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8화 (624/930)

능구렁이들의 머리싸움

비육걸개 장로가 패력검제와 함께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진곡추와 자장분타주는 혹, 있을지도 모를 무영문의 기습에 대비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무영문도들이 워낙 은신과 잠행에 뛰어나다 보니, 언제 기습공격을 가해 올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총타로부터 긴급 지시가 하달되었다. 수하가 전하는 전문을 받아 읽던 자장분타주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럴 수가!”

자장분타주의 얼굴에 짙은 회의감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본 진곡추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전문인데 그러나? 놈들이 어딘가를 기습공격 하기라도 했나?”

자장분타주는 전문을 진곡추에게 건네주며 허탈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아닐세. 지금 당장 무영문도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이야.”

자장분타주의 손에서 전문을 뺏듯이 받아든 진곡추는 급히 읽기 시작했다. 암호로 작성된 전문이었지만, 그 역시 분타주였기에 읽는데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미, 믿을 수가 없군. 그 많은 형제들이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놈들을 그냥 놔주겠다니……. 이럴 수가 있나!”

울분에 찬 진곡추는 다급히 비육걸개 장로에게 달려가 상부의 지시를 전했다. 이번 작전에서 자신의 부하를 몽땅 다 잃은 진곡추였기에, 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차분히 전문을 읽고 있는 비육걸개를 향해 씨근덕거리며 상부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하지만 진곡추의 예상과 달리 전문을 모두 읽은 비육걸개의 반응은 덤덤하기만 했다. 아니, 그는 이미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비육걸개의 모습에 진곡추는 마치 믿는 도끼에 발등이라도 찍혔다는 듯 분개하며 소리쳤다.

“장로님께서는 이미 이렇게 결론지어질 거라고 예측하고 계셨습니까?”

비육걸개는 내공을 끌어올려 전문을 불사르며 중얼거렸다.

“분하고 원통한 일이지만, 방주께서는 결국 화평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걸세.”

“본방은 30만씩이나 되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까? 한번 붙어 보기라도…….”

하지만 진곡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비육걸개가 갑자기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서로의 얼굴이 맞닿기라도 할 듯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때 진곡추는 볼 수 있었다. 살덩어리에 가려져 있는 비육걸개의 자그마한 눈에 어느새 습기가 차오르고 있음을.

“나도 잘 알아! 안다고! 하지만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싸워 봤자 백전백패라는 걸 자네는 모르나?”

“그렇다면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기회?”

“제가 놈들의 본거지를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비육걸개는 진곡추의 멱살을 살며시 놔주며 말했다.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네. 지금까지 무영문을 감시하기 위해 투입한 인원들 중 살아서 돌아온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일세.”

“장로님이 말리신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로 인해 제 목숨을 내놔야 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비육걸개 장로는 잠시 진곡추의 얼굴을 그 작은 눈으로 쏘아봤다. 갑작스럽게 바뀐 비육걸개의 태도에 진곡추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잠시 후, 비육걸개가 허탈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무영문을 감시하기 위해 투입된 인원들 중,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 노부의 말뜻을 진정 모르는 겐가?”

숨겨진 속뜻이 있다는 말에 진곡추는 잠시 당황했다. 숨겨진 속뜻이라고? 잠시 생각하던 진곡추의 얼굴에 경악감이 어렸다.

“서, 설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비육걸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중얼거렸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일세. 본방 내에 무영문의 개들이 숨어 들어와 있다는 말이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놔두고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랜 시간 공들여 조사한 결과 몇 놈은 찾아냈어. 하지만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숫자가 본방에 들어와 있는지 파악하지는 못했다네. 놈들을 완전히 일망타진 할 수 없다면, 그냥 놔두는 게 좋아. 괜히 건드려 봐야 놈들의 조심성만 키워 줄 뿐이니까.”

제자들을 시켜 포로들을 놔주라고 지시한 비육걸개는 패력검제가 있는 객잔으로 발길을 옮겼다.

“젠장. 이제는 그 소식을 전해야 하는구만.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패력검제를 찾아 발길을 옮기는 비육걸개의 어깨는 평소와 달리 축 늘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이제야 전한다는 게 너무 속 보이는 행동이라는 걸 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패력검제가 개방을 위해 그토록 큰 도움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진실을 감추고 있어야 했다는 게……. 자격지심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리라.

“참, 이번에 아드님이 금나라에 납치당했다고 들었는데, 대협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비육걸개는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적절한 때를 골라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패력검제는 예상대로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지만, 비육걸개는 상대의 이런 반응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저는 대협께서 홀로 여기까지 오신 게…, 그놈들의 흔적을 추적하시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만 생각을…….”

그 정도에서 비육걸개는 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노회하기 그지없는 패력검제였지만, 이런 비육걸개의 교활한 속셈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걸 찬찬히 따질 만큼 안정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일 때문에 이리 온 거고……. 그래, 량이가 납치당했다는 건 대체 어디에서 들었소이까?”

“허, 거참.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돕니다. 만약 이게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정보였다면, 대협을 뵙자마자 제가 이 소식부터 전했겠지요. 자제분께서는 동료 4명과 함께 만현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놈들의 마수에 걸렸다고 합니다.”

“만현으로 가던 도중이었다고요?”

패력검제는 머리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시점에 아들 녀석이 만현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혹, 위쪽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던 것이었습니까?”

패력검제가 제일 먼저 떠올린 이유는 그것이었다. 문도들을 거느리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대신해서 제령문을 맡고 있어야 할 녀석이 만현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무책임한 놈도 아니고, 오히려 어떻게 보면 고지식하기까지 한 녀석이 아니던가.

“제가 듣기로는 친구들과 유람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패력검제가 외쳤다.

“량이가 어떤 아이인데 그런 헛소리를!”

“하지만 사실입니다. 천지문의 소연과 진팔, 그리고 조령이라는 여아와 그 아이의 호위무사가 함께 움직였다고 하더군요.”

소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패력검제는 솟구쳐 오르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소연이도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비육걸개는 살집을 출렁거리며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오, 패력검제 대협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아마 자제분께서는 그 여아들 중 하나에 마음이 있었던 건지도…….”

연막을 치기 위해 비육걸개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지만, 패력검제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이번 납치극이 왜 벌어진 것인지 곧바로 감을 잡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연 즉, 교주의 양녀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만약 그녀가 교주의 딸이라는 걸 몰랐다면 패력검제로서도 이 사건의 내막을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다.

‘허허, 이거 참. 고래 싸움에 끼어 새우 등이 터진 격이군. 량이 이놈은 어쩌자고 소연이 하고 같이 어울리다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패력검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마…….”

여기까지 말하던 패력검제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소연이 교주의 딸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이 사건이 장인걸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납치하기 위해 벌인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마교 교주를 거론한다면,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개방의 장로가 무슨 생각을 할까? 앞으로 교주의 도움을 청하게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쓸데없는 잡음은 일으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한 김에 말을 끊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때, 패력검제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가 막힌 생각이 하나 있었다.

패력검제는 짐짓 표정을 굳히며 낮은 어조로 질책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에 오시자마자 저한테 알려 주지 않고, 이제야 전해 주는 저의가 뭡니까?”

“헛, 그, 그건…….”

얘기가 잘 풀렸다며 안심하고 있던 비육걸개의 푸짐한 얼굴 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벌써 알고 계신 줄로 생각했지 뭡니까? 모르고 계신 걸 진작 알았다면 벌써 말했겠지요.”

비육걸개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패력검제는 누구를 찾아가서 아들의 구명을 부탁해야 할지 고심했다. 아무리 자신이 화경에 오른 고수이고, 제령문의 문주라고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 장인걸의 손아귀에서 아들 녀석을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소린데…, 과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가장 좋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교주였다. 그도 자신의 딸이 납치된 만큼, 장인걸의 손아귀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패력검제는 선뜻 교주에게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정파의 명숙인 자신이 교주에게 매달린다는 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들어왔던 마교에 대한 선입관도 크게 작용했다. 마교는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철혈의 세계라 하지 않던가.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교주까지 되었을 정도라면 보통 냉혹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리라. 더군다나 그는 전임 교주였던 장인걸을 내쫓고 교주가 된 인물이었다. 한중길 교주를 내쫓고, 교주가 되었을 정도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장인걸을 상대로 말이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딸의 목숨을 택할까? 아니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교주가 지금이야 저렇게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딸의 생명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 포기해 버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의해 자신의 아들 목숨까지 함께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는 나대로 다른 길을 모색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신이 가야 할 곳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곳은 바로 무림맹이었다. 먼저 맹주에게 청을 넣어본 다음, 만약 맹주가 자신의 청을 거절한다면 그때는 교주에게로 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 * *

“패력검제가 찾아왔다고?”

맹주의 물음에 접객원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맹주님. 맹주님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그가 노부를 왜 찾아왔을…….”

순간 맹주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에 장인걸에게 납치된 것은 진팔만이 아니지 않은가. 패력검제의 아들 역시 납치되었으니 말이다.

맹주는 접객원주에게 지시했다.

“노부가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 힘드니,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전하게.”

“예, 맹주님.”

“맹 내에서 가장 좋은 숙소로 안내해 불편함이 없도록 하게. 알겠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접객원주를 돌려보내자마자 맹주는 감찰부주를 급하게 불러들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꼬?”

“깊게 생각하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굴러들어온 호박이니, 이용해 먹으면 그만이지요.”

“그러다가 그가 교주에게로 가면 어떻게 하고?”

감찰부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맹주님. 진팔이가 교주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걸 모르니 이리로 달려온 것이겠지요.”

감찰부주의 말에 맹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호, 듣고 보니 그렇구먼.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가 보구먼.”

“그에게 아들을 구출하는 것에 맹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하시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 아닌가?”

묵향과의 밀약으로 인해, 조만간에 맹주는 장인걸과 비밀협약을 맺을 계획이었다. 그 말은 곧 인질 구출처럼 장인걸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은 처음부터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하지만 감찰부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말로만 그렇게 약조해 주시면 됩니다. 그가 어찌 알겠습니까?”

“괜찮을까?”

“심려하지 마십시오.”

감찰부주의 말에 맹주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를 만나 봐야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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