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반전
춘릉성 앞의 벌판이 잘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무영문의 「감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일대의 감시를 무영문 쪽에서 해 주겠다고 통보를 해 온 상태였기에, 홍진 장로는 그곳에 비마대 요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는데, 손을 덜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말이다.
그런데 그 감시소라는 곳이 꽤나 수상쩍었다. 무영문의 요원 몇 명이 숨어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어야 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꽤나 널찍해 보이는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주위에서 베어 온 나무나 풀로 아주 세심하게 천막을 위장해 놨기에, 산 밑에서 봐서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묵향의 몰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옥화무제는 여기에서 묵으며 묵향과 장인걸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녀에게 장인걸 쪽 진영에서 전서가 날아왔다. 태산에 파둔 함정에 묵향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에 옥화무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과 무영문에 위해를 가하려던 적을 드디어 없애 버린 것이다. 3중으로 함정을 준비했었는데, 겨우 1단계에 걸려 죽어 버렸다는 게 오히려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옥화무제는 함께 있던 비영단주에게 명령했다.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어요. 본문으로 철수할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예, 태상문주님.”
비영단주는 곧바로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철수 준비를 해라. 본문으로 돌아간다.”
“옛!”
천막을 걷고,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바쁘게 비영단원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 밑에서 커다란 전고(戰鼓)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둥!
옥화무제가 산 밑을 내려다보니, 장인걸의 대군이 출진하여 춘릉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옥화무제는 철수 준비를 하고 있는 비영단원에게 명령했다.
“그 의자 좀 이리로 가져오세요.”
“옛!”
근심이 사라져서인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옥화무제는 의자에 앉은 뒤 비영단주에게 말했다.
“단주도 이리로 오세요.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놔두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비영단주는 옥화무제가 앉아 있는 자리에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간단한 다과와 술도 가져오라 했다.
50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이 일사분란하게 춘릉성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마교와의 치열한 공방전도 박진감 넘치는 구경거리였다. 이름값에 걸맞게 마교도들의 무공은 엄청난 것이었고, 거의 학살극에 가까울 정도로 금군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금군 또한 사기를 유지하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걸 보며 옥화무제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의 갑작스런 죽음을 이용해 장인걸이 그의 세력을 흡수해 버리는 것이 옥화무제가 가장 우려했던 점이었다. 안 그래도 금나라를 등에 업고 있어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그에게 그것은 날개를 달아 주는격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의 힘으로도 장인걸을 상대하는 게 버거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옥화무제의 생각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아무리 지금 장인걸과 자신이 손을 잡았다고 해도, 그가 너무 큰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옥화무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마교를 간신히 이긴 금나라가 무림맹과 싸워 서로 양패구상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무림에는 무영문에 위협을 가할 만한 세력이나 고수가 다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마교의 잔당들과 장인걸이 대회전을 벌이며 서로의 세력을 갉아먹고 있으니 옥화무제가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마교의 잔당들은 장인걸의 대군을 상대로 기대 이상으로 분전하고 있었다. 과연 마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옥화무제가 감탄사를 흘리고 있을 때, 마교의 잔당들은 장인걸의 본진을 향해 계속적으로 뚫고 들어갔다.
“정말 놀랍습니다, 태상문주님. 갑작스런 교주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땅에 떨어졌을 텐데도 저런 괴력을 발휘하다니.”
“저들이 아직 교주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하던 옥화무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옥화무제는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저들의 능력이 좋아서 뚫고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저 뒤쪽을 보세요. 장인걸의 본진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장인걸의 유인책에 말려들고 있는 거란 말씀이십니까?”
“아쉽게도……. 아마 저들이 본진에 도착하는 순간, 그때 장인걸은 승부수를 던지겠죠. 저 막강한 전력을 없애기보다는 흡수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비영단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 되었군요.”
“그래도 저 정도라도 싸워 준 게 어디에요? 장인걸의 부하들도 많이 죽었지만, 마교도들도 꽤나 죽었잖아요. 그 정도로 만족해야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결국 마교의 선봉대는 장인걸의 본진까지 뚫고 들어갔다. 순간, 옥화무제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과연 장인걸이 자신의 예상대로 마교의 잔당들을 흡수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질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변수가 등장할까. 그녀는 저들이 장인걸의 휘하로 그대로 흡수되기 보다는 뭔가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바람대로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바로 묵향이라고 하는……. 묵향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옥화무제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변수를 원하기는 했지만, 그 대상이 묵향이라면 차라리 장인걸이 마교의 잔당을 흡수하는 게 나았다.
“아니! 저, 저자가 어찌 살아 있단 말입니까?”
옥화무제는 거칠게 술을 따라서 단숨에 마신 뒤 씨근거렸다.
“우리 모두가 속았다는 말이죠. 저 능구렁이 같은 자식한테!”
장인걸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그녀는 이빨을 뽀드득 갈았다. 묵향이 비록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기는 했지만, 계략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내심 중원 제일이라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다니.
위에서 내려다보니, 진형을 구축하며 마교도들의 앞을 막아서는 1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2진 무사들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마교를 막아서는 것은 1진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까지 이 혼전에 끼어들면서 전장은 피아를 구분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도 전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묵향이었다. 장인걸의 본진과 접촉하기 전까지 묵향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었지만, 그가 앞으로 나서자 무시무시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과연 무림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자다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영단주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교주의 무공은 놀랍기 그지없군요. 어찌 사람이 저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꼭 없애야만 하는 거예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놀라운 고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는 여기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잠시 전장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옥화무제는 비영단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맹주는 지금 어디에 있죠?”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동 속도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늦어도 1시진 이내에 도착할 겁니다.”
“곤륜무황은요?”
“곤륜무황 또한 거의 비슷한 시간쯤에 도착할 겁니다.”
비영단주는 높직한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저쯤에서 합류할 듯싶습니다. 저 산 뒤편이라면 다수의 무인들이 매복하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공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숨어서 전장을 관찰하기에도 더없이 좋을 테니까요.”
“청소는 깨끗하게 해 놨겠죠?”
비영단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하하핫,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상문주님. 그쪽은 물론이고, 이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비마대원들을 깨끗하게 소탕했습니다.”
“그걸 교주가 눈치 채지 못해야 할 텐데…….”
“하하핫,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태상문주님. 이런 난리통에 어떻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교주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첩자망이 와해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홍진 장로가 이끄는 비마대도 꽤나 훌륭한 정보 단체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이없이 무영문도들에게 소탕당한 것은, 방금 전까지 무영문도들과 협동하여 장인걸을 상대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서로가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무영문 쪽에서는 비마대에 대한 모든 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영문 쪽에서 배신의 칼날을 들이댔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믿고 있던 동료에게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두들겨 맞았기에 비마대원들은 미처 대비할 겨를조차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마대가 완전히 소탕된 그 빈 공간으로 맹주와 곤륜무황이 거느린 2개 집단이 이동했으니, 그걸 묵향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옥화무제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산 쪽을 힐끔 바라봤다. 맹주라면 자신의 근심을 날려 보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지금과 같이 묵향이 소모전을 계속 펼쳐 준다면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묵향에게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지만, 장인걸은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묵향이라는 거목 하나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는데, 그에게는 우수한 부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마 지금 그에게 묵향이 거느리고 있는 정도 수준의 부하들이 있었다면, 승패가 어떻게 갈렸을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장인걸 휘하의 고수들이 지닌바 능력 이상으로 선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마교 쪽으로 전세가 기울고 있었다. 장인걸이 사용하는 전술이 매우 악랄한 것이기는 했지만, 묵향의 부하들이 그 전술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일선에서 묵향의 부하들과 격전을 벌이던 실혼인들이 이제 거의 다 죽어 버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예상보다 적이 훨씬 더 강합니다, 교주님.”
보고를 듣는 와중에도 적을 향해 직접 화살을 날리는 장인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전투 시작 전에 보였던 자신감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그는 마교의 평균적인 전력을 한영성 교주가 있던 그 시절로 잡고, 모든 작전을 세웠었다. 하지만 막상 부딪치고 보니 그보다 훨씬 더 강했다. 지금 마교가 지닌 전력은 어쩌면 역대 최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적을 처음부터 밀어붙이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방치한 것이야말로 장인걸이 한 최악의 실수였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총력전이다! 수하들에게도 제령단을 복용시켜라.”
“존명!”
장인걸은 직속 수하들에게만은 제령단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까.
장인걸의 직속 부하들까지 제령단을 복용했음에도 전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치열하던 전장은 한눈조차 팔 겨를이 없을 정도로 더욱 흉험하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