 그의 몸이 흠칫 굳었다. 수하의 등에는 화살이 몇 대 더 박혀 있었고,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진곡추는 이를 갈며 봉을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적들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았다. 혼자서 달려가 봐야 놈들의 화살에 꼬치가 될 게 뻔했으니까. 지금은 딴 생각 하지 않고 마을을 관통해 남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게 최선책이다. 그쪽에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수하들이 있을 테니까.
진곡추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거지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진곡추는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는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의 오판으로 인해 형제와 자식과도 같았던 동문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때 어디선가 화살 한 대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흘리며 진곡추를 향해 날아왔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진곡추는 화살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순간 패력검제가 손을 뻗어 그 화살을 가볍게 잡아 냈다. 놈들은 영악하게도 패력검제를 향해 화살을 날리지는 않았다. 처음에 갑작스럽게 접전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그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화살을 날려 댔지만, 그들도 이제 아는 것이다. 그때 봤던 화경급 고수가 바로 이 사람임을 말이다.
“자네, 이들의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갑작스런 물음에 진곡추는 멍한 눈으로 패력검제를 바라봤다.
“전체적인 계책을 어떻게 세운 것인지 노부는 잘 모르겠으나, 이렇게 세(勢)를 분산한 건 단 한 명이라도 적의 저지선을 돌파하기를 바랬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자네는 처음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으니 이해하기 힘들구먼.”
이를 갈며 진곡추는 주먹을 꽉 쥔 뒤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적들을 향해 막 달려가려는 순간, 패력검제의 손이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노부가 길을 열 테니, 자네는 뒤를 따르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패력검제의 신형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진곡추에게 있어서 말로만 들어왔던 화경이란 경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몸소 깨닫게 해 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