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양양성이 보입니다, 사저.”
모두들 진팔이 손짓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멀리 지평선에 희미하게 성곽의 그림자가 보였다. 물론 진팔보다 훨씬 급수가 떨어지는 쟈타르나 조령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성을 바라보던 설취가 감개무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양양성이 저토록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네요.”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소연 일행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그들 가장 큰 이유는 묵향이 죽었다고 확신한 장인걸이 2차 추격대를 투입하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지만, 살아서 무사히 양양성에 돌아왔다는 것으로도 그저 감격할 뿐이었다.
“자, 빨리 갑시다.”
이때, 쟈타르가 진팔에게 애원했다.
“진 소협, 이젠 우리들을 풀어 주게.”
“함께 양양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귀하들이 우리들의 탈출을 도운 셈이니, 흑살마왕이 그대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오.”
진팔의 말에 쟈타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양성에 가도 마찬가지네. 양양성에는 교주가 있지 않나. 양양성에 돌아왔다는 것을 교주가 안 순간, 마마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그래도 금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요. 나는 약속을 천금과도 같이 여기는 사람이오. 얼마 전에 조 낭자와 했던 약속을 어길 생각이 전혀 없소.”
진팔은 조령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만약 교주가 너를 해치려 한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막아 주마.”
그 말에 소연도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동생이 보여 준 용기를 나는 잊지 않아. 우리와 함께 가.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시던 내가 지켜 줄게. 금나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안전할 거야.”
하지만 조령은 그들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진팔이 평생을 자신과 함께한다 해도, 그것은 그의 빈 껍질뿐일 거라는 것을. 진팔의 마음은 영원토록 소연을 그리워할 게 분명했다. 그런 그들의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걸 몰랐다면 몰라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은 모두가 다 불행해질 뿐이다.
“아뇨. 나는 어마마마께로 돌아갈래요. 아무리 노사께서 저를 미워하신다고 하더라도, 어마마마께서 계신 한 저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예요.”
진팔은 다시 한 번 더 양양성으로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조령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녀의 미래가 빤히 보였지만, 진팔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언제까지 여기에서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조령 일행과 헤어진 그들은 양양성을 향해 달려갔다. 깨알처럼 보이던 양양성의 성벽이 점점 더 커지더니, 나중에는 웅장한 성벽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성문 위에 있던 병사들이 진팔 일행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천마신교 교주님을 만나 뵈러 왔소.”
천마신교라는 말에 성문의 병사가 막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와 함께 성문에 서 있던 무사 한 명이 병사를 제지하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천지문의 진팔 대협이 아니시오?”
“예, 맞습니다.”
그 말에 무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무림맹 감찰부 소속으로 진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감찰부는 양양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여 감찰부주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곤륜무황이 여기에 있는 거의 모든 무사들을 거느리고 춘릉성을 향해 이동한 후에도, 감찰부원의 일부는 정보 취득을 위해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진팔은 감찰부원에게 자신들이 장인걸의 마수에서 탈출해 왔다는 것을 간단히 요약해 말해 줬다. 그 길고 긴 고생담을 성문 앞에 서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거 고생이 심하셨구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바로 성문이 열렸다. 성문 위에서 뛰어내린 감찰부원은 성문 안쪽을 가리키며 진팔에게 말했다.
“지금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교주님을 만날 수는 없을 거요.”
“어디로 가셨소?”
“흑살마왕과 대회전을 벌이기 위해 춘릉성으로 떠나셨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 그곳으로 가셨지요.”
그 말에 서량이 끼어들었다.
“제령문도 그쪽으로 갔습니까?”
“예. 곤륜무황 대협께서 이곳에 있는 모든 문파들에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금나라 오랑캐를 멸하기 위해 떨쳐 일어설 때라고 말이지요.”
얼마 전까지 장인걸의 마수에 잡혀 개고생을 했던 그들이다. 그렇기에 젊은 무사의 말만 믿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먼저 마교가 거주하던 장원에 들린 후, 그 다음은 제령문이 있는 장원으로 갔다.
하지만 젊은 무사의 말대로 장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 두 장원에만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양양성 안을 북적거리게 만들었던 그 많은 고수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사라져 버려 거리는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이때, 성문 앞에서 만났던 그 젊은 무사가 다가왔다.
“모두 춘릉성으로 가셨으니, 지금 속히 출발하신다면 머지않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참, 교주께 전해 드릴 서신이 있어 춘릉성으로 가는 전령이 있는데, 그를 따라가시면 춘릉성까지 지름길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멀리 둘러가는 것보다 시간이 꽤 절약되죠.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렇습니까? 이거 고맙습니다.”
그들은 젊은 무사의 주선으로 춘릉성으로 가는 전령과 함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전령은 경공술을 써서 인적이 없는 산길을 주파해 나갔다. 일행 모두 무공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부를 하는 인물들이었고, 그 전령은 경공술 외에는 무공이 별로 뛰어난 것 같지 않았기에, 그들은 안심하고 전령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건곤일척의 대전
인질들이 탈출했다는 보고를 입수한 편복대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멍청한 것들! 어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황녀께서…….”
“아무리 황녀를 인질로 잡았다고 해도 그렇지, 황녀 따위의 목숨과 반도의 딸의 목숨이 그 가치가 같겠느냐! 황녀 따위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연놈들을 다시 잡아들이도록 해라. 알겠느냐?”
“존명!”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다시 잡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편복대주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친 자들은 거의 절정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다. 실혼인들의 전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텅 빈 실혼인들의 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전면전이라면 몰라도 추격전에는 그리 유용하지가 못하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군. 교주님께 책망을 좀 듣는 한이 있더라도, 증원군을 파견하는 수밖에…….’
생각을 정리한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로 달려갔다. 장인걸은 집무실에 혼자 있지 않았다. 장인걸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상대는 천마혈검대주 환영비마 구양운 장로였다. 묵향과의 접전이 임박해 있는 만큼, 장인걸은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남겨 뒀던 천마혈검대원들을 모두 다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들 없이는 싸움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구양운 장로는 전사(戰士)의 모습이라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듯한 강인한 용모를 지닌 사내였다. 핏빛 혈의(血衣)를 즐겨 입는데다가, 숨이 막힐 듯한 지독한 마기까지 물씬 뿜어내다 보니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겁이 날 정도의 인물이었다.
편복대주는 구양운 장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뒤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지금 보고하기에는 때가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알아본 구양운 장로가 불러 세웠다.
“편복대주, 무슨 일인데 오다가 돌아가는 것인가?”
일순 편복대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장인걸에게 다가가 납쭉 엎드리며 사죄부터 했다. 인질들이 가증스럽게도 황녀의 목숨을 위협하여 탈출했다는 보고와 함께. 물론 보고 내용은 실제와는 많이 왜곡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하구에서 올라온 보고만으로 상황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던 편복대주로서는 그게 진실인 줄 알았다.
그리고 놈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 탈출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놈들이 탈출했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보고 내용이었고, 그놈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쓸 것인지를 빨리 결정하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구양운 장로가 끼어들었다.
“인질이라면 부교주의 딸 말인가?”
“그렇습니다.”
편복대주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그를 질책하기에 앞서 재빨리 명령부터 내렸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인 것이다.
“워더리 장군에게 출동 명령을 하달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그 연놈들을 몽땅 다 잡아들이라고 말이다!”
장인걸이 보유하고 있는 고수 집단은 둘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하루아 장군이었고, 다른 한 명이 워더리 장군이었다. 그들의 휘하에는 대략 2천 명 정도의 여진 출신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존명!”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구양운 장로가 입을 열었다.
“교주님, 차라리 제 수하들을 몇 명 보내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듯합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는 듯이.
“놈과의 전쟁이 언제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지금, 천마혈검대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는 없네.”
“허면, 워더리 장군에게 출동 명령을 전달하겠사옵니다, 교주님.”
편복대주가 장인걸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가려 할 때, 반대편에서 그의 부하가 전서 한 장을 손에 들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편복대주를 보자마자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주님, 기뻐하십시오. 적도의 수괴를 함정으로 끌어들여 매몰시켜 버렸다는 급보입니다.”
“뭣이!”
부하는 편복대주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방금 전에 입수된 전서를 전했다. 전서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방금 전 태산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간략한 보고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차후에 좀 더 자세한 보고서를 발송하겠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편복대주는 전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으면서도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기뻤던 것이다.
이때 장인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게 사실이냐?”
부하가 외치는 소리를 장인걸도 들었다. 그는 편복대주가 전서를 들고 자신에게로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편복대주는 멍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결국 장인걸은 도저히 점잖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태사의를 박차고 뛰쳐나온 것이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숙적을 없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체면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장인걸의 목소리에 편복대주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오른손의 손톱으로 자신의 왼손을 힘껏 찔렀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왼손에는 손톱이 박힌 자국이 선명히 드러났다. 이게 정녕 꿈은 아니라고 생각한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묵향 부교주를 처치했다는 보고이옵니다.”
그러면서 황급히 전서를 장인걸에게 전했지만, 장인걸은 눈살만 찌푸릴 뿐 그걸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특급 비밀 전서였기에 최상급의 복잡한 암호로 쓰여 있어 그걸 한 눈에 해독할 수 있는 인물은 편복대주를 포함하여 몇 명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뭐라고 써져 있는 것이냐?”
장인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고, 눈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편복대주는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전서를 그대로 교주에게 전하다니, 이런 실수가…….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급히 대답했다.
“태산파로 잠입한 적도들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폭사시켰다고 하옵니다. 지하 수십 장 밑에 매몰된 상황이기에 놈이 아무리 날고기는 재주를 지녔다 해도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 듯 합니다.”
“들어간 놈이 묵향이 확실하다더냐?”
“예. 연공실을 막고 있는 강철문을 파괴할 때, 그자가 묵혼검을 사용하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하옵니다.”
장인걸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흠, 묵혼검이 놈의 신물(信物)인 것은 확실하지만, 연막전술일 수도 있어.”
“물론 그렇사옵니다.”
편복대주는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 중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보면, 놈은 거의 40여 명에 가까운 절정고수들을 거느리고 태산으로 달려왔다고 하옵니다. 놈은 우선 지상부를 완전히 제압한 다음, 연공실로 향했다고 하옵니다. 일전에 교주님께도 보고를 드렸다시피, 연공실 입구는 태산파에서 설치해 놓은 1척 두께의 강철문이 막고 있지 않사옵니까? 놈이 함정 안으로 들어가기 쉽도록 하기 위해 그걸 다른 문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교주님께 여쭈었던 그 문 말이옵니다.”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나는군. 그때 본좌가 그냥 놔두라고 했었지. 입구가 너무 취약하면 오히려 놈이 의심할 수도 있다고 말이야.”
“예. 바로 그 강철문을 놈은 단 일격에 부숴 버렸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자신이라면 1척 두께의 강철문을 그렇게 부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걸 일격에?”
“예. 놈이 부수기에 앞서 화경급으로 보이는 고수 한 명이 검을 뽑아들고 문을 공격했다고 하옵니다. 무시무시한 검기가 회오리쳤지만, 문짝은 수많은 흠집만을 냈을 뿐 끄떡도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놈이 나서서 문을 한참 살펴보는 듯하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답니다. 시커먼 광택을 내뿜은 짤막한 검이라면, 놈의 신물인 묵혼검이 틀림없지 않사옵니까. 놈은 단 일격으로 강철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하옵니다. 이 정도면 그자가 부교주라는 틀림없는 증거가 아니올런지요?”
장인걸의 얼굴에 그제서야 미소가 떠올랐다. 통쾌한 광소를 터뜨리는 게 아니라, 미소로만 그치고 있었던 것은 그가 아직까지도 묵향의 죽음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 했던가. 하지만 묵향이라는 벽은 그에게 너무나도 높았었다. 감히 그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허어, 설마 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함정에 걸려들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구양운 장로가 끼어들었다.
“부교주인지 아닌지 인부들을 동원해 함정을 파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며칠 내로 결과를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장인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짓이다. 만약 놈이 귀식대법이라도 쓰며 그 속에서 질긴 명줄을 연장한 채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되겠느냐? 시체를 확인하겠다고 하다 자칫 놈의 탈출을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어.”
그 자신도 귀식대법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공기 한줌 없는 곳에서도 며칠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 구양운 장로였다.
“아, 속하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길…….”
“괜찮다. 어쨌건 놈이 그렇게 죽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이렇게 기쁜 날, 술이라도 한잔 해야겠어. 같이 한잔 하겠느냐?”
“영광입니다, 교주님.”
구양운 장로는 장인걸의 뒤를 따라 몇 발자국 가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편복대주에게 지시했다.
“참, 감패(甘覇) 대장(隊長)에게 전달해 주게. 제3대를 이끌고 지금 즉시 황성으로 가서 황제를 경호하라고 말이야. 나는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내일쯤 출발할 거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장로님.”
장인걸은 구양운 장로와 축하주라도 나눌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때, 물러나려던 편복대주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급히 장인걸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놈이 죽은 게 확실하다면 지금 당장 춘릉으로 치고 들어가야만 하옵니다, 교주님.”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놈이 죽은 이상, 남은 놈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무리해서 소모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속하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소모전이라도 벌여 준다면 오히려 좋겠사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수괴인 부교주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밑에는 뛰어난 고수들이 즐비하지 않사옵니까. 만약 부교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 중 한 명이 곧바로 교주로 등극하겠지요. 그때 새롭게 교주가 된 자가 전투를 하지 않고, 십만대산으로 철수한 다음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면 어찌되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머리통에 철퇴라도 두들겨 맞은 듯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다. 놈들이 십만대산으로 철수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었다. 이런 평지라면 혹 몰라도, 십만대산 같은 철옹성에 2만이 넘는 고수들이 틀어박힌다면 설혹 500만 대군을 동원한다 해도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좋은 지적을 해 주었다. 지금 당장 장수들에게 출진 명령을 내려라.”
“존명!”
편복대주가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양운 장로는 시선을 장인걸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속하도 남아서 싸워도 괜찮겠습니까? 연경에서의 생활은 너무 지루해서…….”
“좋을 대로 하게. 아무래도 놈들을 쉽게 흡수하기는 힘들 테니, 자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속하가 교주님께 도움이 된다니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핫핫핫, 자네가 내 옆에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나.”
기분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장인걸의 얼굴에는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간 듯 한없이 밝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