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걸과 비밀회담이 끝나자마자, 맹주는 곧바로 양양성으로 향했다. 맹주가 감찰부주만을 대동한 채 양양성을 향해 출발했다는 것은 이미 무림맹 내에서도 여러 명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맹주가 맹을 나서는 이상, 그의 호위대나 최소한 몇몇 장로들에게는 행적을 알려 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마교와 달리 맹주 마음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단체는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전임 맹주였던 옥청학이 맹 밖으로 비밀리에 출타했다가 행방불명되어 버린 이후, 그 절차는 더욱 까다로워졌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을 장로들이 원치 않았던 것이다.
“맹주님이 아니십니까? 무량수불! 기별이라도 주시지 않고.”
맹주가 도착했다는 전갈에 곤륜파의 무량 대장로는 황망히 달려 나왔다.
감찰부주는 대장로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말했다.
“기밀을 요하다 보니 먼저 기별을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대장로님.”
“허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런 변방까지 맹주께서 직접 찾아 주신 점 영광입니다, 무량수불.”
“무황께서는 계십니까?”
“자, 안으로 드시지요. 이미 기별을 넣었습니다.”
곤륜무황은 맹주 일행을 반가이 맞이했다.
“이쪽은 본맹의 감찰부주를 맡고 있는 아이입니다.”
“청수(淸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곤륜무황 대협.”
“아, 그대가 맹의 대들보 중 하나인 감찰부주였구려. 어서 오시구려.”
곤륜무황은 손님들에게 차를 권한 후, 맹주에게 물었다.
“기별도 없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오이까?”
《방금 전에 흑살마왕을 만났지요.》
어기전성으로는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겉으로는 딴전을 부린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가 귀하가 보고 싶어서 왔소이다.”
이런 식으로 방금 전에 장인걸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맹주. 그런 맹주의 행동에 곤륜무황은 내심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혹 엿듣는 자가 있을 수도 있기에 신중을 기하는 것임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맹주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곤륜파 제자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전투단을 1개 운용했으면 하오. 물론 그 존재를 흑살마왕 쪽에서 의심하지 못하도록 말이오.》
맹주의 말에 곤륜무황은 별것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그거야 그렇게 하시면 되지, 왜 빈도에게 말을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양양성에서도 2천 정도를 차출해야겠기에 하는 말이외다. 그렇게 하면 양양성에 집중된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흑살마왕을 속일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니겠소?》
《그러면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소?》
그 물음에 맹주는 침중한 어조로 답변했다.
“이번에 무림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혈겁에 대한 명확한 단서를 잡았소이다.”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대화가 전개되고 있었기에 곤륜무황으로서도 그에 맞춰 대화를 전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맹주가 지금 뭘 원하는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래, 범인이 누구라고 하더이까?”
“놀랍게도 흑살마왕이 벌인 일이었소이다. 혹시나 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은 몰랐소이다. 그자의 치밀한 술수에 무림 전체가 놀아난 꼴이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맹주는 장인걸이 벌여 놓은 ‘보물찾기’라는 작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된 것인지 자세히 설명했다. 사람이 지닌 원초적인 욕망을 이용한 장인걸의 기발한 계책에 곤륜무황은 감탄을 금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해서 저들의 정체를 밝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타도하느냐 하는 것이오. 저들의 세력이 워낙 신출귀몰하다 보니 가뜩이나 적은 본맹의 무사들만 동원하기에는 벅찬 노릇이고…….”
미리 어기전성으로 양해를 구한만큼 곤륜무황도 입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연극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소이까?》
《만사불여튼튼이라 하지 않소? 그만큼 이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외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양양성에서 2천을 투입할 테니, 맹에서도 그만큼의 정예를 투입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게 좋겠구려.”
곤륜무황과 회동을 마친 후, 맹주는 양양성에 있는 각 문파의 수뇌부를 초청하여 간단한 주연을 베풀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곳에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곤륜무황만 만나고 가 버린다면 양양성에 모여 있는 각 문파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새벽, 맹주는 맹으로 돌아갔고, 곤륜무황은 각 문파의 대표자들을 소집해 맹주의 뜻을 전했다. 각 대표자들은 맹주가 2천의 정예를 모집한다는 것에 지지를 보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혈겁 때문에 은근히 찝찝함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일로 더 이상 본가가 털릴 걱정에서 해방되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우리 쪽 무사들의 통솔은 서문 가주께서 맡아 주시는 게 어떨는지요?”
곤륜무황의 제안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모두들 지휘권을 곤륜파에서 가질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떨어지자 서문세가의 장로들은 크게 감동했다.
맹주가 이곳 양양성까지 직접 행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대를 나눈 사람은 곤륜무황뿐이었다.
수라도제가 빠져나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양양성에 있는 문파들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서문세가가 이런 홀대를 받아야 하나 그들은 내심 서운해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나오자 그들은 맹주와 곤륜무황의 마음씀씀이에 크게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맹주와 만나 기분 좋은 협정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방에 알릴 수 없다는 게 장인걸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묵향 그 잡것이 알게 된다면 당장 보따리를 싸 십만대산으로 줄행랑을 칠 게 아니겠는가.
그런 기가 막힌 구경거리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게 한스러웠지만, 뭐 결국 놈의 잘린 머리통을 구경할 수 있을 테니 그 정도 욕구쯤이야 웃으며 참아 줄 수 있는 노릇이었다.
회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도중 편복대주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객잔으로 장인걸을 안내했다.
“저기서 요기를 하고 가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음식 맛이 교주님의 마음에 드실 것이옵니다.”
“앞장서거라.”
“예.”
유명한 곳인지 객잔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을 3층으로 안내했다. 객잔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호화롭게 꾸며놨고, 음식의 가격 또한 아래층에 비해 훨씬 더 비쌌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연한 초록빛 성장(盛裝)을 입은 아가씨 한 명이 걸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보기 드문 그녀의 미모에 식당 안에 앉아 있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계단 쪽으로 집중되었다. 편복대주 또한 남자였기에 그녀에게로 가는 시선을 억제하기 힘들었지만, 장인걸의 앞이라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편복대주로서는 의외였던 게, 장인걸 역시 다른 사내들처럼 아주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인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동안 미녀를 한두 명 겪어 보았겠는가. 연경으로 돌아가면 그의 저택에 수십 명의 미희(美姬)들이 줄을 지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들과 비교해서 그리 빼어난 구석도 없어 보이는데도 장인걸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의외라고 할 수밖에.
편복대주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미녀는 살풋살풋 걸어오더니 이윽고 그들의 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상황은 정녕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편복대주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그녀의 정체가 뭐기에…….
“합석을 청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왜 이 여인이 의도적으로 접근해 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편복대주는 정신이 없었지만, 장인걸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마든지.”
그녀가 자리에 앉자 장인걸은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귀하를 직접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소.”
미녀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대금제국 대원수께서 저같이 미천한 야인(野人)을 한눈에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네요.”
“누가 감히 무제(武帝)의 칭호를 얻은 사람을 미천하다고 하겠소.”
무제의 칭호를 얻었다는 말에 편복대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말은 눈앞의 이 아름다운 여인이 옥화무제라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조용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너무나도 힘들군요.”
장인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일부러 접근한 걸 보면, 비밀을 요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적 자체가 무영문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본좌를 찾아온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옥화무제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과 손을 잡고 싶어요.”
장인걸은 씨익 미소 지었다. 무림맹과 밀약을 맺은 이상, 조만간에 천하는 자신의 것이 될 게 뻔했다. 그걸 알고 이 교활한 계집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리라. 일단 상대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세인들은 무영문이 중원 최고의 정보 조직이라고 하지만, 본좌는 그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소.”
장인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화무제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라도 들었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장인걸의 인상은 일그러졌다. 자신을 비웃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웃지만 말고 얘기를 해 보시오.”
“만나기에 앞서 선물까지 드렸었는데, 그쪽에서는 그걸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정말 재미있군요. 그렇지 않나요? 편복대주.”
갑자기 옥화무제가 자신을 보며 말하자 편복대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선물이라니?”
편복대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그건 속하도 잘…….”
“워낙 정보가 어두운 것 같아서 대별산맥에 숨어 있는 묵향 교주의 위치까지 알려 드렸잖아요. 설마 그걸 자신들의 힘으로 알아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에 편복대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장인걸의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는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선물이 그 정도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
“그건 상상에 맡기겠어요. 어때요? 아직도 본문의 정보가 필요 없다는 기존의 생각에 변함이 없나요?”
“아니, 점차 구미가 당기기 시작하는군. 그것보다 그쪽에서 원하는 걸 듣기로 하지. 본좌에게 뭘 원하는 거요?”
“무공 비급이요.”
“무공 비급?”
뜻밖의 제안에 장인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정파의 심법을 익힌 상태에서 역혈심법을 추가로 익히는 건 별로 권장하는 것이 아닌데…….”
옥화무제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치는 건가요? 아니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요?”
장인걸은 진짜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편복대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쪽에서 원할 만한 비급을 보유하고 있는 게 있었나?”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개봉을 점령할 당시 황궁무고(皇宮武庫)와 비고(秘庫)에서 입수한 비급들이 있사옵니다.”
“아! 그게 있었지.”
장인걸은 시선을 옥화무제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걸 원하는 거요?”
하지만 옥화무제가 원한 건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그쪽에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쓸모가 없는 거라면 본문과의 계약 성사를 축하하는 선물 정도로는 적당할 듯하군요.”
순간 그녀에 대한 신뢰감이 조금 상승했다. 사실, 묵향을 배반할 정도라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막대한 대가를 원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장인걸은 난감하기만 했다.
“흐음…, 그것도 적지 않은 분량인데 만족하지 못하시겠다? 이거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더 배포가 크구먼.”
“황궁에서 긁어모은 비급들 중에서 쓸 만한 건 거의 없어요. 그건 그쪽에서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장인걸은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거 외에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마공 비급밖에 없소. 설마 그걸 가져다가 익히고는 제2의 천마신교라도 창립하실 생각이시오?”
옥화무제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마공 따위는 필요 없어요. 본녀가 원하는 건 십만대산에 쌓여 있는 정파의 무공 비급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귀교에서 그 무공들에 대해 연구한 자료도 원해요.”
그제야 장인걸은 상대가 원하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마교에 쌓여 있는 막대한 양의 무공 비급. 그 안에는 거의 모든 명문정파들의 절전비기들도 수두룩하다는 걸 장인걸도 알고 있었다. 무공 비급 한 권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의 생리상, 그 정도라면 충분히 모험을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흐음…, 그러니까 그 비급들을 얻기 위해 묵향을 없애는 일에 동참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구려.”
“맞아요. 묵향 교주를 없앤다면 귀하가 다시금 교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녀는 생각하고 있어요. 설마, 교주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목소리는 장인걸이 지금껏 들어왔던 그 어떤 계집의 목소리보다도 더욱 달콤했다. 장인걸은 옥화무제의 혓바닥이 간교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장인걸은 그녀의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그가 가장 원하던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