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 소저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시오?”
반쯤은 농담조로 이죽거린 진팔이었다. 하지만 조령의 반응에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맺히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왜 조령이 눈물을 보이는 것일까? 자신들을 팔아넘길 때는 언제고…….
“몸은 괜찮으세요?”
진팔은 수갑을 찬 손을 그녀 앞에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의 발에도 족쇄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조령은 애절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지금 당장 저를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로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요.”
조령은 자기가 금나라 황제 아구다의 딸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녀를 한낱 첩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진팔에게 그건 의외의 상황이긴 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정황들에 대해 늘어놓자, 더 이상 그녀를 증오할 수만도 없게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금지옥엽으로 성장한 황녀가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는데, 그걸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설혹, 그 대상이 자신이 되는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지긴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런 말씀을 황녀께서 저에게 하시는 이유를 묻고 싶군요.”
“그, 그건 제가 당신을 여,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구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당신에게 끌렸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무심할 수가 있죠?”
조령의 고백에 진팔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째서 저 같은 걸……?”
“당신은 너무나도 자유스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진팔은 조령의 철없는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황녀께서는 지금껏 저와 함께 계시면서 느끼셨을 거 아닙니까? 그놈의 자유라는 건 다 허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건 상관없어요. 처음에는 허상에 속아 끌렸던 것이지만, 그걸 깨달은 후에도 당신은 내 가슴 속에 남았어요. 이 세상 어떤 여인이 당신 같은 무인을 연모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말을 하던 조령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당신을 연모해요. 이런 짓을 했다고 나를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것도 다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애절한 조령의 고백에 진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명의 여자도 사귀어 보지 않은 진팔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울며 간청하고 있으니 당황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연만 아니었다면,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이 아닌가.
한참을 고민하던 진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황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황녀’라는 말에 조령의 눈에 다시금 습기가 차올랐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면 약간이라도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늘어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설취 소저와 서량 공자는 이번 일에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 둘을 지금 당장 풀어 달라는 말인 것으로 판단한 조령은 눈물을 살짝 닦으며 대답했다.
“교주만 처리되면 모두 다 풀려 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아니라는 말인가요?”
진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휘장을 살짝 옆으로 걷으며 조령에게 속삭였다.
“저쪽에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조령은 일어서서 진팔의 곁에 섰다. 그리고 휘장 틈으로 밖을 훔쳐봤다. 지하에는 4명의 하녀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각자 한 명씩의 인질들을 전담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전담하고 있는 인질의 바로 뒤에 가만히 서 있다가 뭔가 요구를 하면 바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주 성실한 하녀들인 것 같군요. 그런데 뭘 보라는 거죠?”
진팔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건 성실한 정도가 아닙니다. 저 여인들은 2개 조로서, 6시간씩 이곳에서 일한 뒤 교대로 휴식을 취하더군요. 그런데 그 6시간 동안 동료들 간에 사소한 대화라고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철두철미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너무 비정상적이지 않습니까?”
진팔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 조령이 다시 물었다.
“철저하게 교육받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죠. 저 여인들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진팔이 가리킨 여인은 방 밖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진팔을 담당했던 모양이다. 진팔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목각인형이라도 세워 놓은 것처럼…….
“저게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까?”
“…….”
“저 여인들을 잘 살펴보면 꽤나 고된 수련을 쌓은 흔적들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하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황녀께서는 혹, 마령섭혼심법이라는 것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최면술 같은 잡술은 별로…….”
“최면술 따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성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악독한 술법이 몇 가지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 마교에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마령섭혼심법이지요.”
“마령섭혼심법이라고요?”
“예. 마교가 자랑하는 저주받은 술법의 이름입니다. 대원수는 마교 출신이라고 들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
“쓸 만한 무림인들을 사로잡기만 하면 마령섭혼심법을 통해 저렇게 꼭두각시로 만들어 왔을 겁니다. 저나 다른 사람들도 다 무림에 적을 둔 이상, 언젠가는 누군가의 검에 목숨을 잃을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되는 건 싫습니다.”
진팔의 말에 조령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저는 두 사람을 탈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저 두 사람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겁니다. 저분들과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황녀께 이런 제의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만약 제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제 남은 생을 황녀님께 의탁하겠습니다.”
지하실에서 나온 조령은 책임자가 마련해 준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연모하던 진팔과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질문을 던지는 쟈타르를 향해 조령은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쟈타르는 휘장 바로 앞에 서서 다른 사람이 접근하는 걸 막았다. 그러면서 그는 조령과 진팔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마공 중에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은 사실인 듯합니다.”
설마 했었는데, 쟈타르까지 인정하자 조령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라고?”
“예. 저택 내부에 포진하고 있는 고수들의 배치가 매우 수상쩍다는 걸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저택에서 본 인물들 중 가장 무공이 뒤떨어지는 자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책임자라는 녀석이었을 겁니다.”
아마 이곳의 책임자는 편복대 출신일 가능성이 컸다. 편복대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마공을 익히기 때문이다.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데다가 위력까지도 파괴적이니 고수들의 수가 적은 장인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공을 익혀 마기를 뿌려대는 무사를 이렇게 비밀을 요해야 하는 저택에다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곳이 수상한 곳이라며 사방에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만약…, 만약에 말이야, 그들을 우리 힘으로 구출할 수는 없겠지?”
자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한 진팔이었다. 만약 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진팔은 자신을 영원히 사랑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죽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자신의 마음이 더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쟈타르의 반응은 차가웠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왜?”
“저희 둘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왜? 쟈타르는 강하잖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로서도 지하실에 있던 하녀들조차 제압할 자신이 없습니다.”
한 명씩 맞붙는다면 쟈타르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에는 하녀가 4명씩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어떻게 운 좋게 처리했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저보다 강한 고수들이 수두룩합니다.”
“만약 그 사람들의 혈도를 풀어 준다면 어떻게 되지?”
“물론 대단한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녀님께서는 제국의 반역도가 되십니다. 설마 그렇게 되길 원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
“아마 진 공자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황녀님께 그분들이 자결할 수 있도록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가능할 거 같아?”
“방금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곳에 있는 4명의 하녀조차도 제압할 자신이 없다고 말입니다. 괜한 모험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셔도 결국 진 공자는 황녀님의 손에 떨어지게 될 테니까요.”
조령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급적이면 진팔의 청을 들어 주고 싶었다. 진팔은 약속했다. 두 사람이 자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자신의 남은 생을 의탁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둘은 자신과 친분까지 주고받은 사이가 아닌가. 진팔의 부탁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의지를 상실한 꼭두각시가 될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잔인한 짓이었으니까.
“진 공자는 심지가 굳은 분이셔. 그 자신이 내 곁에 남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분을 붙잡아 둘 수는 없을 거야. 아니, 그 마령 뭐라는 술법으로 꼭두각시를 만들어 내 곁에 놔둘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그분의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한 거니까.”
쟈타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녀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