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7화 (623/930)

* * *

개방의 비육걸개(肥肉乞丐) 장로는 총단에 남아 있던 정예의 삼분지 일을 이끌고 즉각 섬서성으로 달려갔다. 이동로 인근에 위치해 있는 분타들의 정예들을 흡수하며 이동했기에, 자장(子長)분타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그 수가 무려 3천에 가까울 정도로 불어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육걸개 장로의 안색은 썩 밝지 못했다. 무영문과 정면충돌까지 각오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3천이라는 숫자로는 썩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영문도들의 무공 수준이 개방도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는 건 지나가는 개들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장로님.”

자장분타에 도착한 비육걸개의 모습은 평상시와 달리 꽤나 말쑥한 것이었다. 패력검제에게 좋은 인상을 보여 줘야 하는 만큼,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개천에서 몸을 씻은 것은 물론이고, 땟국물이 흐르는 옷까지 깨끗하게 빨아 입었기 때문이다.

비육걸개는 자신을 마중 나온 분타주들에게 그간의 노고에 대해 치하했다. 특히, 오늘의 성과를 있게 한 진곡추 분타주에 대한 치하가 컸다. 그런 장로의 칭찬에도 진 분타주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죽음을 당했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진곡추는 비육걸개의 등장에 크게 감동한 상태였다. 설마하니 장로급이 직접 여기까지 달려와 줄 거라고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로님께서 직접 달려오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원로(遠路)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허허, 수많은 형제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 정도가 대수겠는가. 그래, 꽤 많은 무영문도들을 생포했다고?”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장로님. 만약 패력검제 대협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대협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일단 마을 중심에 있는 용문객잔으로 모셨습니다. 낡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인근에서는 가장 시설이 좋은지라…….”

“잘했군.”

개방도들이 자신들보다 무공이 뛰어난 무영문도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패력검제의 덕분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무영문에서 동문들의 구출작전을 쉽사리 펼치지 못하고 있는 이유 또한 바로 그의 존재였다. 옥화무제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패력검제를 상대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걸 잘 알고 있는 자장분타주였기에 총단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그를 극진히 모시며 이곳에 잡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패력검제가 묵고 있는 용문객잔으로 찾아간 비육걸개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패력검제 대협.”

상대의 푸짐한 덩치를 알아보자 패력검제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오, 이건 비육걸개 장로가 아니십니까?”

화경급의 무예를 지니게 됨으로 인해 패력검제는 중원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높은 배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비육걸개 쪽이 연배가 높은 선배고수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패력검제 역시 말을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방주님을 대신하여 대협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방은 대협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려.”

“하하,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무슨 인사를 그리 과하게 하십니까.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 했을 겁니다.”

“정도를 걷는 무사라면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알긴 합니다만, 실제로 사건이 닥쳤을 때 끼어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상대가 천하의 무영문인데 말입니다. 은원을 맺었을 때 가장 골치 아픈 상대가 바로 무영문이 아니겠습니까.”

“허어~, 이것 참…….”

패력검제는 난처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비육걸개 장로께서 노부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시는 모양이군요. 아부가 과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일순 비육걸개 장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자그마한 눈동자는 워낙 두툼한 살집 속에 감춰져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그걸 눈치 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육걸개는 짐짓 너털웃음으로 자신의 표정을 감추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핫핫핫, 무슨 그런 말씀을. 이미 대협께는 다 갚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점소이를 불러 술과 안주를 시킨 비육걸개는 호기롭게 말했다.

“방주님께 돈을 왕창 뜯어왔으니, 제가 오늘 크게 한턱 쓰겠습니다. 핫핫핫.”

* * *

“저쪽의 동정은 어떻더냐?”

순우기 장군의 물음에 군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아무런 이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장군.”

“그래? 어쨌건 수고했다.”

“옛.”

더 이상 알아볼 게 없다고 판단한 순우기 장군은 군관을 돌려보냈다.

“거참, 이상한 일이로군.”

군관은 몇 가지 보급물자를 수령하기 위해 여문덕 상장군의 진영에 갔다가 방금 전에 돌아왔다. 그곳에 가기 전에 상장군의 동태를 자세히 살펴보라 이미 일러 뒀기에, 그에 따른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다? 순우기 장군은 그 점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돌을 던졌으니, 지금쯤 상대로부터 뭔가 반응이 와야 했기 때문이다.

여문덕 상장군은 자신들의 대열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아직까지도 밝혀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배반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상부에 밀고했다면, 벌써 오래전에 자신들을 잡기 위해 형부에서 들이닥쳤을 테니까.

“도대체가 상장군의 속셈을 모르겠군. 뭘 어쩌자는 건지…….”

여문덕 상장군이 가세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일으킬 수가 없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거는 것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니까 말이다.

상장군의 결정을 하루 이틀 기다리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주요 장수들에 대한 포섭 작업은 완전히 끝났다. 모두들 악비 대장군을 부모처럼 따르며 존경하던 장수들이었기에, 포섭 작업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겠지만, 한 길도 채 안 되는 사람의 속은 누구라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그들 중 어느 하나가 상부에 밀고라도 하는 날이면 파멸인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상장군.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네가 그쪽으로 가는 것은…….”

사태가 급박함을 알지만, 유광세 상장군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여문덕 상장군을 만나서 설득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모반의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순우기 장군을 그곳으로 보낸다는 것도 큰 모험이었다. 만약 상대가 변심해서 순우기 장군을 투옥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은 가장 신뢰하는 동지를 잃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곳에 다른 사람을 보낼 수도 없다. 상장군을 설득하는 중책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런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리신다고 해도 소장은 상장군을 설득하러 가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요.”

순우기 장군이 이렇게 강경하게 말하는 이유는 며칠 전, 회하 중부 지역 방어선 중 일부를 맡고 있던 심대평 장군이 처형된 사건 때문이었다.

심 장군이 황실에서 파견된 장졸들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오늘 아침 추밀원에서 긴급 공문이 날아왔다. 공문의 내용은 심 장군이 금나라와 내통했고, 이에 그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 황실의 사냥개인 황성사가 전방에 배치된 모든 지휘관들을 향해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포섭된 장수들 중 하나가 입이라도 자칫 잘못 놀리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인 것이다.

“만약 제가 4일 내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상장군께서 배신하신 거라고 여기셔도 무방할 겁니다.”

“휴우, 어쩔 수가 없군. 알겠네. 귀관의 충심은 내 잊지 않겠네.”

허가가 떨어지자 군막을 나선 순우기 장군은 몇몇 호위병만을 대동한 채 여문덕 상장군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

여문덕 상장군을 만난 순우기 장군은 상대의 표정이 예상외로 밝은 것을 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변심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서 오게나. 안 그래도 유 상장군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갑자기 몇 가지 일이 생겨 발을 빼기 어려웠다네.”

“반가이 맞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장군.”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 여문덕 상장군은 순우기 장군을 진영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처소로 안내했다. 밀담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을 인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함정을 파놓고 끌어들이는 것인지를 가늠하느라 순우기 장군의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상장군의 처소를 경비하고 있던 군사들이 순우기 장군과 함께 따라온 장졸들을 막아섰다.

이곳은 상장군의 처소다. 상장군이 초청한 순우기 장군 외에 다른 자들이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이다. 경비병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순우기 장군은 하마터면 칼을 뽑아들 뻔했다. 자신을 저 안으로 끌어들여 생포하려는 속셈인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칼에서 손을 뗀 순우기 장군은 상장군을 따라 순순히 들어가기로 했다. 이곳은 상장군의 진영 한복판이다. 겨우 6명밖에 안 되는 호위병들과 함께 칼부림을 해 봐야 헛된 반항일 뿐이었다.

순우기 장군은 손을 들어 호위병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여문덕 상장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앉게.”

순우기 장군에게 자리를 권한 후, 여문덕 상장군은 탁자에서 하얀 비단으로 감싼 보따리를 꺼냈다. 새하얀 최상급 비단으로 감싸 있는 걸 보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소중한 게 그 안에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풀어보게.”

“이게 뭡니까?”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던 순우기 장군의 손이 딱 멈췄다. 피에 절어 있는 관복, 순우기 장군은 이게 누구의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이건……?”

순간 순우기 장군의 손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대장군의 유품일세.”

여문덕 상장군은 관복 위에 놓여 있던 비단뭉치를 풀었다. 돌돌 말려 있던 새하얀 비단이 풀리자, 그 속에서 핏덩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이, 이걸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섭 대인이 주더구먼.”

그러면서 그는 추밀사 섭평의 말을 전했다. 악비 대장군의 죽음에 얽힌 비사를 말이다. 물론 그것은 섭평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지만,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묵향이 이들에게 알려 준 것도 섭평이 대장군을 죽였다는 정도의 아주 간략한 내용이었지 않은가. 그에 비해 섭평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게 선후관계를 따져가며 그럴듯하게 비사를 늘어 놨으니,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장군을 죽인 게 진회, 그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매국노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섭 대인도 대장군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구먼. 황실 안에 재상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섭 대인 같은 사람도 재상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추밀원으로 쫓겨났다고 하더군.”

이렇게 말하며 여문덕 상장군은 섭평이 제안했던 사안을 순우기 장군에게 고스란히 전했다. 매국노 진회를 몰아내고, 악비 대장군을 복권시키자고 말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순우기 장군에게도 솔깃한 것이었다. 대장군의 복권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소식을 상장군께 즉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상장군. 부탁은 소장이 해야지요. 이런 비상시국에 자신의 권력이나 탐하고 있는 쓰레기를 몰아내는 일입니다. 만약 저를 참여시켜 주지 않으신다면, 엎드려 빌어서라도 참가를 허락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상장군.”

섭평의 말이 진실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여문덕 상장군의 말에,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던 순우기 장군 역시 아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순우기 장군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가급적이면 목숨을 건 모험은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던가. 추밀사 섭평과 함께 한다면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썩어빠진 간신들을 축출하고, 황실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을 훨씬 더 안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군부 공통의 적이 섭평에서 진회로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재상 진회를 타도하기 위한 계략을 짜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선 순우기 장군은 말을 달려 양양성으로 돌아가 유광세 상장군에게 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섭평이 아닌 진회를 타도해야 한다는 정보를 묵향에게도 전했다. 진회의 끄나풀이었던 섭평이, 양심선언을 했다고 말이다.

군부의 일에 밝지 못했던 묵향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방꺼리도 안 되는 황궁의 정세에 대해 알아보랍시고 무영문에 의뢰를 넣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무엇보다 지금 그의 관심은 장인걸에게 쏠려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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