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1화 (617/930)

약당 당주의 집무실을 나선 총관은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한동안 홀로 고민하던 총관은 이 일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혼자만 끙끙 앓고 있어 봐야 해결되는 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잠시 고민하며 서 있던 총관은 부문주에게 이 일을 알리고, 조언을 청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번 일을 지시한 것은 태상문주였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총관은 먼저 태상문주에게 이번 일의 경과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를 전서로 날렸다. 그런 다음 부문주실로 달려갔다.

“기별을 넣어 주게.”

집무실 앞에 서 있던 경비무사는 총관의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안에 상관운 장로께서 와 계십니다.”

상관운 장로는 태상문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실세 중의 한 명이다. 독대를 청한다며 그에게 물러가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총관으로서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고를 올리는 게 좋을까?

잠시 망설이던 총관은 다시금 마음을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부문주에게 보고를 해 두는 것이 좋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보고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혼자 그 책임을 다 덮어쓸 것이 뻔할 테니까.

“기별을 넣어 주도록 하게.”

경비무사는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부문주님, 총관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매영인과 상관운 장로는 다과를 함께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몰래 엿들은 건 아니지만, 이 둘이 지금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지는 총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정식 직책은 ‘무영문 총단 총관’으로, 총단의 각 부서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각 부서간의 업무를 조정하려면, 그쪽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각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당주나 장로급에 비해 시각의 폭은 더욱 넓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문주님.”

“급한 일인가요?”

“예, 부문주님. 태상문주님께서 지금 무림맹에 가 계신지라…….”

총관은 뒷말을 일부러 어물어물 흐리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매영인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태상문주가 직접 관장하던 일인 만큼 특급 정보라는 말이다. 상관운 장로라 하더라도 접근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매영인은 상관운 장로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공손하게 양해를 구했다. 상관운 장로 역시 자신이 들어서는 곤란한 정보라는 걸 눈치 챘는지 별 말 없이 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관운 장로가 문 밖으로 완전하게 나간 후에야, 총관은 입을 열었다. 독두개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걸 말이다.

“독두개라고요? 어디서 들었던 이름 같은데……?”

총관은 매영인의 기억을 돕기 위해 재빨리 설명했다.

“독두개는 이번에 교주에 의해 벌어진 남경 참사에 연루된 개방의 남경분타주 이름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군요. 형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들었었는데…….”

총관은 품에서 문서 몇 장을 내밀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황성사에서 파견나온 고문 기술자들에 의해 지독한 고문을 받던 도중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황성사 측에서도 소중한 포로였던 만큼, 그가 죽을 정도로 무작스럽게 고문했을 리 없지요. 실제로는 그쪽에 잠입하고 있던 우리쪽 요원이 틈을 노리고 있다가 아주 강력한 마취약을 사용하여 그가 죽은 것처럼 꾸민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누구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를 구출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매영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독두개를 빼내 온 거죠? 그가 그렇게 이용 가치가 큰 인물이었나요?”

매영인의 의문은 당연했다. 개방에도 무영문의 첩자들이 상당수 활동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서 웬만한 정보는 다 빼낼 수 있는데, 구태여 남경분타주를 포섭한답시고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황성사를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까지 있는데 말이다.

“태상문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매영인은 의외인 듯 눈썹을 찡그렸다.

“할머니께서?”

“예. 지금 태상문주님께서 출타 중이시기에,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것이 좋을지 달려온 겁니다.”

매영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옥화무제의 지시를 통해 구출해 온 인물이라고 하지만, 겨우 남경분타주 따위가 목을 매달았다고 해서 총관이 저렇게 초조한 안색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아직 자신에게 보고 되지 않은 사항들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걸 알아야만 자신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매영인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조언을 필요로 한다면, 모든 걸 솔직히 말해 주세요. 할머니께서는 그를 어디에다가 쓰려고 데려온 거죠?”

총관은 멈칫했지만, 어쩔 수 없었는지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실토했다. 사실, 이 부분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극비 사항이었다. 심지어는 문주에게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을 정도로.

“교주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형부에서 빼내 오라는…….”

매영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분이 왜 그런 요청을 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독두개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총관은 남경에서 묵향이 독두개를 어떻게 이용해 먹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매영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죄책감…, 때문일까요?”

총관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철혈의 세계에서 성장해 온 교주가 죄책감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 없지요.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그가 교주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를 살려서 교주에게 인계해 줘야 한다는 말이군요.”

“예, 부문주님. 교주에게 그가 필요한 존재인 만큼, 태상문주님께서도 이번 일을 처리해 준 이후에 뭔가 큰 대가를 받아 내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교주는 지금까지 이런 부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할머니께는 연락을 넣었나요?”

“예. 이리 오기 전에 전서를 띄웠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께 연락이 오기를 기다…….”

여기까지 얘기하던 매영인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총관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교주께 공문을 띄우도록 하세요. 독두개를 구출하기는 했는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깊어 그쪽으로 보내 줄 수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시간 여유를 얻으려면, 최대한 빨리 그분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좋겠어요. 며칠 지난 후라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요.”

“오, 정말 좋은 계책이십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나중에 독두개가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변명하기가 훨씬 편하겠군요.”

“그 뒤의 일은 할머니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 즉시 양양성으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이 나가고 난 후, 매영인은 다시 한 번 총관이 건넨 보고서를 읽어 봤다. 아무리 교주의 요청이었다고는 하지만, 황성사에서 사람을 빼내 오다니.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 간다면 황성사의 무시무시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교주야 황실을 두려워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무영문은 달랐다.

갑자기 그녀가 들고 있던 문서들이 확 하고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내공을 끌어올려 태워 버린 것이다.

“죄책감이라…….”

매영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일까? 과거 교주의 밑에서 인질로 잡혀 있기까지 했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교주는 정파무림에서 섬서분타를 쳤을 때, 인질들을 일부러 그곳에 남겨 두려고 했었다. 그쪽에서 죽어 버린다면 오히려 정파 쪽에 올가미를 걸기 딱 좋았으니까.

“그래…, 그분은 인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실리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지.”

당시 그녀는 마화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하지만 나중에 인질에서 풀려난 후, 더욱 기억에 남았던 사람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던 교주였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그때까지 살면서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내를 만난 적이 없었던 탓이 컸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라는 동물을 하찮은 벌레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콧대 높은 아가씨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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