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여 주시오
묵향은 아직 조령을 잡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장인걸 쪽 진영에 안착해 버렸으니까. 조령은 노하구로 갔다가 장인걸을 만나기 위해 춘릉성으로 갔다.
장인걸은 노하구에 10만의 방어 병력을 남겨 둔 뒤, 50만 대군을 이끌고 춘릉성 앞의 드넓은 벌판 위에 진을 쳤다. 제아무리 마교도들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중무장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쇠뇌나 투석기, 활 등 각종 장거리 투사 무기까지 두루 보유하고 있기에 가까이 접근하기조차 힘들었다.
조령은 장인걸을 만나러 들어가는 길에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춘릉성의 나지막한 성곽을 볼 수 있었다. 춘릉처럼 작은 성을 공략하기에 장인걸이 동원한 50만 대군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병사들이 세워 놓은 군막(軍幕)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조령이 도착했을 때, 장인걸은 막사 밖에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금나라에서 장인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의아하다 싶을 정도의 환대였다.
“오랜만이구나. 정말 수고가 많았다.”
조령이 황녀의 신분을 지니고 있는 만큼,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장인걸은 그녀에게 공대를 해야 옳았다. 하지만 장인걸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아구다가 황제가 되기도 전부터 그와 친분을 나눴던 사람이다. 그리고 당시 여진족을 이끌었던 오야속이 대권을 물려주려 했던 사람은 장인걸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아구다보다, 장인걸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던 것이다.
그런 장인걸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는 황녀인 조령으로부터 노사(老師)로 불렸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노사님. 아바마마의 원혼을 달래는 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장인걸은 조령과 꽤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눴다.
사실, 조령이 장인걸에게 도움이 된 것은 딱 하나. 소연을 납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뿐이었다. 그 뒤로는 오히려 놈들의 간계에 걸려들어, 엉터리 정보를 알려 줘 혼란만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실수한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해도, 소연을 납치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 대한 공로를 상쇄할 수는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장인걸이었기에 그녀에게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던 조령은 기회를 보아 진팔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허어, 네가 그 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장인걸의 말에 조령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인질로 잡아들인 아이들의 신상과 자질에 대해서는 장인걸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인질들 중에 폭풍검 서량과 설취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횡재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미끼로 만통음제와 패력검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진팔의 존재 또한 장인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령이 진팔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이미 편복대주에게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조령에게 농을 건넸다.
조령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만약 장인걸이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 오래전에 진팔을 만수진인과 같은 실혼인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라는 걸. 소연과 서량, 설취와 달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팔이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 전적으로 조령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즉각 편복대 감찰어사를 호출했다. 편복대에는 장인걸 휘하의 모든 부서들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감독하며 살펴보는 감찰부가 존재한다. 감찰어사는 감찰부 안에서 중간쯤 되는 직책이었다.
“자네는 황녀 마마를 모시고 가, 그분께서 ‘쥐약’을 만나 뵐 수 있도록 하게.”
그러면서 편복대주는 장인걸이 내준 허가서를 그에게 건넸다.
“존명!”
편복대주는 조령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찰어사가 마마를 편안히 모실 것이옵니다.”
“알겠다.”
“원하시는 일 잘 이루어지기를 빌겠사옵니다.”
“고맙구나.”
조령을 보내고 난 다음, 편복대주는 입맛이 씁쓸한지 찻물을 들이켰다. 사실 지금처럼 중요한 시점에 인질들과 다른 사람이 접촉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녀를 미행하는 인물은 없었겠지?”
“물론입니다, 대주님. 양양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 철저하게 살펴봤으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찝찝해…….”
편복대주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뭔가 생각이 났는지 급히 말했다.
“황녀에게 마차를 내주도록 해라. 노하구와 여기를 왕복하는 치중대(輜重隊)로 위장한다면, 조금 더 안심할 수 있겠지.”
이때, 수하들 중 한 명이 달려 들어오며 그에게 외쳤다.
“큰일났습니다, 대주님.”
“큰일이라니, 또 무슨 일이냐?”
“몽고 놈들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뭣이? 몽고 놈들이!”
북부전선에서 날아온 보고서였다. 며칠 전 몽고의 대군이 갑작스럽게 국경선을 돌파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경선에는 30만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테무진과 화친이 성립된 이후, 그중 20만을 남쪽 전선에서 써먹기 위해 이동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 20만이 남하하여 연경 외곽의 방어부대가 위치하고 있던 자리로 이동하고, 연경 외곽에 있던 방어부대 중 20만을 노하구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북부전선이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뒤 내린 결정이었는데…….
편복대주는 너무나도 분해서 이빨을 뿌드득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촌놈의 새끼가 감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를 우롱해?”
그는 즉시 이 사안을 장인걸에게 보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인걸에게 달려가는 도중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장인걸에게 이걸 보고해 봐야 변할 건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코앞에는 마교의 최정예들이 자리 잡고 있고, 장인걸의 대군은 그들을 반쯤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 대규모 접전이 벌어질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 가던 발길을 다시 되돌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그저 시간만 끄는 수밖에. 그 촌놈은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싸그리 쓸어버릴 테다. 으드득.”
편복대주는 북부전선에서 연경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20만 대군에게 보낼 명령서를 작성했다. 지금 당장 발길을 되돌려, 북쪽 국경선을 침범한 몽고 놈들을 막아 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연경에서 노하구로 이동 중인 20만 대군에 대해서는 연경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북부 방어군 20만을 되돌려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몽고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 *
편복대주가 붙여 준 감찰어사는 조령과 그녀의 호위무사인 쟈타르를 노하구로 안내했다. 설마 그들이 어제 자신이 떠나왔던 노하구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던 조령이었다. 그만큼 노하구는 모든 적들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는 곳이었으니까.
그들이 탄 마차는 노하구 외곽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쟈타르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저택이 다른 집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다는 게 오히려 의외였다. 뭔가 음산한 마기가 풍겨 나올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기 때문이다.
쟈타르는 그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처럼 신분을 노출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일부 황실무사들이나, 편복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마공을 익혀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쪽이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지닐 뿐더러, 단기간에 깊은 수준까지 연성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차가 멈춰 섰다. 조령을 안내해 온 감찰어사가 마차에서 내리며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조령과 함께 마차에서 내린 쟈타르가 보니, 내실로 들어가는 두 번째 대문에 배치되어 있던 경비무사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감찰어사는 품속에서 패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대주님의 명을 받들어 왔다.”
“감찰어사님, 어서 오십시오.”
“이곳의 책임자에게 안내하거라.”
“지금 즉시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문 쪽에 서 있는 경비무사들 중 한 명에게 지시했다.
“너는 안에 들어가서 조장님께 감찰어사께서 오셨다고 전해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지시를 받은 그 경비무사는 묵묵히 행동으로 지시를 이행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안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정말이지 놀라운 신법이었다. 쟈타르는 그가 보여 준 그 한 수만으로도, 그가 자신보다 훨씬 더 윗줄에 놓이는 고수임을 확신했다.
‘진팔 공자와 엇비슷한 정도의 수준!’
하지만 쟈타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궁에서는 황제가 밖으로 암행할 때 쓰기 위해 일부 정파의 내공을 익힌 고수를 키웠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높아 봤자 쟈타르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런 고수가 심부름 따위나 하러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경비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갈 때, 안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인물과 마주쳤다. 그의 경공술은 방금 전 보고를 하기 위해 달려 들어갔던 경비무사에 비교한다면 형편없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보름달과 반딧불 수준이랄까.
그렇기에 쟈타르는 그자가 책임자의 심부름꾼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소개하자 쟈타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자가 이곳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무공도 떨어지는 저런 인물이 책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감찰어사는 품속에서 명령서를 꺼내 책임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황녀 마마께서 진팔이라는 죄수와 면담을 나누시는 데 있어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라는 편복대주님의 명령서다.”
“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책임자는 조령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을 따라오시옵소서, 마마. 그자에게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본녀는 그와 개인적으로 면회를 하고 싶노라.”
조령의 말에 책임자는 난처한 듯 대꾸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규칙상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마마. 속하는 대주님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지하실에서 내보내지 말라는 명을 받았나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앞장 서거라.”
“예.”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책임자는 직접 조령을 인질들이 갇혀 있는 지하실로 안내했다.
감찰어사도 함께 따라 들어오며 책임자에게 물었다.
“죄수들의 상태에 문제는 없겠지?”
“염려 놓으십시오, 감찰어사님. 모두들 건강한 상탭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앞에도 두 명의 경비무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안으로 드시옵소서, 마마.”
조령과 감찰어사가 지하실 안으로 들어간 다음, 쟈타르도 따라 들어가려고 할 때 책임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곳에 무기를 소지한 채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쟈타르는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도(刀)를 풀어 경비무사에게 건넸다. 경비무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하게 쟈타르의 무기를 받았다.
조령은 진팔이 음산하기 짝이 없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하지만 책임자를 따라 지하실 안으로 들어서니,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른 장면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지하실은 사람들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침상에 놓여 있는 이불도 비교적 깨끗했고,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그러했다.
마침 인질 4명은 식탁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위에서 사람들이 내려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중 조령의 모습이 보이자 분노를 감추기 힘든 듯 모두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사람들의 그런 시선에 조령은 내심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뻔히 알고 있다 보니,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진팔만 만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이때, 책임자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쪽에서 얘기를 나누시옵소서.”
책임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쪽 구석에 물건들을 쌓아 마치 하나의 방처럼 만들어 놓은 곳이 보였다. 저 정도라면 진팔과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듯도 했다.
“자네, 저 안으로 들어가게.”
책임자의 지적을 받은 진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령과의 독대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잡초처럼 끈질긴 성격의 그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령은 진팔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휘장을 들춰 방 안을 살펴봤다. 침상 2개가 놓여 있고, 이불도 아주 깨끗했다. 아마 여기가 여인들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인 모양이었다.
조령은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임자에게 말했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줘서 고맙구나.”
“과찬이시옵니다, 마마.”
“내 편복대주에게 그대의 친절에 대해 전하겠노라.”
“감사하옵니다, 마마.”
조령이 방 안으로 들어간 후, 쟈타르가 그 휘장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선 것이다.
책임자는 쟈타르에게 말했다.
“마마께 시간에 구애받지 마시고 천천히 담소를 나누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감찰어사를 안내해 어디론가 가 버렸다. 아마도 이곳 현장의 경비 상황에 대해 보고하기 위함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