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반대로 겨누다
추밀사 섭평은 여문덕 상장군 등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황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한 바로 그날, 연공공을 만났다.
가벼운 대화를 하며 틈을 엿보던 섭평은 연공공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을 밝혔다.
“오늘 유광세 상장군과 여문덕 상장군이 거병할 겁니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연공공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거병(擧兵)이라 함은 병사를 일으킨다는 말인데, 상당히 애매모호한 표현이었다.
“금나라로 쳐들어간다는 말이오?”
봄이 되면 금나라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것은 악비 대장군의 작전이었다. 물론 그러다가 목이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그가 죽자, 자연히 그가 세웠던 작전 또한 폐기되었다.
섭평은 씨익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어서는 차향을 음미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실내에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목표는 황성입니다.”
그 순간 연공공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추밀사.”
“자자, 진정하십시오, 공공. 며칠 후면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아니, 황성사와 연결되어 계시니 그 전에 먼저 아시게 되겠군요.”
슬며시 자리에 앉는 연공공. 물론 상대의 기선에 제압당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섭평은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공공이 곧장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은, 섭평이 뭘 믿고 여기 와서 그딴 소리를 하는지 그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공공이 황성사의 수장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섭평이 알게 된 것은 교주와 얽힌 직후였다. 형부에 수감되어 있던 독두개를 황성사에서 나온 인물들이 상대하는 그 순간, 연공공이 지닌 또 하나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저지른 연공공의 실수였지만 말이다.
섭평이 자신의 또 하나의 신분을 어찌 알았건 그건 관심이 없는 연공공이다. 그는 평소에는 잘 짓지 않던 냉혹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잘 알고 있는 그대가 굳이 호랑이 아가리 앞에 머리를 들이미는 이유가 뭐요?”
황성사가 하는 일이 바로 황실에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발본색원(拔本塞源) 아니던가.
“공공의 도움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공공은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헛웃음을 뿌렸다.
“하핫! 농이 심하시구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부(武夫)들의 세상이 되는 걸 바라시는 겁니까? 머릿속에 든 것은 없지만, 모두들 전쟁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자들이지요. 더군다나 그들의 휘하에는 40만이나 되는 대병력까지 있습니다. 설혹, 진압에 성공한다고 해도, 제국의 기반마저 뒤틀릴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는 연공공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크흠…….”
“만약 연공공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반군의 수뇌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들의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공공과 저의 세상 말입니다.”
우리들의 세상이라는 말에 연공공의 눈이 번쩍 빛난다. 천하를 쥘 수 있다는 말에 욕심이 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곧이어 연공공은 의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반란에 성공하는 순간, 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쥐어지게 되겠지요. 그런 그들을 무슨 수로 제어할 셈이시오?”
“주모자들 중 한 명인 여문덕 상장군과 제가 가깝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를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맹세까지 받았지요. 그를 이용하면 됩니다.”
섭평이 쥐고 있는 패가 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마, 오늘 거병하겠다는 것도 그를 통해 알아냈을 것이다.
“흐음…, 여문덕이라…….”
아무런 말이 없던 연공공은 한참 후에야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공공. 하지만 빨리 결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섭평이 돌아가고 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연공공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은 감히 발걸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차를 가져 오너라.”
연공공의 명령에 환관은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그런 다음 연공공의 옆에 다소곳한 자세로 자리 잡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툭 내던진 연공공의 물음에 환관은 살짝 고개를 조아리며 간드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사료되옵니다, 공공.”
“흠…, 그건 그렇지.”
연공공은 찻잔을 들어 향긋한 차향을 음미한 다음, 조금 마셨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문제는 지금 추밀사를 없앤다 해도 너무 늦었다는 거야.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킨 장수들을 몽땅 다 한꺼번에 없앤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고.”
“모두는 힘들겠지만 주동자 두셋 정도라면 충분히 암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정도는 본관도 알고 있느니!”
연공공의 말에 환관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동자 몇 명을 암살한다고 해서 무마될 단계는 이미 지나 버렸다. 일단 병력을 일으킨 후에는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장수들도 잘 알고 있다. 도중에 그만둔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군이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주동자 몇 명 죽는다고 해서 그들이 그만둘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없어짐으로 인해 장수들을 통제하기만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일단은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가……?’
고심하던 연공공은 환관에게 명령했다.
“추밀사에게 호위를 몇 명 붙여 놔라.”
“그리 하겠사옵니다.”
뾰족한 수가 없는 이상, 일단은 몸을 웅크리며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성은 발칵 뒤집혔다. 반란군의 규모는 무려 35만! 황성을 수비하고 있는 황군이 제아무리 정예라고 하지만 그 수가 겨우 5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조정대신들은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선봉군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맹장으로 이름 높은 유광세 상장군이다. 그는 조정이 대비책을 갖출 시간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거병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황도를 향해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각이 아쉬운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진회는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썩어빠진 관료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허둥댈 뿐이었다.
몇몇 고관들은 일찌감치 야반도주를 해 버린 상태였고, 대부분은 눈치만을 살피며 언제 황도를 떠날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반란군이 가하고 있는 압박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진회처럼 노회한 인물이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추밀사 섭평 때문이었다. 군부의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가 눈에 보이지 않게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책 회의가 지지부진하자, 진회는 무림맹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맹은 진회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오랑캐와의 전쟁이라면 거기에 참가할 명분이 있었지만, 동족끼리의 전투에까지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춘릉성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맹을 재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 * *
마교의 주력부대가 움직일 때는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여 전속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산간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관도(官道)를 통해 이동하라는 철영 부교주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마교도들은 마치 자신들이 개선군(凱旋軍)이라도 되는 듯 보무도 당당하게 대로를 행진했다. 하지만 행인이 많은 관도를 통해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강아지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음산한 마기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코를 박고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이런 광경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백성들을 위해 금나라와 대회전을 벌인 후인지라 사람의 행사가 괘씸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그런 개고생을 했는데, 이토록 푸대접을 하다니…….
“이렇게 천천히 이동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대산으로 돌아가 푹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군사의 조언에 철영 부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의 말이 옳다는 건 알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구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교주님.”
“지금 우리가 철수하는 게 군사는 옳다고 생각하나?”
철영의 물음에 설민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이미 목적은 다 이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물론 설민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마교 출신이 아니기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마교에서 성장하며 교의 오랜 염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철영은 군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목적을 다 이뤘다고? 대체 무슨 목적을 이뤘다는 말인가? 본교의 꿈은 무림일통(武林一統)! 그걸 현실로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코앞까지 왔었네. 이번 기회에 정파놈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원 전체를 정복해 나갔어야만 했단 말일세.”
철영의 말을 듣던 설민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부교주의 생각이 이럴 정도라면, 휘하 고수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부교주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아무래도 휘하 고수들을 좀 더 다독일 필요가 있겠군요.”
“그 때문에 무력시위 하듯 천천히 돌아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후다닥 돌아가면 뭔가에 쫓겨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말일세.”
설민은 철영이 왜 이렇게 느지렁거리며 십만대산으로 향하는 것인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좀 더 직접적으로 다독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직접적으로?”
“예, 교의 중추적인 분들을 모아 연회라도 베풀며, 지난 전투에 대해 치하를 하시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고개를 끄덕인 철영은 곧바로 수하를 불러 오늘 밤 대대적인 연회를 열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