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3화 (619/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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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무제는 묵향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무영문의 분타에 기거하고 있는 중이다. 적절한 순간을 노려 묵향을 만나려면 이게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빨리 묵향에게로 가면 그가 의심할 가능성이 있었다. 맹주와 오랜 시간 협상해서 겨우 양보를 얻어 냈다는 식의 공치사를 받으려면, 아무래도 상대방의 애를 바싹바싹 태우는 게 좋았다. 그래야 교주도 흔쾌히 자신이 내건 조건을 수락하게 될 테니까.

협상을 중개해 준 대가로 교주에게 어떤 걸 요구하는 게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노획한 무공비급의 사본까지 넘겨줄 정도니, 그녀에게도 분명 아주 화끈한 대가를 지불할 게 틀림없다.

“뭐라고 서두를 꺼낼까? 당신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해 줘요? 아냐. 그건 너무 밋밋해.”

이때,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상문주님. 속하, 최창이옵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최창 분타주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요?”

“본문에서 급전이 도착했사옵니다.”

옥화무제는 분타주가 건네는 작은 대롱을 받아들었다. 대롱에는 특1급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옥화무제는 서둘러 대롱을 개봉하고,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암호문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해독되었고, 그녀의 눈에는 놀랍다는 빛이 떠올랐다.

212조장 이진걸의 보고서를 읽으며, 그녀는 개방에도 제법 뛰어난 인물들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수하들에 비하면 훨씬 급이 떨어지지만. 하지만 획득한 정보를 상부에 전달하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불사하는 그들의 모습에 옥화무제가 감명을 받은 건 사실이다.

“개방도 제법이로군.”

이때, 밖에서 또다시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타 내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은 겨우 분타주 정도다. 그렇기에 이 문 두드리는 소리는 분타주를 찾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걸 잘 알기에 옥화무제 옆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분타주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태상문주님을 만나는 중인데 감히 그걸 방해하는 놈이 있다니. 잠시 실례하겠다는 말도 못 하고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옥화무제의 말이 들려왔다.

“뭘 하고 있죠? 최 타주를 찾는 모양인데, 나가 보세요.”

“송구하오나, 잠시 실례하겠사옵니다.”

잠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분타주가 허겁지겁 다시 들어왔다.

“맹에서 이게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방금 전에 분타주가 들고 들어왔던 것과 같은 모양의 대롱이었다. 특3급의 인장이 찍혀 있었지만, 발신처가 무림맹이었기에 그녀는 황급하게 봉인을 뜯고 전서를 읽기 시작했다.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는 지부장이 발신할 수 있는 최고의 비밀 등급이 특3급인 만큼, 아주 중요한 내용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옥화무제는 분타주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맹에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세요.”

“옛, 태상문주님.”

분타주가 밖으로 달려나간 후,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맹주가 왜 나를 보자는 거지?”

교주와의 협상에 대한 맹주의 허락은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맹주가 자신을 찾는 것은 그 외에 다른 일거리가 생겼다는 뜻일 텐데, 옥화무제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자신을 급히 찾을 만큼 화급한 사안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옥화무제를 태운 마차가 무림맹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날이 늦었기에 그녀는 이튿날 맹주를 만나보고 싶다는 청을 넣을까 하다가, 저쪽에서 급히 찾았던 터라 곧바로 청을 넣었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맹주는 자신을 만나려고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곧장 맹주에게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시구려, 옥화 봉공.”

“급히 저를 찾으셨다면서요?”

“그렇소. 자, 앉으시구려.”

맹주는 자리를 권한 후, 급히 그녀를 찾은 것 치고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기에 옥화무제는 맹주가 왜 자신을 급히 찾은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져만 갔다.

“허허, 봉공께서 바쁜데 뵙자고 청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려.”

“안 그래도 이 근처에 올 일이 있었던 참이었으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일이 있으셨던 게로구려. 그래, 언제 출발하시려고?”

“내일 오전에 출발할 예정이에요.”

“그럼 좋은 용정차가 새로 들어왔는데, 다향을 맡으며 담소를 나누는 게 좋지 않겠소?”

그녀의 속이 궁금증으로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걸 즐기며, 맹주는 이런 저런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끌었다. 그게 맹주 나름대로의 복수였으니까. 그녀가 맹주에게 질문을 던질 만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을 때는, 그 망할 용정차를 한 모금쯤 마신 후였을 때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급히 찾으셨는지……?”

“흠, 서신으로 전해도 큰 무리는 없는 일이겠으나, 그렇게 하는 건 지금까지 수고를 하신 봉공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부른 것이외다.”

말을 듣던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예의가 아닌 것 같다니요?”

“지금껏 교주와의 협상을 위해 고생을 하셨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폐를 봉공께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말이외다.”

맹주의 폭탄 선언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의 표정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기절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녀는 맹주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교주의 제안에 뭔가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책임지고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수 있도록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허허, 그런 얘기가 아니오. 곤륜무황이 본좌에게 제안을 했소. 교주도 지금 양양성에 있으니, 자신이 이번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이외다. 사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멀리 떨어져 계신 옥화 봉공께서 고생스럽게 맹과 양양성을 오가며 협상을 중개하시는 게 못내 미안하던 참이었던 터라, 노부는 흔쾌히 곤륜무황의 제안을 받아들였소.”

뻔뻔스러운 맹주의 말에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손가락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옥화무제의 얼굴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무황께서 아무리 이번 일을 맡고 싶어 하신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분이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에게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있으실까요?”

“허허, 그거야 무황께서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니 그저 믿고 있어야겠지요.”

너무나 능청스러운 맹주의 모습에 옥화무제는 약이 바짝 올랐다. 이건 의도된 수순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맹주가 무황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말이다. 예로부터 곤륜파와 마교는 악연으로 점철된 원수지간이 아닌가. 무슨 속셈으로 곤륜무황이 이 일에 끼어들었는지도 알 수가 없지만, 그걸 넙쭉 허락한 맹주의 속셈도 알 길이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그녀가 냉철함을 유지하기 힘들 때는 더욱.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맹주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본녀는 완전히 이번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하겠어요. 물론 마교의 입장을 전달하는 중계자의 역할까지도 말이에요. 만약, 차후 마교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본녀는 전혀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강경하게 나간다면 약간이나마 찔끔할 것이라는 옥화무제의 예상과는 달리, 맹주는 자신이 바랬던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막중한 임무에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봉공께서도 좀 쉬셔야지요. 그리고 봉공께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곤륜무황께 협조를 요청한 것은 맹이 아니라 바로 마교에서였소.”

그 말에 옥화무제는 너무나도 황당해서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좀 빡세게 조건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그 자존심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교주 놈이 곤륜파에 손을 벌릴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양양성 내에서 패싸움까지 벌였을 정도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인 상대에게 말이다.

분노에 치를 떨고 있던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일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감에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교주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는 것을 맹에서 눈치 챈 것도 문제였지만, 재수없으면 교주에게로 이번 일에 대한 진실이 넘어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잔인하기 짝이 없는 교주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옥화무제였기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교주의 존재가 주는 공포감에 질려 있을 때, 맹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봉공께서 너무나도 큰 수고를 해 주셨는데, 뭔가 해드릴 수도 없는 처지라 너무나도 미안하구려. 혹, 노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시구려. 노부의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리다.”

말로만 공치사를 연발하는 맹주의 모습에 옥화무제는 하마터면 발작할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동원해서 겨우 참았다. 이 시점에서 맹주를 자극해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독한 마음을 품고, 이번 사건의 전말을 교주에게 슬쩍 흘리기만 해도 자신은 죽은 목숨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영문 자체가 박살이 날 우려마저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이빨을 갈며 복수를 다짐해야만 했다.

‘두고 보자. 나중에 본녀의 발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도록 만들어 주마. 감히, 이번 일에서 본녀를 배척하다니! 누가 이 일을 다 성사시켜 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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