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거지로 돌아가자마자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함정을 설치하는 게 좋겠어.”
“적격지를 선정하여 최대한 빨리 보고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편복대주가 그렇게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걸은 이미 장소를 생각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는 벽면에 걸린 커다란 지도 중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설치하도록!”
장인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태산(泰山)이었다. 편복대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구태여 태산에 설치할 이유라도 있으시옵니까? 거리가 너무 멀어 그곳까지 인원과 장비를 보내려면 시간이 너무 지체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태산파가 있어. 태산파의 연공실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해라.”
그 말에 편복대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다. 태산파라면 정파의 명문들 중 하나로 한때는 9파1방에 들어갔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문파인 만큼, 문주급이 사용하는 연공실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수많은 기관진식들을 설치해 놨을 게 분명했다. 그걸 이용한다면 최소한의 시간으로도 완벽한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즉시 공사를 시작하도록 지시하겠사옵니다.”
편복대주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장인걸은 호피(虎皮)로 장식한 호화로운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좌도 귀계(鬼計)에는 꽤나 능숙하다 자신하고 있었거늘…….”
옥화무제를 만난 후 그는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계책에 능한 책사가 없었다. 편복대주는 정보의 처리에는 능했지만, 그것들을 응용해서 적을 타격할 계책을 꾸미는 것에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악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악함이 말이다.
‘그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혁무상 장로를 데리고 탈출했어야 했어. 정말이지 두고두고 후회되는구먼.’
자신이 권좌에서 밀려났던 바로 그날을 떠올리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때 저렇게 했더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자기반성. 그런 식으로 자신을 채찍질했기에 그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십만대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장인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참,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말코나 손봐줘야겠군. 크흐흣…, 감히 본좌를 가지고 놀려고 들다니. 깜찍한 놈들 같으니라구.”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향한 곳은 만수진인이 기거하고 있는 방이었다.
* * *
패력검제는 무림맹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맹주는 그의 아들을 구출하는 데 있어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지만, 며칠 동안 동정을 살펴본 결과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거의 매일 감찰부주가 찾아와 서량이 감금되어 있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다며 말해 주기는 했지만, 그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릴 만큼 그는 맹을 신뢰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이대로 기다려야만 하나?’
초조한 듯 방안을 서성거리던 패력검제의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교주도 딸을 납치당하지 않았던가. 맹주는 자신의 일이 아니니 옆집에서 난 불구경하듯 할 수 있지만, 교주는 다를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 불이 난 상태니까.
‘맹으로 올 게 아니라, 처음부터 교주에게로 갔었어야 했어. 정파에 적을 두고 있다는 그놈의 자부심이라는 게 뭔지……. 아까운 시간만 잡아먹었군.’
패력검제는 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결단을 내렸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무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달아야만 했다. 방에서 나온 직후부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 이상하군. 한 명이라도 더 투입해서 정보 수입에 힘을 쏟아야 마땅한 이때, 왜 나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패력검제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맹에서 자신을 감시할 이유를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맹에 소속된 문파와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영문과 충돌에서는 개방을 도와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문득 패력검제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소연에 대한 정보를 맹에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행해지고 있는 무림맹의 알 수 없는 행동이 이해가 갔다.
맹주는 그가 교주에게로 가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물론 감시자들의 능력으로 패력검제가 탈출하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교주의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걸 방해할 수는 있었다. 그들은 패력검제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패력검제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장인걸에게 납치당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도 시원찮을 지금, 이따위 견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패력검제는 그 길로 맹주의 집무실 쪽으로 달려가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바쁘셔서 시간을 낼 수 없으니 다음에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패력검제는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아들을 찾는 걸 도와주기는커녕, 나를 붙잡고 지금 뭐 하자는 겐가?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더냐!”
패력검제의 노성에 문사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는 윗사람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패력검제가 노성을 터뜨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진, 진정하십시오, 패력검제 대협. 제가 다시 한 번 더 윗선에 보고를 올려 면담 날짜를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됐다. 노부가 거지새끼도 아니고, 맹주를 믿은 게 잘못이지. 맹주에게 전하거라. 내 아들의 목숨은 내가 직접 구하겠다고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패력검제는 밖으로 뛰쳐나가 전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했다. 감히 현경급 고수의 뒤를 쫓을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뛰어난 경공술을 자랑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전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하자,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까마득한 점으로 화해 버렸다. 패력검제는 단숨에 무림맹을 감싸고 있는 성벽을 뛰어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뭣이? 패력검제가 뛰쳐나가 버렸다고?”
“예, 맹주님.”
“허어~, 좀 말리지 않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맹주님께 면담을 청한 다음, 그게 거부되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며 자기 아들은 자기가 직접 구하겠다고 하며 달려 나갔다 합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군. 내가 직접 찾아가서라도 그를 데려와야겠어.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느냐? 감시는 붙여 뒀겠지?”
그 말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워낙 엄청난 경공술이라 도저히 추적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애들 몇을 보내 흔적을 뒤쫓고는 있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않으심이…….”
“허허, 이거 참.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구먼. 그렇게 혼자 뛰쳐나가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저로서도 의외였습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맹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혹, 그가 교주의 혈족도 자신의 아들과 함께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게 아닐까?”
맹주의 의문에 감찰부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절대로 없습니다.”
“확신할 수 있느냐?”
“예. 그가 맹에 들어온 뒤부터 실력 있는 애들을 배치해서 24시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그동안 그와 접촉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구나.”
“어쩌면 이쪽에서 보여 준 진행 상황이 너무 지지부진한 듯하자, 속이 타서 밖으로 나가 버린 게 아닐까요? 그도 일문의 주인이고, 무림에 두터운 인맥을 쌓아 뒀을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 힘으로 어떻게라도 해 볼 생각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당장 각 문파에 협조 공문을 띄우도록 해라. 패력검제를 발견하면 맹에 알려 달라고 말이다.”
“그런 식이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우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감찰부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맹주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패력검제 아들의 행방에 대한 작은 단서를 발견했다고 말입니다. 그걸 알려 주기 위해서 그를 찾고 있는 거라고 말이지요.”
“오호,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또 하나의 덫
패력검제가 맹을 떠난 다음 날, 맹주는 생각지도 못한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옥화무제였다. 뻔뻔스럽게도 그녀가 이렇게 빨리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맹주였다.
그는 옥화무제를 일단 귀빈들이 묵는 숙소에서 기다리도록 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동안 기다리게 만들며 그녀의 애를 태울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접대를 담당한 문사가 황급히 달려와 또 다른 보고를 올렸다.
옥화무제를 귀빈용 숙소로 안내하려 하자, 그녀는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재미있는 소식 한두 가지를 알려 드릴까 하고 들렀는데, 맹주님께서 바쁘신 듯하니 그냥 가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식이라는 게 뭐지?”
보고를 들은 맹주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떤 정보이기에 감히 옥화무제가 이렇게 뻔뻔스럽게 자신을 찾아올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도록 방치할 것인가. 그녀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려면 후자가 훨씬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 역시 놓치게 된다.
고심하던 맹주는 감찰부주를 불러 그녀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했다.
“일단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리 꼴 보기 싫다 해도, 그분의 뒤에는 무영문이 있습니다. 무영문의 본거지를 파악하지 못한 이상, 그분을 홀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구먼. 봉공에게 이리 오라고 일러라.”
잠시 후, 맹주가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기별을 받은 옥화무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쁘신데 제가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허허, 무슨 그런 말을. 노부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봉공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없어도 만들어야지요.”
맹주는 옥화무제에게 자리를 권한 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종을 흔들어 시녀를 불러서는 다과를 내오라 일렀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옥화무제는 맹주에게 말했다.
“혹시 공공대사라는 분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그러자 감찰부주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지금에 이르러 공공대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맹주나 감찰부주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세인들은 불계불황(不戒佛皇)이나 만사불황(萬邪佛皇)이라는 명호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공공대사가 소림의 등불로서 추앙받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공공대사라는 명호는 무적(無敵)이라는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을 정도였다.
“불황(佛皇)의 근황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소?”
“역시 모르고 계신 모양이네요. 시간을 내 들린 보람이 있군요.”
옥화무제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공공대사가 정신을 차리셨어요. 더군다나 현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구요.”
“그, 그게 사실이오?”
그 정보가 진실이냐는 것을 묻는 맹주. 하지만 감찰부주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소 초점이 어긋난 질문을 던졌다.
“그분이 정신을 차리신 게 언제입니까? 혹, 알고 계시다면 알려 주십시오.”
“그 일이 봉문 전에 벌어진 건지, 아니면 그 후에 벌어진 건지 그게 궁금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봉문 전에 벌어진 일이에요.”
감찰부주의 얼굴에 짙은 의심이 차올랐다.
“그렇다면 말이 좀 안 되는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소림은 봉문을 선언할 필요조차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니, 소림의 봉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게 바로 그라고 들었어요. 불법만을 세우면 되지, 허황되기 그지없는 명성에 집착하여 살생을 하는 게 더욱 치욕스런 일이라고 말이에요.”
그 말에 맹주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무림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지 않소?”
“아뇨. 그건 맹주께서 하시기 나름이지요. 방장을 움직여 보세요. 소림의 법도상, 방장이 하고자 한다면 공공대사도 어쩔 수 없이 끌려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쉽겠소? 공공대사의 말에 의해 봉문까지 선택했다면서…….”
“지금 소림은 무승들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할 생각이 없다면 무승들을 다그칠 이유가 없지요.”
“허허, 참으로 놀라운 정보구려.”
정파 무림에 현경급 고수가 출현했다는 말에 맹주는 정신이 없었다. 그는 차를 음미하며, 이 정보가 가져올 맹 내의 변화에 대해 측근들과 상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전혀 떠날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미소를 짓다가, 문득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는데…, 이건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전해 드리기가 좀 그러네요.”
“기탄없이 말해 보구려. 새로운 정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교주가 주기로 했던 것 말이에요. 바로 그 비급들…….”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시오?”
“비급들을 받아 내는 데 있어서 제가 많은 무리수를 뒀던 점 깊이 사과 드려요. 뭐, 결국은 하나도 건진 게 없지만…….”
안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맹주는 옥화무제가 정중히 사과를 해 오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핫핫핫, 봉공의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맹주의 너그러우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십만대산을 관찰하던 중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지요.”
“그게 뭐요?”
“교주가 비급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게 사실이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흑살마왕만 처치해 버리면, 그에게는 더 이상 적이 없어요. 이제 곧 있으면 흑살마왕과의 대회전이 벌어질 거예요. 그런데 그는 아직까지도 비급을 전해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죠. 그렇다고 십만대산에서 비급을 실은 마차들이 출발한 것도 아니구요.”
옥화무제가 상큼한 미소를 짓는데 반해, 맹주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비급을 받아 낼 수 있다고 장로들에게 이미 공포했다. 당연히 장로들도 자신들이 소속된 각 문파의 문주들에게 이미 그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급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맹주인 자신이 교주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꼴이 되지 않겠는가.
“과연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교주가 비급을 챙겨 줄까요?”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물론이에요. 곧 있으면 모든 게 밝혀질 일인데, 제가 맹주님께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러겠어요.”
“크흠…….”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마 교주는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림일통(武林一統)을 시작할지도 몰라요.”
순간 맹주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그, 그럴 리가……?”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지금 그에게는 흑살마왕이라는 관심을 끌 대상이 있잖아요. 만약 그가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설에나 등장하는 생사경을 뚫기 위해 또다시 기나긴 연공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옥화무제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일그러진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둘러본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20년간 폐관수련을 했어요. 그동안 그는 깨달았겠죠. 더 이상 수련해 봤자 시간 낭비라는 것을 말이에요.”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단정 짓는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감찰부주가 뭔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옥화무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성급한 게 아니에요. 그는 20여 년간의 공백을 깨고 갑자기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시작한 게 바로 흑살마왕에 대한 복수였죠. 그에게 있어서 흑살마왕을 처치하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수많은 무리수를 두고 있어요. 마치 자신의 능력을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죠. 비급들의 사본을 제공하겠다는 둥, 그리고 자신들이 모든 피를 뒤집어쓸 테니 무림맹은 그저 보고만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옥화무제의 말에 맹주와 감찰부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듣다 보니 그녀의 말이 꽤나 타당했던 것이다.
“이것 하나는 단언할 수 있어요. 만약 나에게 그토록 죽이고 싶은 원수가 있다면, 절대 20년씩이나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에요. 물론 능력이 모자라서 그걸 갖추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면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20년 전부터 흑살마왕따위는 한 방에 처치해 버릴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죠. 오히려 20년씩이나 기다려 주는 바람에 흑살마왕이 다시금 재기하는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
“이제 흑살마왕을 없애고 난 후, 그는 어떻게 할까요? 십만대산으로 돌아가 얌전히 눈 구경이나 하면서 여생을 마치면 좋겠지만…, 그가 과연 그렇게 할까요? 없는 적도 만들어서 없애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무림일통이라는 말이오?”
“뭐,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뭐라 할 말은 없어요. 저는 그저 관찰자일 뿐, 무림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할 생각이에요. 무림의 위대한 절대자의 탄생을 말이죠.”
옥화무제의 말에 맹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허, 이거 참. 무량수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