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릉성 전투의 종결
“으드득!”
전투를 지켜보던 옥화무제는 예상 외로 상황이 흘러가자 이를 갈며 분해했다. 압도적인 병력을 지니고 있는 장인걸이 이토록 허망하게 깨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최소한 양패구상이라도 해줄 줄 알았던 공공대사는 비무 후,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며 왜 공력을 전패한 뒤 떠난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허망했던 건 마교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린 무림맹의 행태였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 마교를 깨부술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더 이상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옥화무제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뭘 봤는지 일순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저, 저놈은 진팔?”
진팔의 갑작스런 등장에 옥화무제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진팔이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안력을 돋워 다시 봤지만 감찰부주 뒤에 끌려나와 있는 사람은 분명 진팔이었다.
진팔을 인질로 감찰부주가 교주를 위협하다니,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지식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옥화무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영단주에게 다급히 물었다.
“분명 쥐약은 둥지에 넣어 뒀다고 하지 않았나요?”
비영단주는 잠시 궁리하더니 곧 대답했다.
“쥐약에 다른 인질들까지 포함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교주를 제어할 수 있는 인질은 소연이라는 여아(女兒)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아니에요. 진팔이 저기에 있다는 말은 다른 인질들도 둥지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에요. 만약 흑살마왕이 선물로 맹주에게 넘겨준 게 아니라면, 자력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소연이 역시 둥지를 탈출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가 없어요. 아, 이럴 때가 아니죠.”
옥화무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쏜살같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옥화무제의 뒤를 비영단주가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태상문주님.”
“소연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반드시 우리가 먼저 나머지 인질들을 찾아내야 해요. 안 그래도 소중한 인질들을 그렇듯 허망하게 소모해 버렸다는 게 내심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건만…….”
다급한 옥화무제의 말에 비영단주도 곧 깨달았다. 이제 무영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소연이를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감찰부주가 슬쩍 손짓을 하자, 감찰부원들이 어떤 사내를 질질 끌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옷 여기저기에는 검붉은 선혈들이 묻어 있었고, 몇 군데는 찢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묵향은 뭔가에 머리를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 사내는 바로 진팔이었다.
장인걸은 분명히 소연이를 연공관에 가둬 뒀었다고 대답했던 만큼, 진팔이가 살아 있다는 게 그리 의외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인걸의 진영에 잡혀 있어야 할 진팔이 맹주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은 전혀 의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묵향의 뇌리에는 희뿌연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혹, 소연이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그 아이를 장인걸에게서 구출해 낸 것인가?”
묵향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을 보며, 감찰부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오.>
감찰부주의 전음과는 달리 진팔은 아니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뭔가 얘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목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저 아이 말고 다른 아이들도 있었을 텐데……. 만통 형님의 제자 설취라든지…….”
<다른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모두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으니 말이오.>
감찰부주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묵향으로서는 꼭 진팔을 살려야만 할 필요성이 없어진 셈이었으니까.
묵향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런 그의 속셈을 알 리 없는 감찰부주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전음을 다시 날렸다.
<혈족의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이쯤에서 전투를 종료하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감찰부주가 조심스럽게 전음으로 의사를 타진한 것은 자신의 말을 이곳에 모여 있는 군웅들이 들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지시를 받았는지 갑자기 감찰부원들이 꽁꽁 묶여 있는 진팔을 거칠게 땅에 꿇어앉게 만든 후, 검을 뽑아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마치 금방이라도 목을 날려 버리려는 듯 말이다.
묵향을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었겠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눈살을 찌푸린 묵향이 갑자기 주위의 군웅들이 모두 다 들으라는 듯 아주 큰 소리로 소리쳤기 때문이다.
“양양성에 있을 때 내가 잘 대해 준 아이이긴 하지만, 그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잡는다고 본좌를 굴복시킬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래, 죽일 테면 죽여라!”
감찰부주의 얼굴이 일순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설마 묵향이 이렇게 고자세로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진팔을 위해 그토록 엄청난 손해를 감수했던 교주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진팔을 위협해 무릎을 꿇리기는 힘들지 몰라도, 최소한 협상의 주도권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혈육을 죽이라고 하다니. 그동안 무림에 알려진 대로 교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는 말인가?
감찰부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묵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진팔아, 네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지만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줄 테니 편히 눈을 감도록 하거라.”
갑작스런 묵향의 말에 진팔의 두 눈이 황당함으로 휘둥그레졌다. 묵향의 얼굴에 살짝 비웃음까지 어려 있는 걸 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지금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는가.
“야, 이 가증스런 새끼야!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냐?”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쏴주고 싶었지만, 진팔은 지금 아혈이 제압당한 상태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리로 끌려오기 전, 감찰부원이 그의 아혈을 미리 제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비록 작지만 천지문은 무림맹 소속이다. 진팔을 인질로 해서 마교 교주를 위협하는 걸 다른 무림동도들이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아혈을 제압해 진실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묵향은 보기 좋게 역이용한 것이다. 감찰부주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묵향은 분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수하들에게 외쳤다.
“저 인면수심의 쓰레기들을 아예 중원에서 말살해 버려라. 모두 돌격하라!”
몇몇은 인질로 잡힌 채 꿇어앉아 있는 사내가 진팔이라는 것을 알아봤지만, 대부분의 부하들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꽤나 고강한 무공을 지닌 듯 보이는 도사가 사내의 목숨을 위협하며 교주를 윽박지르려 하고 있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정파라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이 감히 교주님을 상대로 저런 비열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니……. 모두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교주가 돌격명령을 내리니, 부하들은 용기백배하여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교주님께서 명령하셨다. 모두들 돌격!”
“수라마참대는 나를 따르라!”
“천랑대는 나를 따르라!”
“호법원은 교주님을 호위하라!”
“우와아아아!”
넘쳐흐르는 살기와 함께 괴성을 질러대며 돌진해 들어오는 마교도들을 바라보는 감찰부주의 안색은 썩은 돼지의 그것마냥 순식간에 푸르딩딩해졌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이, 이러면 안 되는 것인데…….”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묵향은 현경의 고수라는 칭호에 걸맞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들어왔다.
하지만 묵향보다 먼저 날아온 게 있었다. 묵향이 쏘아 보낸 10개의 자그마한 원구들. 공공대사와의 접전에서 이게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지닌 압축된 강기 덩어리라는 것을 이미 견식한 상태였다.
원구들은 빠르게 맹주와 그의 주변에 서 있던 핵심고수들을 향해 날아왔다. 감찰부주 역시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히익!”
맹주와 주변에 서 있던 고수들은 즉각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원구에 공격을 퍼부었다. 가까이 접근한 다음에는 늦는다. 공공대사가 그렇게 했듯, 원구가 가까이 접근해 오기 전에 파괴해 버리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예상 외의 상황 전개에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맹주는 급히 마음을 다잡고, 허리에 차고 있던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을 뽑아들었다. 빙백수룡검은 뽑히자마자 찬란한 빛을 뿜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림 십대기병의 서열 5위를 차지하고 있는 보검답게, 이기어검술에 의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빙백수룡검의 모습은 마치 찬란한 빛을 뿜으며 날아가는 한 마리 빙룡처럼 아름다웠다.
찬란한 빛무리를 뿜어내는 빙백수룡검과 묵향이 쏘아 보낸 원구가 맞부딪치는 순간, 무시무시한 대폭발이 사위를 진동시켰다.
콰콰쾅!
맹주는 10개의 원구를 모두 다 파괴하려 했지만, 그건 역부족이었다. 예상보다 각각의 원구가 지닌 파괴력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강기를 저토록 작은 공간에 압축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 위력은 맹주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맹주 외에 다른 고수들 또한 원구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날렸다. 공공대사가 싸울 때를 미루어 봤을 때,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눈치 챘던 것이다.
하지만 공공대사가 강기를 뿜어 잘도 파괴시켰던 원구 덩어리들이, 자신들이 쏘아낸 공격을 꿰뚫고 계속 날아들어 오는 모습에는 모두들 혼비백산해야 했다.
그 중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로 검을 날린 자들만이 원구를 겨우 막아 냈을 뿐이다. 아니, 원구와 함께 검이 폭발해 버려 검이 조각조각 쇳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봐야 했다.
이때, 운 나쁘게도 원구 공격에 노출된 3명 중 한 명이 바로 감찰부주였다. 그는 검술의 명가 무당파의 전대고수답게 어기동검술의 달인이었지만, 진팔의 목숨을 붙들고 교주를 위협하느라 검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코앞에 다다른 원구에 사색이 된 감찰부주는 급한 마음에 진팔을 들어 올려 원구에 들이댔다. 설마 자신의 혈육을 죽이겠냐 싶었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원구는 곡선을 그리며 반원을 그리더니 감찰부주의 뒤편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감찰부주는 이번에도 진팔을 붙잡아 뒤쪽에서 날아오는 원구를 막았다.
다급했던 감찰부주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앞쪽으로 놓여 있던 진팔의 얼굴이 뒤쪽에 서 있던 군웅들을 향해 훤히 드러나게 되어 버린 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진팔은 나름 꽤나 유명한 사내였다. 그의 얼굴을 모른다면, 양양성에 가 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금나라와의 방어전에서 상당한 실력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마교 교주와 대놓고 비무까지 벌인 유일한 사내가 아닌가. 정파이면서도 마교 교주의 총애를 흠뻑 받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라, 각 문파에서 그를 예의 주시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니, 저건 진팔이 아냐?”
그를 알아본 누군가가 외쳤고, 곧이어 그에 찬동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맞아, 진팔이다.”
진팔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그들은 사태의 전말을 대충이나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곳에 올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다들 흉험한 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척 보니 감찰부주가 진팔을 붙잡고 교주를 협박했고, 교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진팔을 붙잡아서는 방패막이로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된 무림맹 고수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대의명분으로 살아가는 집단이 바로 정파였다. 아무리 교주를 상대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무림맹 감찰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인질을 잡고 협박을 하다니.
더군다나 지금은 인간방패로 쓰는 치졸함까지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뒷덜미를 잡고 있는 인간방패는 마교도도 아니고, 정파인이지 않은가.
그제서야 중인들은 소림이나 곤륜파가 왜 떠나 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맹주에 대한 실망이리라. 과거에는 마교와의 싸움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듯한 명분은커녕 악취가 풀풀 풍길 정도였다.
이 중 몇몇 문파의 수장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침을 뱉으며 휘하 문도들에게 외쳤다.
“에잇, 퉤퉤! 이런 추잡한 짓을 벌이다니. 철수한다!”
처음 한두 문파가 철수를 결정하자, 삽시간에 대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가장 앞쪽에서 마교와 싸우고 있던 무림맹 직속의 정예무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마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정파 무사들이 그 뒤를 받쳐줄 줄 알았는데 모두들 떠나 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곧 동요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도망치기까지 했다.
결국에는 맹주 이하 무림맹의 핵심고수들 역시 교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모두 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진팔을 붙잡고 있던 감찰부주는 교주가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만을 쫓아오자 진팔을 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그것도 교묘하게 진팔을 있는 힘껏 커다란 바위 쪽으로 내던짐으로써, 교주가 그를 받으러 달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반대편을 향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진팔은 바윗덩이를 향해 자신이 내동댕이쳐지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자신을 향해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바윗덩이를 바라볼 담량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곧이어 머리통이 박살나며 이승을 하직하게 되리라.
감찰부주가 자신을 바위 쪽으로 던진 이유야 뻔했지만, 교주가 구해 주려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알고 있는 교주라면 자신의 죽음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감찰부주를 쫓아갈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런 떠그랄! 하고 많은 죽음 중에서 바위에 대가리를 처박는 꼴사나운 죽임을 당하게 될 줄이야. 사저, 사랑했습니다. 다음에 태어나면 꼭 사저와…….’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 자신을 붙잡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진팔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교주가 서 있었다.
‘서, 설마 감찰부주를 놔주고, 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왔다는 건가?’
묵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어, 그동안 수고했다. 지금만큼 네 녀석을 살려둔 보람을 느낀 적도 없는 것 같구나. 그래, 소연이는 어떻게 됐느냐?”
어느새 아혈을 풀어 줬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진팔은 묵향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예전에 하도 많이 두들겨 맞다 보니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다.
“사저께서는 저쪽 산 뒤편에 있는 천막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요. 저만 이쪽으로 끌려나온 겁니다.”
진팔의 대답에 묵향의 마음은 기쁨으로 인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설마 그게 사실이 될 줄이야. 소연이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개새끼! 감히 본좌를 속여?”
묵향의 갑작스런 외침에 진팔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묵향의 얼굴 가득 피어오르고 있는 환희의 미소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이라니까요. 거기 가 보시면 금방 아실 건데, 제가 어찌 감히 교주님을 속이겠습니…….”
하지만 진팔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주위의 풍경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대답을 채 듣지도 않은 묵향이 진팔을 안은 채 전속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진팔은 세차게 밀어닥치는 풍압으로 인해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그도 나름 경공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그리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과신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산을 넘어온 묵향이 소리쳤다.
“천막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에 재빨리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진팔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깁니다.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시면 보일 겁니다.”
이때, 소연을 찾기 위해 산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던 옥화무제와 비영단주는 묵향의 갑작스런 등장에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의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소연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묵향이 이미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더 이상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묵향의 모습을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경공을 전개해 도망쳐 버렸다.
감찰부주는 인질들이 행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뛸까 두려워 숲 속 으슥한 곳에다 감금해 두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던지라 후방으로 빼돌리지는 못하고 감금해 놓은 천막 주위를 나무로 위장하는 정도로 조치를 끝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급한 옥화무제는 그들을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