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다, 꼬여
맹주는 뜻밖의 인물이 자신을 찾아왔기에 잠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양성 무림인들의 총 책임자인 곤륜무황이 무림맹까지 홀홀 단신으로 달려왔다니. 웬만한 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맹주였지만, 수하의 보고를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누군가와 의논이라도 해 본 다음에 만났으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옥화무제라면 숙소를 정해 주면서 나중에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도 상관없겠지만, 곤륜무황은 그렇게 취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파 최고의 배분을 지닌 3황 중 한 명이었으니까.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게.”
서로 간에 정중한 인사가 오간 다음, 맹주는 자리를 권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시오이까?”
“맹주께 한 가지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달려왔소이다.”
“허허,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탄없이 말해 주시구려. 노부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혹, 마교에서 제안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설마 곤륜무황의 입에서 교주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맹주였다. 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지만, 곤륜무황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길게 얘기하지는 않겠소이다. 교주가 그토록 숙이고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신 이유가 뭡니까? 그의 청을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는 말에 맹주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분명 옥화무제에게 교주의 청을 허락하겠다고 답을 했는데,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인가. 그렇기에 맹주는 불쾌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허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소이다.”
“모르겠다니요? 교주의 제안을 들어 주는 조건으로 지금껏 마교에서 약탈해 간 모든 무공비급의 원본을 돌려 달라고 하셨지 않소이까? 그것은 빈도가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하지만 곤륜무황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하게 바뀐 맹주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맹주는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허허, 거참. 노부가 약탈해 간 비급을 몽땅 다 돌려 달라고 했다고요?”
“그렇소이다.”
“대체 그런 소문은 누구에게 들었소이까? 혹, 교주가 그딴 소리를 합디까?”
곤륜무황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오이다. 현재 양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관지 장로라는 인물이 교주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와서 빈도에게 하소연하더군요. 맹주의 처사가 너무 심하다고 말이오.”
그렇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로급 되는 인물이 교주를 사칭해 허튼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런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말이다.
맹주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허~, 그것 참…….”
“왜 그러시오?”
어이가 없는지 몇 번 헛웃음을 흘린 맹주는 재촉하듯 대답을 요구하는 곤륜무황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옥화 봉공께서 장난을 좀 치신 모양인데……. 그거 참…,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갑자기 옥화무제가 여기에 거론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외다.”
“교주가 협상을 위해 대리인으로 내세운 사람이 그녀이기에 그렇소. 봉공은 교주가 이번 일을 해 준다면, 지금껏 마교에서 노획해 간 모든 무공비급의 사본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했소이다. 절전된 것도 있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제작된 각 무공의 초기형까지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아니겠소? 이런 제안을 어찌 노부가 마다할 수 있단 말씀이오. 곧바로 장로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소이다.”
자신이 들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맹주의 답변에 곤륜무황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그게 사실이오?”
“지금 밖으로 나가서 아무 장로나 붙잡고 물어보면 금방 들통 날 일인데, 왜 내가 그대에게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외다.”
곤륜무황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옥화무제가 교주에게 그렇게 전한 이유는 뭘까요? 설마…, 그녀가 이번 계책이 성사되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심각한 곤륜무황과 달리 맹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녀와 오랜 세월 상대하다 보니 이 정도쯤이야 애교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이.
“어쩌면 협상의 방편일 수도 있겠지요. 처음부터 교주에게 절전된 무공의 사본을 돌려 달라고 한다면 교주가 바로 응하겠소? 가장 뛰어난 무공들 중 일부는 빼 버리려고 하겠지요. 그런 만큼 처음에 원본을 달라고 했다가 사본 쪽으로 후퇴한다면, 교주에게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림맹에는 엄청난 이익을 안겨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요.”
충분히 말이 되었기에 곤륜무황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그 말만 믿고 양양성에서 여기까지 죽어라 달려오지를 않았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옥화무제의 협상 전략에 교주만이 아닌 자신까지 놀아난 꼴이 된 것이다.
입맛이 썼던 곤륜무황은 연신 헛웃음만을 흘리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그거 참…….”
“혹시 교주를 만나 이 얘기를 해 주실 생각이신 게요?”
맹주의 물음에 곤륜무황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지요.”
그러자 맹주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신다고 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되는구려. 교주와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건 그녀밖에 없지 않소. 만약 교주가 그녀에게 속은 걸 알고, 그녀를 아예 내쳐 버린다면 곤란한 건 이쪽이라는 말이오.”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소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교주에게 생색은 내야 하지 않겠소?”
씨익 미소 짓는 곤륜무황을 보며, 맹주는 변방의 산골짜기에 파묻혀 살긴 하지만 그가 결코 사고가 편협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말을 맞춰야 하지 않겠소? 옥화 봉공에게도 기별을 넣어 줘야 할 테고…….”
말을 맞출 것도 없다는 듯 곤륜무황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1시진 정도 빈도와 언쟁을 한 결과, 사본 정도로 합의를 본 것으로 합시다.”
곤륜무황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보던 맹주가 문득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소이다.”
“뭡니까?”
“곤륜파의 비급이야 교주에게 넘겨받더라도, 나머지는 본맹에 직접 넘겨 달라고 전해 주셨으면 하오.”
그제야 맹주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곤륜무황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음…, 맹주께서는 그녀의 목적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구려.”
맹주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노부는 봉공이 본맹의 이익을 위해 그토록 큰 모험을 감행하고 계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곤륜무황은 맹주를 향해 제안을 하나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노부가 교주와 만난 김에 이번 사안에 대해 깔끔하게 담판을 지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소이까?”
잠시 생각을 하던 맹주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무황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그럼 수고를 좀 해 주시겠소이까?”
속에 몇 마리의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옥화무제보다야,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정파의 일원으로 지내온 곤륜파의 곤륜무황이라면 맹주 역시 안심이 됐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곤륜무황이 교주와의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이다. 물론 옥화무제로서는 뒷골을 붙잡고 뒤로 넘어갈 일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