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6화 (632/930)

* * *

“어서 오게, 군사.”

설민은 묵향에게 예를 올린 다음, 자리에 앉았다.

“본좌가 지시한 것에 대한 조사는 해 봤나?”

“예, 교주님.”

그는 지도에서 춘릉성(春陵城)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결전의 장소로서 속하가 추천 드리는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묵향은 지도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보기에도 그곳은 전투를 벌이기에 썩 좋은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춘릉성을 택한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

“예. 춘릉성은 대별산맥 끝단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성입니다. 전략적인…….”

이때, 홍진 장로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금나라에서 테무진에게로 황녀를 보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황녀를? 그놈 참 재주도 좋군.”

묵향은 피식 미소 지었다. 테무진 같은 인물을 매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묵향은 생각했지만, 홍진 장로의 생각은 달랐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테무진 그 망할 놈이 황녀 외에도 막대한 재물까지 요구했다는 것을 보면 진심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국에 그놈이 손을 떼면, 장인걸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질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그 촌뜨기 놈이 누구 덕분에 그렇게 세력이 커졌는데, 이제는 제법 대가리가 컸다고 배신을 하다니. 지금 당장 이팔삼 대장에게 기별을 보내 그놈을 없애 버리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홍진 장로는 길길이 뛰고 있었지만, 묵향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용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그런 하찮은 걸로 옭아맬 수는 없어.”

“하찮은 거라니요? 그놈이 해마다 받아 처먹기로 한 세폐(歲幣)만 해도 은자 10만 냥에 비단 30만 필이란 말입니다.”

묵향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그 얘기는 그만하게. 나는 그놈을 믿어.”

“뒤통수를 얻어맞고 난 다음에는 너무 늦습니다, 교주님.”

홍진 장로의 어조는 급박했지만, 묵향은 마치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맞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하세.”

묵향은 다시 설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춘릉성의 전략적 가치가 어쨌다고?”

“예. 그곳은 전략적 요충지하고는 거리가 먼 곳에 자리 잡고 있기에 성곽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은데다, 장인걸이 대군을 움직이기에 용이한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방어하기가 아주 힘든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본진을 그쪽으로 옮겼다는 걸 알게 되면 틀림없이 곧바로 달려들 겁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하고 조용히 듣고 있던 홍진 장로는 마지막 말에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춘릉성으로 거점을 옮기자는 말이 아닌가.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말이다. 순간 홍진 장로의 얼굴이 한층 더 시뻘게졌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홍진 장로는 매서운 눈초리로 설민을 노려보며 질책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망말인가! 춘릉성으로 옮기자니, 자네가 장인걸에게 뇌물을 받아먹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그런 망령된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슬이 시퍼런 어조로 뇌물 운운하자 안 그래도 심약한 설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저, 저, 저는 결코…….”

이때, 묵향이 손을 들며 단호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홍진 장로.”

“하명하십시오, 교주님. 저놈을 당장 끌어내다가 목을…….”

그러자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닐세. 그건 자네가 오해한 거야. 내가 군사에게 지시한 걸세. 장인걸과 결전을 벌이는 데 적합한 장소가 어딘가 하고 말이야. 군사가 제대로 된 장소를 찾은 것 같군. 정보를 다루는 자네조차 기겁을 할 정도로 기가 막힌 장소를 말이지.”

설민은 두려운 듯 홍진 장로의 눈치를 살피며, 묵향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거, 겉으로 봤을 때는 이쪽에 유리한 점이 단 한 개도 없는 듯 보입니다만, 자세히 파고들면 꽤나 그럴듯한 이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 있는 두 개의 강이 놓여 있는 위치가 너무나도 절묘합니다. 강폭도 그리 넓지 않고, 수심도 얕기에 장인걸 쪽에서 진격해 들어오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투에 패해서 추격을 당하는 상태로 건너기는 쉽지가 않지요.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이 일대에서 그의 대군을 완전히 전멸시켜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묵향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자정쯤 춘릉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 시간을 조정하도록 해.”

“존명.”

옆에 서 있던 홍진이 한 마디를 참견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장인걸이 기절초풍하겠군요.”

“그게 바로 본좌가 원하는 거지. 놈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을걸? 달려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말일세.”

설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결국은 걸려들 겁니다. 이런 기회는 몇 번씩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쪽에서 방어진을 구축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더 빨리 달려들 겁니다. 방어선이 갖춰지기 전에 싸우려고 들 테니까요.”

“그래, 그 말이 맞아. 자네는 지금 당장 다른 장로들에게도 이 작전을 알려 준 뒤 실수가 없도록 하게.”

“존명.”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설민이 밖으로 달려 나가자, 묵향은 홍진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테무진 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그러니 그런 곳에 신경 쓸 시간에 소연이가 감금되어 있을 만한 곳이나 좀 더 열심히 찾아봐.”

“수하들이 열심히 찾아다니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고정 첩자망이 없다 보니 입수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혹시 무영문에서 뭔가 발견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쪽도 아직까지는 알아낸 게 없다고 하더군.”

“빨리 찾아내야 할 텐데, 큰일이군요.”

“어쨌건 분발해 주게. 그 녀석과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 아이를 구출하지 못한다면…….”

묵향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어쨌건 본좌로서는 그 아이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으니 말일세. 자네만 믿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주님.”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묵향의 말이 홍진 장로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가 소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안다. 그런데 수하들을 위해 자신의 딸을 아낌없이 포기하겠다니.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는가. 홍진 장로는 그런 묵향을 향해 겨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 * *

황하 하류 남쪽에는 중원 오악(五嶽) 중 하나인 태산이 하늘이라도 뚫을 듯 우뚝 솟아 있다. 태산은 도교의 위대한 성지들 중 하나로서, 명문 중의 하나인 태산파의 요람이다.

하지만 지금 태산에는 단 한 명의 도사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있다면 삼엄한 예기를 날리며 주위를 향해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객(客)들뿐. 금나라 영토에 위치한 대부분의 문파들이 그러하듯, 태산파 역시도 금나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보금자리를 떠나 버린 것이다.

편복대주는 텅 비 어있던 이곳 태산파의 본거지를 이용해서 강력하기 짝이 없는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경에서 사용되었던 화약의 양은 3만여 근(약 11톤)이나 됐고, 거기에다 1천5백여 개의 진천뢰까지 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그 지옥에서 살아서 나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괴물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놈인 것이다.

새로운 함정을 구축함에 있어 전보다 많은 화약을 쓰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옥화무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며 장인걸에게 제안했다. 그것은 바로 깊은 땅 속으로 그를 유인한 뒤 아예 매몰시켜 버리자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초고수라고 할지라도, 깊은 땅 속에서 살아서 기어 나올 수는 없을 게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엄청난 화약 폭발의 충격까지 입은 상태라면 더더욱 불가능하리라.

편복대주는 지하 통로 곳곳에 매설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화약을 보며, 이 계책을 생각해 낸 옥화무제의 악독함에 내심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지독한 여자야. 얼마 전까지 한편이었던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악독한 계책을 생각해 내다니…….’

옥화무제가 왜 그토록 악독해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편복대주는 모르고 있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이 아니, 무영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묵향을 죽여 없애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하 통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점검을 하던 편복대주에게 공사 책임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화약의 잔여분이 예정대로 도착해 주기만 한다면 3일 정도 공기를 앞당겨 작업을 끝마칠 수 있을 겁니다, 대주님.”

“오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대원수께서도 자네의 노고에 크게 만족하실 걸세.”

“속하가 해야 할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대주님.”

“3일이라…….”

이렇게 중얼거리던 편복대주는 갑자기 공사 책임자를 쏘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빠른 건 좋지만, 부실 공사를 해서는 안 돼.”

그 말에 공사 책임자는 섭섭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주님. 제가 책임지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주님께서도 저쪽에서부터 살펴보고 오셨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6만 관에 달하는 화약을 매설했습니다만, 작은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오해하지 말게. 자네를 질책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네. 지금까지처럼 끝마무리도 깨끗하게 해 달라는 뜻이었지.”

“염려 놓으십시오, 대주님.”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내 자네를 연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힘써 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대주님.”

공사 책임자는 태산을 내려가는 편복대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그쪽을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황도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게 되다니,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일이 아니겠는가. 가정생활은 물론이고, 일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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