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만수진인이 무장의 안내를 받으며 장인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제 갓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팽팽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무당파가 자랑하는 전대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한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대단히 남성적인 얼굴이었다.
불진으로 도복의 먼지를 탁탁 터는 그의 모습에서, 이런 마의 소굴에 자신이 들어온 것에 대한 짙은 불쾌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장인걸은 저 말코가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만수진인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 자신이 할 일을 끝내고 여기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장인걸에게 건네며 말했다.
“맹주께서 전하는 친서(親書)올시다.”
그 서신을 편복대주가 장인걸을 대신해서 받은 다음, 장인걸에게 고개를 돌려 그의 허락을 구했다. 장인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편복대주는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먼저 읽었다. 혹, 독극물이라든지 생각지도 못했던 암수를 사용할 우려가 있기에 취해지는 의례적인 안전장치였다. 사실 독극물을 써봤자 극마급 고수인 장인걸에게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겠지만.
꼼꼼히 내용물을 살펴본 편복대주는 서신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장인걸에게 전했다. 읽고 싶지 않다고 해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의 상당 부분이 편복대주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까닭에 장인걸에게 서신을 바치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편복대주의 감정 상태를 장인걸이 놓칠 리 없다. 과연 맹주가 어떤 제안을 했기에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편복대주를 저렇게 만들어 놨을까? 잠시 후, 맹주의 서신을 읽어 가는 장인걸의 눈동자에도 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문의 서신에는 현재 무림맹이 처한 상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교 교주에 대한 험담이었다. 교주가 저질러 놓은 여러 사건들, 그런 그의 오만한 행동때문에 맹은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특히, 이번에 교주가 단독으로 연경을 친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맹주는 지적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을 교주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맹과 합동작전을 전개했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걸 보면 그는 전쟁의 승리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는 자와 동맹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바, 자신으로서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런 만큼 귀하는 우리와의 동맹을 어찌 생각하는가 하고 맹주는 묻고 있었다.
맹주는 장인걸이 금나라 장수로서 오랜 기간 금 황제를 위해 충성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장인걸이 신의가 없는 인물이었다면 오래전에 그 자신이 금의 황제가 되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장인걸은 같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만수진인에게 이죽거렸다.
“이걸 본좌에게 믿으라는 말이더냐?”
만수진인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서신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빈도는 전혀 모르고 있는 만큼,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렵소이다.”
“내용조차 모른다고? 여기 있다. 한번 읽어 보거라.”
서신은 장인걸의 손에서 떠나 천천히 만수진인에게로 날아갔다. 대단히 뛰어난 허공섭물의 응용이었다.
서신을 받아 급히 읽고 있는 만수진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읽어 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닌 듯했다.
서신을 다 읽은 후, 고개를 드는 만수진인의 얼굴에는 짙은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자신이 왜 이따위 서신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힘들게 달려온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그래, 이제 읽어 봤으니 얘기해 줄 수 있겠지? 그걸 본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순간 만수진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만으로 봤을 때, 그는 지금 맹주가 추진하는 일을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믿지 않더라도 빈도로서는 별로 상관없소이다.”
장인걸은 만수진인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본좌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맹주가 진실로 본좌와 조약 맺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밀사로 파견된 네놈조차도 조약을 맺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회의적인데, 어찌 본좌가 이따위 허무맹랑한 말에 혹하기를 바란단 말이더냐?”
장인걸의 질문에 만수진인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는 더 이상 장인걸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맹주의 명을 완수한 만큼, 이제 그는 모든 걸 다 털어 버리고 맹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건 빈도도 이해할 수 없는 바외다. 다만, 맹주께서 손수 그 서신을 빈도에게 주시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귀하에게 전하라고 명하셨기에 이리 달려왔을 뿐이오. 서신을 귀하에게 전달했으니, 빈도로서는 할 일을 다 했소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귀하의 선택일 뿐.”
“좋다. 본좌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여기에 머무르겠는가?”
순간 거절하려던 만수진인은 뭘 생각했는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답신을 가져가라는 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장인걸은 수하를 불러 만수진인에게 숙소를 마련해 줄 것과 그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라고 명했다.
만수진인이 물러간 후, 그는 편복대주에게 물었다.
“함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수룩하다 보니, 오히려 사기극이라고 치부해 버리기가 더욱 힘들구나.”
만수진인에게서 넘겨받은 서신을 세심하게 읽고 있던 편복대주는 장인걸의 물음에 서신을 슬쩍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만수진인이 이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함정이나 파겠다며 소모해 버릴 만한 인물은 아닙지요. 속하의 판단으로는 함정은 아닌 듯하옵니다. 맹주는 동맹이 체결됨과 동시에 양양성에 파견된 모든 무사들을 철수시키겠다고 했사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함정을 팔 수 있겠사옵니까?”
장인걸도 그 말에는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좌의 생각도 그래. 그게 더 이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한데…, 당최 이런 제의를 맹주가 본좌에게 하는 영문을 모르겠구먼.”
“한 가지 가능성은 그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온데…….”
장인걸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가짜라고 보기에는 무공이 너무 뛰어나.”
장인걸은 극마급 고수답게 한눈에 상대의 무공 수준을 파악해 냈다. 무당파가 자랑하는 전대의 고수답게 만수진인의 무공은 화경의 벽에 가로막힌,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의 말에 편복대주는 맹주 쪽의 제안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봤다. 만약 이게 함정이 아니라 진짜라면?
“저쪽의 제안이 진짜라고 가정해 본다면, 교주님께서는 맹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용의가 있으시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음산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게 진짜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그 전에, 너는 이게 놈들이 시간을 끌기 위한 잔꾀가 아닌지부터 철저하게 조사해 보거라.”
“존명!”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편복대주에게 조사해 보라고 명령하기는 했지만, 장인걸은 내심 이게 함정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 조약을 통해 맹주가 원하는 게 대단히 타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맹주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장차 금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지금까지 중원을 제패했었던 역대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무림을 그냥 놔둬 달라는 것이다.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양양성에서 무림연합의 고수들을 몽땅 다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 정도 요구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지. 사실, 묵가놈을 없애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림맹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은 없으니까. 먼저 함께 손 잡고 묵가놈부터 없앤 뒤 그 다음에 무림맹을 없애는 게 순서겠지.”
갑자기 장인걸은 미친 듯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크하하핫! 내 손으로 본교의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이렇게 통쾌하게 웃어 본 게 몇 년 만이던가. 지금까지 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짜증스런 것들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거야?
그렇지 않아도 무림의 세세한 움직임마저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편복대였는데, 장인걸의 새로운 지시사항들이 떨어지다 보니 더욱 바빠지게 됐다.
장인걸의 집무실에서 나온 편복대주는 수하들에게 지금까지 수집한 묵향에 대한 자료를 몽땅 다 가져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런 다음 장인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한 수색대를 편성하려고 했지만, 이게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수색해야 할 면적은 1개 성(省) 단위보다 조금 더 넓었다. 엄청나게 광활한 면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최소한의 시간 내에 수색하려면 많은 인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문제는 편복대에 여유 인력이 거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인력 충원을 위해 편복대주가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편복대주는 참모들을 모아놓고 여기저기에서 뽑아 낼 수 있는 가용 인력을 최대한 따져 봤다.
“32개 조……. 그 이상은 곤란합니다, 대주님.”
그 조들이 빠져나가서 생긴 빈틈을 인근의 조들이 메워 주기는 하겠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1개 조가 맡을 수 있는 구역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시키면, 결국에는 구멍이 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람은 강철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렇기에 정보에 있어 어느 정도 구멍이 뚫리는 걸 각오하고 빼낼 수 있는 인원의 최대치가 32개 조였던 것이다.
혹, 3~5명으로 이뤄진 각 조에서 사람을 한 명씩 차출해 새로운 조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이게 장기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작전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옳겠지만, 적을 찾아내기만 하면 끝나는 단기작전인 만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온 조를 통째로 투입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편복대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수색대를 투입한 후, 그들의 보고가 들어오기 전까지의 여유 시간을 활용해 편복대주는 묵향과 무림맹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모든 문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조사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간단했다.
‘과연 무림맹이 자신들과 비밀협약을 맺으려고 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까?’
너무 오랜 시간 집중해서 문건을 조사한 탓일까? 편복대주는 읽고 있던 문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다음 피로해진 눈을 비볐다. 그의 눈은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편복대주는 마치 자신에게 질문이라도 던지듯 중얼거렸다.
“나 같으면 이런 인물을 믿을 수 있을까? 이렇게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켜대는 인물을 말이야.”
무림맹으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겠지만, 첩자들의 조사를 토대로 앞뒤를 잘 따져 본다면 이해 못할 일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북팽가의 장로 팽선을 묵사발 낸 것이라든지, 그 후에 양양성 무림인들의 총수(總帥) 수라도제를 칩거케 만들어 버린 사건 같은 것들 말이다. 자세한 부분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십중팔구 권력 다툼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함께 살 수 없듯, 둘 사이에 알게 모르게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편복대주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왜구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는 왜 하등의 쓸모도 없는 왜구 따위를 끌어들여서 황실 및 무림맹의 의심을 자초했던 것일까? 10만이나 되는 왜구가 황도 부근을 통과한다고 하면 그걸 황실에서 기꺼이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더군다나 악비 대장군의 죽음을 둘러싸고 황군과 충돌까지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지금 황실은 묵향을 없애라며 무림맹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짓을 반복한다면 맹주가 얼마나 커다란 심적 부담을 느껴야 될지 그는 모른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짧은 인물이 교주님을 밀어 내고 반란에 성공한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편복대주. 그처럼 총명한 사내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정통 마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십만대산에서 성장한 게 아니라 장인걸이 요동 땅에서 직접 키운 인물이었으니까.
한동안 고심하던 편복대주의 머릿속에 문득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강자지존(强者之尊). 철혈을 숭상하는 마교인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사고관이다. 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지존(至尊)이 될 수 있다.
언뜻 생각해 보면 강한 단체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듯싶지만, 이건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무공밖에 모르는 무식한 인물이 지존이 되는 만큼, 효율적으로 조직을 이끈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다는 점 말이다.
일대일의 격투라면 몰라도, 집단과 집단 간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단순히 무공만의 고하로 승리를 점치기는 힘들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모사(謀士) 형태의 두뇌가 더욱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 때문에 마교는 그토록 강대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일통을 이룩하기는커녕 지금껏 저 머나먼 변방을 떠돌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 그는 본교가 배출한 최강의 고수라고 했지. 탈마의 경지를 개척한 유일한 고수.”
편복대주는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었다. 강자지존의 세계인 마교였기에 그의 반란이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아니, 그는 반란을 일으킬 필요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강자였기에, 마도를 걷는 모든 고수들이 그에게로 모여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성장한 곳이 마교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그의 반란은 절대로 성공했을 리가 없다는 게 편복대주의 생각이다. 그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무공광에게 자신의 인생을 의탁할 멍충이는 단 한 명도 찾기 힘들 테니까. 어떻게 뒤통수를 쳐서 반란에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그 문파는 곧이어 자중지란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