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3화 (629/930)

꼬리치는 여우

요즘 옥화무제는 일선의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묵향을 파멸시킬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상대는 무림 역사상 최강급에 들어간다는 고수.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씩 자신의 처지가 왜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전락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기에.

연못 속을 헤엄치고 있는 커다란 비단잉어들은 그녀의 복잡한 마음도 모른 채, 던져 주는 먹이를 먹느라 입이 찢어지도록 빠끔거리고 있는 중이다.

파드드득!

서로 간에 치열한 몸싸움까지 벌이면서 말이다.

잉어에게 먹이를 던져 주고 있던 옥화무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뒤로 총관이 다가왔다는 걸 느낀 것이다.

“무슨 일이지요? 총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태상문주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던 총관이었기에 즉각 대답했다.

“지급으로 도착한 전문입니다.”

옥화무제는 총관의 손에서 빼앗듯 전문을 받아들었다. 지급이라는 말과는 달리 전문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觸(촉)」이라는 글자였다.

총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주제넘은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되겠사옵니까? 하다못해 마교 쪽에서 행하고 있는 작전을 모두 알려 주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분께 타격을 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 정도는 본녀도 알고 있어요.”

옥화무제는 다시금 시선을 잉어들에게로 돌리며 뒷말을 이었다.

“이건 선물일 뿐이에요.”

“선물이라고 하시면……?”

“이쪽에서 정보를 알려 준다고 해도, 흑살마왕이 그걸 덥석 받아들일 것 같아요?”

“흠, 그것도 그렇군요.”

“정보 제공자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정보라도 쓸모가 없는 법이에요. 아니,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죠. 지금은 흑살마왕에게 본문과의 합작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와 서로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해요. 그와는 단 한 번도 거래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흑살마왕과 접촉할 만한 복안은 생각해 두셨습니까? 첫 접촉인데다, 그를 직접 만나 의사를 타진하려면 문주님이나 부문주님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을 것입니다.”

태상문주를 거기에서 뺀 것은 늑대굴에 그녀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무영문이었다. 그녀가 만약 장인걸에게 생포라도 당한다면 그날로 무영문은 끝장이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벼운 미소만을 지은 채, 잉어만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맹주는 아직까지도 맹을 나서지 않았나요?”

“예. 하지만 조만간에 밖으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수진인이 흑살마왕과 접촉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던 총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맹주가 맹을 나서는 이유는 당연히 장인걸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만큼, 호위도 거의 거느리지 않은 채 아주 단출하게 만날 가능성이 컸다. 장인걸은 어떨지 몰라도 맹주는 이 일을 비밀에 붙이고 싶어 할 테니까.

총관이 느끼기에는 옥화무제가 맹주를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장인걸과 접촉할 생각인 듯했다.

“직접…, 만나시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요. 한 배를 타고자 한다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 줘야죠.”

“그럼 맹주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실하게 감시하라고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예?”

“어디서 만날지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태상문주님의 혜안에는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본녀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올 테니 그리 알고 있으세요.”

“호위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으니까요.”

“예.”

“그리고 본문 전체를 대상으로 인원을 한 번 더 철저하게 점검하도록 하세요.”

어느 문파든 첩자가 끼어들 수 있기에 정기적으로 인원 점검을 행한다. 특히 무영문은 중원 최고의 정보 집단이자, 모든 것이 신비의 장막으로 감싸져 있었기에 다른 모든 정보 집단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즉시 시행하도록 모든 지단에 공문을 발송하겠습니다.”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기던 총관은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옥화무제를 바라봤다. 옥화무제는 연못을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장인걸을 만나서 뭐라고 말을 꺼낼 것인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듯…….

* * *

“흑살마왕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구먼. 그래, 만수 사질은 돌아왔느냐?”

맹주의 질문에 감찰부주는 머뭇거리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맹주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감찰부주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자가 맹주님과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원수로 지냈던 사이다. 그런 만큼 직접 만나는 것에는 커다란 위험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맹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약속 장소를 잡도록 하거라. 괜히 시간을 끌면 저쪽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맹주님. 그런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예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맹주님, 그게 아니라 호위의 규모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제야 맹주는 감찰부주가 고민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호위무사를 많이 데려가자니 비밀 유지가 힘들게 뻔하고, 그렇다고 최소한의 인원만 거느리고 가자니 아무래도 불안한 것이다.

그에 맹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호위는 필요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그자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여 천라지망(天羅之罔)이라도 치지 않는 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나 있을 것 같으냐?”

맹주의 말이 옳다. 아무리 장인걸이 많은 병력을 투입한다 해도 개개인의 실력은 아주 낮다. 퇴로만 적절히 확보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장인걸은 맹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서 뭔가 실마리를 얻었는지 감찰부주는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후, 정사의 거두들이 만났다. 장인걸은 편복대주를, 그리고 맹주는 감찰부주만을 대동한 아주 단출한 회동이었다.

“본좌는 귀하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제안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소.”

장인걸은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양양성의 잿빛 성벽을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쩌면 그는 그 순간, ‘저놈의 성만 없었다면 지금쯤 중원 전체를 짓밟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맹주는 비밀 유지 때문에 수하들을 동원하기 힘들었고, 장인걸은 주변에 양양성이라는 막강한 무력집단이 있기에 많은 수하들을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소수의 인원이 비밀리에 회담을 나누는 데 있어 이만큼 좋은 장소도 찾기 힘들 것이다.

혹시 맹주의 함정일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을 장인걸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 만남을 호쾌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겉으로야 대장부답게 받아들였겠지만, 그도 내심 약간 찝찝했는지 천마혈검대 일부를 주위에 매복시켜 놓은 상태였다. 귀식대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있는 그들을 관 속에 넣은 다음, 편복대원들이 옮겼기에 맹주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맹주는 협정서에 서명한 것을 장인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본맹은 이제부터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소이다. 양양성에서 무사들이 완전히 철수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구려.”

그 말에 장인걸은 내심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중원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혈겁이 더욱 위맹을 떨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이 며칠 전 무림맹에서 각 문파에 배송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다. 그걸 보면 맹주가 부리려는 수작이 뻔하지 않은가?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도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속에는 능구렁이가 열 마리쯤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양양성에서 무사들을 철수시킬 필요는 없소이다.”

장인걸의 말에 맹주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서로 간에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무사들을 철수시키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철수하는 건 좋지만, 그렇게 해서야 묵가놈이 본좌하고 싸우려고 들기나 하겠소?”

장인걸의 반응에 맹주는 내심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다면 장인걸은 양양성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하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 가만히 있어 달라고 요청할 거라며 교주는 예상을 했던 것이다. 장인걸과 오랜 세월 싸우다 보니 상대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모사(謀士)들 중에서 아주 뛰어난 인물이 있는 것인지…….

하지만 맹주는 시침을 뚝 떼며 자신으로서는 상대가 이런 요구를 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려. 나는 우리 쪽에서만 중립을 지키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외다.”

“기왕에 협정을 맺은 사이니, 놈을 없애기 위해 그쪽도 조금 힘을 보태 주셔야겠소.”

“알겠소. 하지만 최선을 다해 돕긴 하겠으나, 주위의 이목도 있고 하니 티 나게 돕지는 못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구려.”

“그 정도를 가지고 오해할 만큼 본좌의 속이 좁지는 않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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