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을 뿌득뿌득 갈면서 밖으로 나왔을 때, 기가 막힌 계책 하나가 옥화무제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교주에게 복수하거나, 혹은 그를 자신의 치마폭 안으로 끌어들이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 중 치명적인 정보 몇 가지를 표시 안 나게 장인걸에게 슬쩍 넘기기만 하면 될 테니까. 교주는 자신을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맹주와 곤륜무황에게 복수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게 더욱 그녀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맹주를 엿 먹일 만한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오른 것이다.
“맞아! 바로 그거였어.”
옥화무제는 자신의 숙소로 가는 대신, 무영문 무림맹 파견지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맹에서는 꽤 높은 사람들과 접촉해야 했고, 또 그만큼 고급 정보를 취급해야 하는 만큼 무영문에서는 당주급을 그 지부장으로 파견해 놓고 있었다.
지부장실에 도착한 옥화무제는 품속에서 매미 날개처럼 얇게 가공된 작은 양피지 몇 장을 꺼내, 깨알 같은 글씨로 암호문을 기록했다. 그녀가 품속에서 꺼낸 대롱의 수는 7개. 전서구 7마리를 동시에 날릴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대롱 속에 양피지를 똘똘 말아서 넣고, 촛농으로 완전히 밀봉한 다음 표식을 새겨 넣으며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지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섬서분타행 전서구는 몇 마리나 남아 있지요?”
“송구하오나 남은 게 한 마리도 없습니다. 태상문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총단과의 연락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몇몇 주요 분타들을 제외하고, 다른 분타들과의 연락은…….”
옥화무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녀는 특3급의 표식이 찍혀 있는 대롱 4개를 건네며 말했다. 특3급은 분타주급이 해석해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암호문이었다.
“어떤 경로를 택하더라도 좋으니, 최대한 빨리 이걸 섬서분타주가 받을 수 있게 해 보세요.”
“존명!”
그리고 그녀는 특1급의 표식이 찍혀 있는 대롱 3개를 마저 내밀며 말했다.
“이건 총단으로 곧바로 보내도록 하세요.”
총단으로 직접 날아가는 비둘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영문의 총단인 만큼, 수많은 비둘기들이 들락거리게 될 게 뻔한데 그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기에 무영문의 총단이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기에 추밀단에서는 총단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몇 군데의 거점들을 마련해 놓고, 그곳들을 기점으로 전서구를 분산해서 키우고 있었다.
“지금 당장 보내도록 하세요.”
해가 지려면 이제 1시진도 채 안 남았다. 비둘기가 밤에는 움직이지 않는 걸 감안한다면, 내일 새벽에 날리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비둘기들이 천적들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단 1분이라도 일찍 날리면, 그만큼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겠는가.
* * *
자신의 꿈이 한순간에 박살나 버린 탓에 옥화무제의 눈이 뒤집혀져 있을 때, 맹주의 방은 또 다른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허, 요 며칠 사이에 독대를 청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노?”
짐짓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냥 해 본 소리일 뿐. 장로급의 청을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문관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던 공수개 장로는 실내에 맹주 외에도 감찰부주가 앉아있는 걸 보고 약간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알아본 맹주는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감찰부주는 노부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 중 하나니, 나와 독대한다 생각하고 기탄없이 얘기해 주기 바라네. 자, 이리 앉게. 차 한 잔 하겠는가?”
“예.”
자리에 앉은 공수개 장로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옥화 봉공께서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봉공께 통보를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놀라운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맹주는 장단을 맞춰 줬다. 아주 커다란 껀수를 물어 온 모양인데, 그에 따른 대접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허허, 자네가 독대까지 청한 걸 보면, 아주 대단한 것인 모양이구먼.”
“예.”
그리고 공수개 장로는 방금 전에 도착한 따끈따끈한 정보를 맹주에게 보고했다. 장인걸이 무림에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어떤 교활한 계책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무예를 수련하는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장인걸의 계책에 맹주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 시간 중원 여기저기서 혈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만큼 모든 군소방파들은 자신들의 몸을 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 문파를 지키는 것도 벅찬 마당에 맹의 대의를 따라 양양성에 무사들을 파견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만약 이 사실을 무림에 공포한다면, 지금까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인 모를 혈겁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 있던 군소방파들은 정상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놈들의 계책에 속아 넘어가 다른 문파를 공격하는 미친 짓거리 또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장인걸의 수하들이 계속 유혈 사태를 일으키겠지만, 그건 곧이어 진압될 게 분명했다. 장인걸이 아무리 많은 수하들을 풀어놨다고 해도, 중원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혈겁을 일으킨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할 테니까.
옥화무제가 먼저 보고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단 이번 일을 알아내는 데 있어서 개방도 일조했다는 걸 맹주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공수개 장로는 암호가 해독되자마자 만사를 제쳐 놓고 이리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었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손을 덥썩 잡으며 치하했다.
“노부가 개방에 너무나도 큰 빚을 지게 되었구려. 정말 수고하셨소.”
“과찬이십니다, 맹주님.”
“분명,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 낸 정보일 텐데…….”
“수십 명에 달하는 형제들이 목숨을 잃긴 했습니다만, 무림의 안녕을 위한 일인데 그 정도의 희생이 대수겠습니까. 이 정보로 인해 무림이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설 수 있다면, 희생된 방도들도 그것만으로 큰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는 우연히 그곳에 나타난 패력검제가 커다란 도움을 줬다는 말을 했다. 속마음 같아서는 이 모든 게 자신들의 공인 것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무시해 버렸다가는 훗날 커다란 후환이 뒤따를 수도 있었다. 이 얘기가 결국에는 패력검제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한데, 자신의 공적이 쏙 빠져버린 얘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렇기에 그는 패력검제의 도움에 대해 상세히 맹주에게 설명했던 것이다.
“허허, 원시천존님의 도우심이로다.”
맹주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감찰부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공수개 장로님. 맹주님과 담소를 나누시는 중에 끼어들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처음에 무영문으로부터 통보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만…….”
“아, 제가 그렇게 말씀드린 건 무영문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시작한 공수개 장로의 얼굴은 아주 통쾌한 듯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영문에 뒤쳐질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온 것이었는데, 이제 보니 맹주는 옥화무제로부터 이 건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한 듯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유는 뻔했다. 무영문 패거리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공수개 장로는 벅차오르는 승리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수개 장로의 설명을 다 들은 맹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무영문에서도 이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이오?”
“글쎄요? 무영문의 이진덕 조장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알고 있을 테지만, 봉공께서 말씀 안 하셨다면 아마 그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듯합니다. 방금 전에도 설명드렸듯이 몇 가지 오해로 인해 패력검제 대협을 적들의 첩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때였기에, 진곡추 타주는 그들의 탈출에 모든 걸 걸었지요. 당시 측면 지원을 했던 개방도들이 아무도 생존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 역시 탈출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는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려.”
“마침 여기에 옥화 봉공께서도 와 계시니 나중에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맹주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거요. 봉공께서 내일 출발하실 거라고 들었는데, 그 전에 노부가 직접 전하고 위로하도록 하겠소. 그분도 우수한 수하들을 잃었으니 상심이 크시지 않겠소.”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맹주님.”
“어쨌건 정말 수고하셨소. 그러고 보니 방주께서도 상심이 크시겠소이다. 아끼던 수하들을 많이 잃었으니 말이오. 노부가 직접 방주를 찾아뵙고 위로를 드리는 게 도리겠으나…….”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방주께 충분히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맹주님.”
“그럴 수는 없지요. 내가 직접 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장로들 중 한 명을 보내 개방의 공로를 치하하고, 그 희생을 보답하도록 하겠소.”
공수개 장로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감사하신 말씀이십니다.”
“패력검제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도 큰 도움을 줬다고 하니 자그마한 사례라도 해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문에는 그분의 행방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분께서 지금까지 본방에 머물러 계실 가능성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맹주는 귀중한 정보를 가져온 공수개 장로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개방의 공적을 치하한 후에야 그를 돌려보냈다. 공수개 장로가 돌아가자마자 맹주는 감찰부주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패력검제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게.”
“그분께 이게 사실인지 확인을 하시려고 하시는 거라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개방에서 있지도 않은 정보를 만들어서 맹주님께 보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그 사항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질을 주시지 않은 봉공이 더욱 수상쩍습니다.”
그 말에 맹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봉공이?”
“예. 개방도들에 비해 무영문도들의 무공 수준은 월등하게 뛰어납니다. 특히, 은신(隱身)과 잠행(潛行)에 있어서는 상대가 안 될 정도지요. 그런 그들이 개방도의 지원까지 받으면서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래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마침 봉공께서는 내일 떠나실 예정이시라고 하니, 맹주님께서 배웅도 할 겸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워낙 표정 관리를 잘하시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찔러 보면 뭔가 대답을 얻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전에 준비해 둔 선물은 어디에 있는가?”
“선물이라시면…, 진주 목걸이 말씀이십니까?”
교주와의 협상에 대한 사례로 옥화무제에게 주기 위해 맹주가 준비한 대가가 바로 그거였다. 완벽한 원형을 갖춘 진주는 매우 귀했다. 더군다나 알이 굵기까지 하다면 그건 부르는 게 값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여인에 대한 선물로 그 이상 없을 거라는 게 감찰부주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걸 맹주가 옥화무제에게 선물하지 않고 끝내 버린 건, 그동안의 그녀의 소행이 너무나도 괘씸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