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9화 (62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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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본좌는 옥화무제와의 면담을 원했었는데?”

매영인은 예상했던 상대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이 기억하는 한, 이 사람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겉모습부터 시작해서 단도직입적인 그 성격까지. 어떻게 자신이 바로 코앞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셔도 보자마자 이렇게 면박을 주시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아, 실례.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 자, 그쪽에 앉지.”

자리에 앉은 매영인은 공손한 어조로 자신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제가 대신 왔어요. 제 공식 직책은 무영문의 부문주니까 할머니를 대신해서 교주님과 면담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매영인의 말에 묵향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아마도 그녀의 변명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올라오면서 본 경치도 정말 아름다웠구요.”

묵향은 수하에게 명령해 다과와 술, 그리고 음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곧이어 음식이 날라져 왔는데, 산 속이라 그런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자, 이거 보기보다 꽤 맛있어. 먹어 봐.”

통으로 구운 토끼의 다리를 쭉 찢어서 건네는 묵향의 소탈함(?)에 매영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무인의 뜻하지 않은 환대에 그녀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할머니가 비급을 가지고 장난쳤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면서 묵향에게 어떤 문책을 당할 것인지 간이 조마조마 했었던 것이다.

“저, 실은 사과드리러 왔어요.”

“사과? 그게 무슨 말이야?”

“교주님께서 맹주께 부탁하신…….”

하지만 매영인의 말은 묵향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무영문에 신세진 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그런 것 가지고 본좌가 뚱해 있겠나. 본좌를 그렇게 속 좁은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니, 이거 정말 섭섭한데?”

은근한 질책에 매영인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교주님.”

“하하핫, 이거 농담도 못하겠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묵향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는 매영인에게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무림맹에 제공한 것과 똑같은 사본을 무영문에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과거 그녀와의 혼사마저 마다했던 묵향이었는데,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정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매영인을 대하는 묵향의 태도에는 꽤나 배려가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교주와 면담을 마친 뒤 무영문으로 돌아간 매영인은 옥화무제의 방부터 찾아갔다. 옥화무제는 그때까지도 몸져 누워있었다. 의생이 홧병이라고 하는 걸 보면, 비급을 잃은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옥화무제는 매영인을 보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교주는 만나 봤느냐?”

“예, 할머니.”

“그래, 그가 뭐라고 하더냐?”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녀가 직접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었다. 묵향이 자신을 찾은 이유가 뻔한데, 구태여 대별산맥까지 찾아가서 욕을 듣고 싶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손녀를 대신 보냈다. 그런 만큼 교주의 반응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별말씀 없으셨어요. 본문에 신세진 게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 가지고 속 좁게 따지겠느냐는 말까지 하셨죠.”

생각지도 못했던 매영인의 말에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 그럴 인간이 아닌데……?”

“아니에요.”

매영인은 묵향과의 면담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옥화무제에게 들려 줬다. 마지막에는 이번 일만 잘 해결되고 나면, 옥화무제가 그토록 갈구했던 비급들의 사본까지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까지.

비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 옥화무제의 입이 벙긋 귀밑에 걸렸다. 그토록 원했던 일이 이뤄졌으니, 지금 당장 죽어도……. 아니, 그런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어쨌건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기뻤던 것이다.

옥화무제는 언제 자신이 앓았냐는 듯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같이 다과나 함께 할까? 향긋한 차가 마시고 싶구나.”

“예, 할머니. 기운 차리신 모습을 다시 뵙게 되어 너무 좋네요.”

“다 네 덕분이다. 정말 수고했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조손간의 한때를 보낸 후, 매영인이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되자 옥화무제의 영활한 머리는 저절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요 근래 욕심에 눈이 멀어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얻게 된 지금,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그녀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듯 소리쳤다.

“가만! 그게 아니잖아!”

일순 옥화무제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매영인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지만, 노회하기 짝이 없는 옥화무제는 눈치를 챈 것이다. 묵향이 그녀를 아니, 무영문을 통째로 중원에서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당장 총관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태상문주님.”

“본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에요.”

그러면서 옥화무제는 방금 전 매영인에게 들었던 묵향과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말해 줬다. 하지만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총관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태상문주님의 혜안(慧眼)을 속하가 감히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비약이 너무 심한 건 아닐까요?”

옥화무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아니에요. 나도 한동안은 그가 비급을 넘겨준다는 말에 들떠서 아무런 생각도 안 났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가 지금껏 이런 식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뭔가를 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나요?”

잠시 생각해 보던 총관은 어색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태상문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만큼의 일을 수행해 드렸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해 주셨지요.”

“그는 절대로 선심성 발언을 남발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해 주겠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 줬어요. 대신 그가 그런 약속을 할 때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죠. 이번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뭔가를 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는 말이에요.”

이제 함정은 만들어졌고, 장인걸이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즉, 무영문이 앞으로 묵향을 위해 해 줄 일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던 총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냉혹한 분이시로군요.”

“그런 사람이니까 철혈의 세계에서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거겠죠. 일견 아주 관대한 사람인 듯 보여도 그건 미래를 함께 할 사람들인 경우에 한해서예요. 일단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죠.”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묵향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게 된 것은 비급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워낙 엄청난 가치를 지닌 비급들이었기에 그녀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던 것이다.

“그래도 정말 의외로군요. 본문과 오랜 세월 거래를 맺어오셨는데, 이토록 매정하게 끊어 버릴 생각을 하시다니. 더군다나 본문과는 불가침협정까지 맺지 않으셨습니까?”

“본녀도 그걸 과신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런 종잇조각 따위로 얽어맬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그 협정서 역시 그가 원해서 써 준 건 아니었잖아요.”

옥화무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는 흑살마왕을 없앤 후 곧바로 나를 아니, 본문을 멸하려고 들 거예요. 흑살마왕을 없앤 후에 비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건, 그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말한 옥화무제는 총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자,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게 좋을까요? 추밀단주와 상의하기에 앞서 총관의 의견부터 듣고 싶었어요.”

그만큼 옥화무제가 총관을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그녀가 그동안 수립한 대부분의 계책들은 총관과 상의해서 수립된 것들이었고, 또 총관에 의해 실행되어 왔으니까.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마지막에 봤던 맹주의 그 싸늘했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옥화무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맹주는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옥화무제가 아니라고 하면 아닐 것이다. 순간, 총관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무림맹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자신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총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 본문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있는 만큼, 아직까지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정중히 용서를 구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옥화무제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그처럼 융통성 없는 사람은 한 번 결단을 내리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총관도 잘 알잖아요.”

“번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발언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만 한다면요.”

옥화무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총관의 의견이 일리가 있긴 했지만, 묵향에게 압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소연은 장인걸에게 잡혀 갔고, 의형제를 맺은 만통음제는 행방불명이다.

“참, 그러고 보니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었죠?”

옥화무제의 말에 총관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협정서를 맺을 당시 잠시 모습이 포착되었을 뿐, 더 이상 그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십만대산에 있는 게 아닐까요?”

십만대산이라는 말에 옥화무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워낙 거리가 멀어 왕복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만, 문제는 그곳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단 한 치도 찾아낼 수 없는 철옹성이라서 은밀히 접촉하여 청탁을 넣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었다. 천하의 무영문에서 첩자를 단 한 명도 침투시키지 못한 곳이 바로 마교 총단이었으니 말이다.

옥화무제도, 총관도 그들이 찾고 있는 대상에 마화가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화를 그렇게까지 비중 있는 인물로 생각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본 마화는 마교의 살림꾼이 아니라, 흑풍대의 부대주일 뿐이었으니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군요.”

“…….”

그 말을 끝으로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열어 그 선택이 무엇이냐는 말을 못하고 있을 뿐,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그것은 바로 전력을 다해 묵향을 없애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옥화무제가 입을 열었다.

“대별산맥의 마교 집결지를 편복대에 노출시키도록 하세요.”

“그, 그러다 교주께서 눈치라도 채게 되면 돌이킬…….”

옥화무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아요. 그와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상태니까요.”

“지시대로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추밀단주를 불러 주세요. 은밀하게.”

“예.”

총관이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주전자를 들고 마치 기갈이라도 든 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목이 바짝 타 들어가는 듯한 그녀의 갈증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시녀를 불러 차를 더 가져다 놓으라고 지시한 다음, 그녀는 자리에 앉아 추밀단주를 기다렸다. 현재 그녀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추밀단주뿐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이 일에서 손녀인 매영인을 배제했다. 그녀는 다음에 써먹을 데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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