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7화 (633/930)

* * *

흑풍대가 양양성에서 떠나 버린 것은 미리 무림맹과 협의한 사항이었지만, 그에 대해 전혀 언질조차 받지 못했던 유광세 상장군은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주의 지원을 믿고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그였던 만큼, 그 배신감은 더욱 컸다.

“이런 망할 놈! 그렇게 자신을 믿으라고 큰소리 쳐대더니, 정작 필요할 때가 되자 슬그머니 도망을 쳐?”

순우기 장군은 길길이 뛰고 있는 유광세 상장군을 다독였다.

“고정하십시오, 상장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흑풍대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관지를 찾아가 제발 떠나지 말라고 사정까지 했었다. 훈련교두 여문덕 상장군과의 대담이 잘 성사되어, 길일을 택해 군사를 일으키는 일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중요 전력인 마교가 이탈해 버리다니.

물론, 일이 꼬이다 보면 거점을 옮길 수도 있다. 그런데 관지 장로의 말로는 황성을 치는 데 있어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유광세 상장군의 입장에서는 통한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들이 황성으로 진격할 때 흑풍대가 선두에 서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으니까.

순우기 장군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습니다. 그쪽이 배신한 것이건, 그렇지 않건, 황도를 향해 진격하는 것 외에 우리 쪽에는 그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니까요. 묵 대인이 배신을 안 했다면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만약 그가 배신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황성사의 고수들이 저희들을 추포하기 위해 달려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지금이라도 당장 군사를 일으키자고 여문덕 상장군께 기별을 넣어야…….”

이때, 짤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났다.

똑똑똑, 똑똑.

문 앞에 세워 놓은 호위군관이 보내는 신호였다. 누군가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둘의 대화는 멈췄다.

잠시 후, 밖에서 호위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각(張慤) 장군께서 상장군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드시라고 하게.”

곧이어 문이 열리며 무장(武將) 한 명이 들어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군례를 올렸다.

“상장군을 뵈오이다.”

“무슨 일인가?”

“수색대에 적의 대규모 이동이 포착되었습니다.”

그 말에 상장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놈들이 지금 진격해 들어온다면, 황도로 진격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닌가.

“적들의 진격 속도는? 언제쯤 여기에 도착할 거라고 하던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한 장각 장군의 표정에, 상장군은 짜증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놈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면서? 그러니 언제쯤 여기에 도착할 건가 그걸 묻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그런데 이상한 건 남하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동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진이라고?”

“예, 상장군.”

장각 장군은 노하구 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쭉 손가락으로 그으며 말했다.

“기마대를 앞세우고 이쪽 방향으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 그는 상장군에게 급히 말했다.

“그쪽 방향으로 가면 춘릉성이 나옵니다. 놈들은 묵 대인께서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계신 춘릉성을 공략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말에 상장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묵 대인이 자신에게 통보한 게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아닌가.

“이 기회를 노려 군사를 일으키는 게 좋겠습니다, 상장군.”

“그게 무슨 말인가?”

“금군의 주력 부대가 춘릉성으로 들어갔다면, 다시 이쪽으로 돌아서 나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도 겨우 그 정도 여유만으로 황도까지 진격한다는 것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해도 묵 대인의 세력을 단숨에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대접전을 벌이게 되겠지요. 군사를 빼려면 지금밖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묵 대인이 적의 대군을 격파해도 문제고, 또 적들이 묵 대인을 격파해도 문제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순우기 장군의 지적대로였다. 묵향이 적의 대군을 격파한다는 것은 곧 금나라의 몰락을 의미했다. 그렇게 되면 간신배 진회의 권력은 더욱 커질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적이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간신배를 일소하고 내실을 다진다면, 재기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비록 묵 대인의 전력은 전멸당하더라도, 양양성에는 무림맹에서 보내 준 강인한 무사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니까.

“좋다. 지금 당장 출동 준비를 하라 일러라.”

“옛, 장군.”

* * *

장인걸이 테무진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 준 것은, 아래쪽이 정리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장인걸은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테무진이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게 바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금나라를 침입하려는 계략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테무진은 이미 초봄에 몽고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을 대부분 정리해 버린 후였다. 그가 그렇게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군대를 일으킨 것은 아버지의 안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테무진이 금나라를 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무려 20만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맹부족들에게 금나라를 치고자 하는 것은 금나라가 자신의 요청을 들어먹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주장했다.

이미 가짜 황녀까지 올려 보낸 금 황실로서는 억울해서 팔짝 뛸 일이었지만, 테무진의 동맹부족들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짜 황녀는 이미 이팔삼 대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린 후였기에 그쪽에는 황녀 비슷하게 생긴 계집조차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경선을 돌파하는 몽고 기마대의 선두에는 묵향이 파견해 놓은 이팔삼 대장이 이끄는 자성만마대 500명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족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완전히 몽고인들처럼 행동했다. 옷은 물론이고, 무장까지도 모두 다 몽고식으로……. 은은한 마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조금 문제이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무공의 수준이 낮은 그들이었기에 마기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몽골족이 지닌 야만성과 광기라는 껍질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들이 지닌 마기가 그리 심하게 표시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이팔삼 대장 일행. 무공을 익히며 다져진 고도의 운동신경 덕분에 몽고인들이나 행할 수 있는 고난도의 기마술까지 몸에 익힌 상태였다. 몽고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질주하면, 웬만한 몽고인들조차도 그들이 한족이라는 것을 눈치 채기 힘들 정도였다.

북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장졸들 또한 금나라의 정예군이었지만, 고도의 무공을 익힌 이팔삼 일행의 돌파력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팔삼 일행은 안 그래도 뛰어난 전력을 지니고 있던 테무진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 *

함정이 설치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고 난 뒤 서둘러 돌아온 편복대주에게 기가 막힌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이 삽시간에 주둔지를 춘릉성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 옮긴 건가?”

“어제 자정쯤이었습니다.”

“이런 큰 일이 있었는데, 사전에 그 징후조차 포착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짐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없지 않습니까? 약간의 식량과 개인이 지니고 있는 병장기가 전부인데 말입니다. 짐을 챙겨 들고 떠날 준비를 완료하는 게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고 합니다.”

“교주님께 보고는 올렸나?”

“예, 편복대주님. 그 때문에 지금 전 군에 출진 명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춘릉성 주변의 지형을 확인하는 편복대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놈들이 자신들을 꾀기 위해 어딘가로 진지를 옮길 거라는 것은 옥화무제의 제보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물론 옥화무제가 전해 주는 정보를 전부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어딘가 잘못된 부분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틀린 부분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옥화무제는 편복대주에게 정보를 넘겨주면서 그 정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까지 모두 다 건네 줬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동안 편복대가 수집해 놓은 일련의 상황들과 이빨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었기에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장인걸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자신이 없는 동안 올라온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던 편복대주는 문서들 중 하나를 손에 들며 수하에게 질문했다.

“황녀 구출은 어떻게 됐나?”

“옛, 무사히 양양성을 벗어났다는 보고가 접수되었습니다. 늦어도 3일 내로 이곳으로 모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황녀가 감시를 받고 있던가?”

편복대주의 물음에 수하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놀랍게도 대주님의 말씀대로였습니다. 놈들이 워낙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었기에 그분 주위에 밀정들이 꼬여 있다는 걸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수하의 얼굴에는 편복대주가 그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입수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괜한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뒤처리는 깨끗하게 했겠지?”

“물론입니다. 그동안 황녀와 접촉했던 모든 편복대원들을 전부 다른 대원으로 교체시켰으며, 대주님께서 지적하신 거점들도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아마 두 번 다시 놈들에게 꼬리를 잡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잘했군.”

편복대주는 보고서를 들고 밖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수하에게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출진에 앞서 장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나는 교주님께 갈 테니 긴급 상황이 벌어지면 그쪽으로 연락을 하도록 해라.”

“옛.”

과연 수하의 보고대로 장인걸은 고위급 장수들과 함께 출병에 대한 세부사항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수십만의 대군이 움직여야 하는 만큼, 지시하고 의논해야 할 사항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장군들은 군례를 올린 다음, 각자 자신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기나긴 소강상태가 끝나고, 드디어 적진을 향해 진격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모든 장군들의 눈에는 전쟁에 대한 살기로 번질거렸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먼 길에 수고가 많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그래, 둥지 조성 작업은 잘되어 가고 있더냐?”

편복대주는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장인걸의 뒤편에 서 있는 호위무사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그는 갑주로 완전무장한 다음, 안면보호대까지 둘러 눈만 내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인간의 눈이 아닌 듯 싸늘한 것이 단 한 올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보면 실혼인(失魂人)인 듯 보이기도 했다.

마교 패거리들과 남양에서 대규모로 충돌한 이후, 장인걸은 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에 한탄해야 했다. 그렇다고 새로 인원을 뽑아 무공을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마교의 무공이 속성을 자랑한다고 해도 최소한 10년 이상 고련(苦練)을 해야 웬만큼 써먹을 정도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키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남은 수단은 외부의 고수를 영입하거나 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인걸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막강한 술법이 있지 않던가. 바로 마령섭혼심법 말이다. 장인걸은 그 심법을 이용해서 북부 무림을 평정하며 잡아들인 꽤 많은 숫자의 무림인들을 몽땅 다 세뇌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했다.

장인걸 혼자였다면 그들의 세뇌 작업은 불가능했겠지만, 그에게는 마공을 정점까지 익힌 천마혈검대가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마령섭혼심법을 전수했고, 천마혈검대를 이용해서 무림인들의 세뇌 작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장인걸은 실혼인들을 최후의 패(牌)로 써먹기 위해 그 존재 자체를 철저히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실혼인을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다가 배치해 놨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럼 장인걸이 손수 키운 고수들 중 하나라는 말인데…, 편복대주는 지금껏 이렇게 차가운 눈빛을 지닌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장인걸은 편복대주의 시선을 따라 뒤를 쓱 돌아본 다음, 다시금 편복대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겠구먼.”

“예, 교주님.”

“내 소개하지. 이번에 본좌의 휘하로 새로 들어온 만수라고 한다네.”

만수라는 말에 편복대주는 기겁했다.

“예에?”

장인걸은 낮은 어조로 명령했다.

“안면보호대를 벗거라.”

갑주를 입은 냉막한 표정의 무장이 안면보호대를 벗자, 그 안에서 만수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편복대주는 장인걸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도력이 높은 전대고수까지도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편복대주는 이런 사람을 자신의 상관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에 내심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겨, 경하드리옵니다, 교주님.”

“경하는 무슨……. 이런 기가 막힌 녀석을 본좌에게 선물한 맹주에게 감사해야지. 그건 그렇고, 방금 전 본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편복대주는 고개를 더 한층 깊숙이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교주님. 작업이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예정보다 2~3일 앞서 완공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잘됐군. 예정대로 그녀에게 기별을 넣도록 해라. 놈을 끌어들이라고 말이다.”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포권하며 대답했다.

“존명. 둥지가 완성되었으니 꾀꼬리를 끌어들이라는 전문을 즉시 발송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인걸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암호라고 하지만 꾀꼬리라고 하니까 소름이 끼치는군. 놈을 칭하기에는 너무 앙증맞은 것 같지 않느냐? 차라리 쥐덫과 쥐새끼라고 하는 게 적당하겠지.”

편복대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 암호명을 정한 게 저쪽인지라…….”

대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편복대주는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전서구를 날리기 위해 달려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하며 가만히 서 있는 편복대주의 표정을 살펴보던 장인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본좌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느냐?”

편복대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말이옵니다.”

“뭐가 그렇더냐?”

“그분의 제안이 너무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지요. 일전에 맹주의 경우도 그랬지 않사옵니까? 근사하게 뭔가를 주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이쪽의 뒤통수를 치려는 흉계였지 않사옵니까? 놈들의 농간에 속아 하마터면 함정에 빠질 뻔했던 걸 생각하면…….”

“본좌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조심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에 대한 그 어떤 혐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네가 직접 조사해 봤으니 잘 알 것이 아니냐? 그녀가 넘겨준 정보들 중에서 엉터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장인걸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만수진인을 바라봤다. 마령섭혼심법에 심지를 제압당한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무표정하여 전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면, 조각상을 세워 놓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만수진인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작업은 편복대주가 없을 때 진행됐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지독한 고문을 몇날 며칠 동안 계속 가해 그의 정신을 밑바닥부터 천천히 파괴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장인걸이 직접 마령섭혼심법을 시전해 그의 심지를 제압했다. 그런 다음 만수진인을 통해 묵가 놈과 맹주 사이에 뭔가 비밀스런 뒷공작이 오고 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옥화무제가 제공한 정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그게 뭐냐?”

“보관해 두고 있던 쥐약이 있지 않사옵니까. 혹, 그녀가 우리 쪽에 접근하는 이유가 바로 그걸 탈취하려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쥐약이라는 건 소연을 비롯한 인질들을 말하는 것이다.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현 상황에서 옥화무제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교활하기로는 중원에서 첫손가락에 꼽힌다는 그녀가 나중에 안 줄지도 모를 무공 비급을 위해 저렇게 전력투구하다니……. 그야말로 삼척동자라도 믿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묵 부교주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인질을 구출하기를 원할 것이옵니다. 사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인질을 구출할 수만 있다면, 그 뒤로 행할 작전은 모두 취소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럴듯하군. 현 시점에서 놈이 잃는 거라고 해 봐야 여기 있는 만수진인 한 명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는 놈의 부하도 아니니, 잃어 봤자 아쉬울 것이 전혀 없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고심하던 장인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인질에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저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리고 당장 인질들을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존명.”

“그리고 그녀에게는 쥐약을 둥지 속에 넣어 둘 거라고 알려 주도록.”

“둥지 속에 말이옵니까? 그녀가 그걸 믿을지 모르겠사옵니다. 부교주를 제어할 수 있는 최후의 패인데…….”

장인걸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안 믿는다고 해도 상관없지. 만약 이게 묵가 놈과 그년이 짜고 행하는 것이라면 놈은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게다. 그렇지 않느냐?”

“존명.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