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조령은 다시 한 번 그 저택을 찾아갔다. 저택의 외곽에 있는 하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과해서 내실로 들어가려고 하면, 거기서부터는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경비무사들이 막아섰다.
어제처럼 내실로 통하는 문에는 3명의 경비가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경비무사로 변장한 편복대원이었고, 나머지는 실혼인들이었다. 편복대원은 조령이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걸 발견하자마자, 옆에 서 있던 실혼인에게 명령했다.
“조장께 황녀님이 오셨다고 전해.”
실혼인은 번개 같은 신법을 전개하여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편복대원은 조령에게 달려와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어서 오시옵소서, 황녀 마마. 자, 소인을 따라 오시옵소서.”
어제와 달리 그는 조령을 책임자가 있는 곳까지 바로 안내했다. 그런데 실혼인이 벌써 통보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쟈타르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책임자 녀석이 지하실로 안내해야만 이번 계획이 성공할 수 있는데…….
책임자의 숙소에 거의 다 다다랐을 무렵에야 책임자가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제 봤던 단정한 옷차림과는 달리 그의 의복은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고, 불장난하다 들킨 어린애 마냥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 어서 오시옵소서, 황녀 마마.”
“진팔을 다시 한 번 더 만나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자, 이리로 오시옵소서.”
그가 앞장서서 안내하자 쟈타르는 그의 뒤를 따르며 조금 열려져 있는 책임자의 방문 틈을 힐끗 바라봤다. 역시나 방 안에는 벌거벗은 여자 하나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상당히 낮이 익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로 어제 지하실에서 봤던 하녀들 중 하나였다.
순간, 쟈타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것이다. 놈이 당황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낸 만큼, 그 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더 올라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몰래 자결하는 데 가장 좋은 건 독약이다. 하지만 쟈타르에게는 독약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심장을 찌를 비수를 건네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쟈타르는 조령에게 슬쩍 2자루의 비수를 건넸다. 어제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조령에게는 무기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품속에 비수 4자루, 그리고 장화 안쪽에 각각 비수 1자루씩을 숨겨놓은 상태였다. 책임자가 몸수색을 하더라도 최소한 한두 자루는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희망을 걸고 챙겨 넣은 것이다.
역시, 책임자는 조령 일행을 지하실로 안내하면서 무기를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보인 추태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실혼녀를 상대로 성욕을 풀고 있었다는 것을 조령이 편복대주에게 고해바친다면 목이 날아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걱정에 정신이 없으니 상대방에게 무기를 뺏어야 한다는 생각이 날 리 있겠는가.
“진팔! 황녀님께서 오셨다.”
책임자는 어제 그 둘이 대화를 나눴던 칸막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시옵소서, 황녀 마마.”
그런 뒤 책임자는 진팔과 진팔을 담당하고 있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황녀 마마를 따라 들어가게. 그리고 너는 진팔이 나오기 전까지 저쪽에서 대기해.”
책임자의 명령을 받은 실혼녀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섰다. 멍한 표정으로.
바로 그때였다. 쟈타르가 움직인 것은. 쟈타르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책임자를 제압했다.
“헉!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쟈타르는 비수로 책임자의 목을 겨눈 채,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집을 풀어 한쪽 구석에 집어 던진 뒤 차가운 어조로 외쳤다.
“하녀들에게 저쪽으로 가라고 명령해라.”
책임자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럴 수는…….”
그 순간 쟈타르는 발을 들어 책임자의 발등을 콱 내리찍었다.
“크으윽!”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이, 이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여기에는 무수한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건 상관없어.”
쟈타르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비수 2자루를 꺼내 설취와 서량에게 던졌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하시오.”
빨리 자결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설취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한쪽 구석으로 물러난 실혼녀들과 책임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혹시나 하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내심 기대했던 전개였다. 실혼녀들이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명령에 따라 그냥 물러선 것이다. 만약 실혼녀들이 이런 비정상적인 명령을 받았을 때, 거부하기라도 했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텐데…….
마음을 정함과 동시에 설취는 진팔에게 외쳤다.
“진 공자, 그녀를 제압하세요.”
내공을 제압당한 상태라, 평소보다는 몸이 굼뜨게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조령 같은 하수를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진팔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갑의 사슬을 이용해서 조령의 목을 휘감았다. 갑작스런 전개에 기절초풍한 조령이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진팔은 조령의 멱줄을 틀어쥐는 데 성공했다. 진팔은 조령의 몸을 더듬어 비수들까지 빼앗았다. 비수가 손에 쥐어지자, 진팔의 표정이 한결 느긋해졌다. 아무리 내공이 없다 해도 멱줄을 베는 것은 전혀 하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진팔은 비수 한 자루를 소연에게 던졌다.
“사저!”
비수를 받아 든 소연은 쟈타르에게로 다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군다나 쟈타르는 책임자를 붙잡고 있느라 대응이 한 박자 느렸다. 그가 뭔가 대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버린 후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때, 설취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러 온 건 고맙지만, 저희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래요. 자, 저쪽으로 물러나 주세요.”
설취는 서량에게 말했다.
“서 공자, 저자를 넘겨받으세요.”
쟈타르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령의 멱줄을 움켜쥐고 있는 진팔과 그와의 사이에는 3명이 가로막고 있다. 모두들 내공이 없다고 하지만, 기본적인 실력만으로 따진다면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자들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눈은 죽음을 각오했는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판사판인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조령을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리라. 검을 꽉 쥐고 있던 쟈타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진팔은 미안한 듯 조령에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황녀님.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노련한 강호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설취의 능력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스승은 중원에서 지혜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만통음제가 아닌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쟈타르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서량이 자지했다. 서량은 비수를 책임자에게 겨누며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저 여자들에게 명령해서 우리들의 혈도를 풀라고 해라.”
“그, 그럴 수는…….”
“편복대주나 흑살마왕에게 추궁당할 게 겁나나? 하지만 그 전에 나에게 먼저 목이 떨어질 거라는 걸 명심해.”
“그럴 수는 없다!”
책임자가 순순히 이쪽이 요구하는 대로 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량은 비수를 책임자의 어깨를 푹 찔렀다. 육체적인 관점에서 지금은 책임자 쪽이 훨씬 더 강력했다. 운이 좋아 선기를 잡은 상태지만, 약간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그는 반격해 올 게 분명했다. 이럴 때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는 게 최고였다.
“크으윽!”
평소 순후하고 진중한 모습만을 보여 줬던 서량이었지만, 오늘 그는 왜 자신의 명호가 폭풍검인지를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책임자를 향하는 그의 손속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한동안 서량의 모진 고문을 당하던 책임자는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외쳤다.
“저, 저들의 혈도를 푸, 풀어 주도록 해라.”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던 실혼녀들이다. 그의 말에 미동도 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실혼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일 두 차례에 걸쳐 혈도를 점하는 작업을 직접 했던 실혼녀들이다. 해혈법을 모를 리 없었다.
혈도가 풀리자 단전에서 뻗어 나와 온 몸을 휘감아 도는 장대한 기운을 모처럼 느껴 보는 소연 일행들이었다. 워낙 오랜 시간 혈도를 제압당했던 그들이었기에, 어디 조용한 곳에서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언제 위쪽에서 다른 고수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쟈타르가 책임자에게서 빼앗아 한쪽 구석에 던져 놓은 검이 저절로 날아오르더니 서량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량은 비수를 허리춤에 찔러 넣은 다음, 그 검을 뽑아들었다.
그때 소연이 나긋한 걸음걸이로 쟈타르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죄송한 부탁이지만 도를 좀 빌렸으면 해요.”
쟈타르가 허리에 차고 있는 도는 오랑캐들이 즐겨 쓴다는 만도(蠻刀)였다. 만도는 철의 질이 떨어지는 만큼,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폭이나 두께가 아주 두껍다. 중도를 애용하던 소연이었기에, 지금 서량이 들고 있는 검에 비해 만도가 그녀의 취향에 맞았던 것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쟈타르는 말없이 자신의 도를 풀어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상당한 실력을 갖춘 고수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소연이 만도를 뺏을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능력이 없다는 것도.
모두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탈출은 생각 외로 쉬웠다. 편복대주는 외부에서 적이 쳐들어올 것에 대한 대비만 했지, 이렇게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책임자가 포로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덕분이었다.
저택에 배치되어 있는 고수들은 모두 다 실혼인이었다. 실혼인들은 편복대 1328조의 통제 하에 있었으므로, 조장이 포로가 된 마당에서 실혼인들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조장이 비켜서라고 하자, 모든 실혼인들은 마치 잘 익은 수박이라도 잘라지듯 옆으로 쫙 비켜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사이를 당당히 걸어서 도망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