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의 거의 모든 핵심고수들이 모여 연회를 즐긴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승전축하연이었던 만큼, 시작은 왁자지껄했다. 모두들 서로의 전공을 자랑하는 아주 기분 좋은 자리였다. 하지만 점차 술에 취해가자 분위기가 조금씩 어수선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철영이 가장 우려하던 사태로 발전했다.
그 시작은 장로 서열 2위인 동방뇌무 장로였다. 그는 커다란 술잔을 들고는 마치 기갈이라도 들린 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부교주를 빤히 바라보며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가 되더라도 그때 정파 놈들을 완전히 끝장을 냈어야 했습니다.”
철영 부교주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물론 끝장을 낼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본교 또한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을 걸세. 자, 쓸데없는 얘긴 그만두세. 대승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나누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로군.”
철영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관지 장로도 동의를 표했다.
“부교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아마 교주님께서도 그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확대하지 않으신 거겠지요.”
철영 부교주에게 직접 따지기는 힘들었지만, 관지 장로가 한 마디 하자 동방뇌무 장로는 잘됐다는 듯 관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그 잡것들을 몰살시킬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댓가는 치러야지. 자네는 무림맹을 멸하는데, 아무 희생도 없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관지 장로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하지 못하자, 기가 산 동방뇌무 장로는 다른 장로들을 쭉 둘러보며 외쳤다.
“모두들 잘 알겠지만, 지금껏 본교는 수차례에 걸쳐 중원 원정을 단행했고,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가능했단 말이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동방뇌무 장로의 지적에 천진악 장로 역시 불만 어린 표정으로 동조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건 동방 장로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춘릉에서 무림맹에 심대한 타격을 가한 다음, 곧바로 무림맹 총단으로 쳐들어갔다면 놈들의 씨를 완전히 말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뭔가 고명(高明)하신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것이겠지만, 무식한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더군요.”
천진악 장로는 군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군사, 교주님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이유를 알고 있으시오?”
천진악 장로가 갑자기 자신을 걸고 들어오자, 설민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안 그래도 모두들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기에 마공을 익히지 않은 군사로서는 그 눈빛을 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래서 내가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교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니 무조건 참가하라는 부교주의 명령이 있었다. 아니, 설혹 그 명령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철영에게 다른 장로들을 다독일 것을 조언했던 그였기에 이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문제는 술자리에서 장로들의 불만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설민의 잘못이었다. 마교는 강자지존 즉, 힘을 숭상하는 단체다. 그런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고수일 경우 타당한 불만이라면 거침없이 내뿜을 수도 있었다. 물론 상관이 그걸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최고위직인 철영이나 대호법이 자신들의 불만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참지 않고 불만을 내뿜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알지 못하는 설민에게 있어서 이 술자리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동방뇌무 장로의 얘기가 교주의 귀에 들어갔을 때, 교주가 어떤 반응을 벌일 것인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렸다.
물론 평소에 보던 교주라면 이 정도는 호탕하게 넘길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심약한 그로서는 한 번씩 잔혹한 모습을 드러내던 묵향의 그 뒷면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질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교주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그건…….”
창백하게 질린 설민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동방뇌무 장로는 분을 참기 힘들다는 듯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
“복안은 무슨 얼어죽을 복안!”
쾅!
“히익!”
설민의 안색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세인들에게 사람백정이라고까지 불리는 동방뇌무 장로다. 작달막한 키에다가 연경에서의 전투로 인해 한쪽 팔까지 없는 불구자가 되었지만, 그가 내뿜고 있는 위압감은 가히 두려울 정도였다.
“교주님께서 천하제일고수이심은 분명하나, 그분은 무공만 익히셨어. 사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교주님께서는 장로직은 물론이고, 그 어떤 전투단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으시지 않나.”
그 순간 철영 부교주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동방뇌무 장로의 기세쯤은 한낱 새 발의 피쯤으로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 광폭한 기운이.
술기운을 빌어 별 생각 없이 불만을 토로하던 장로들이었지만, 철영 부교주의 기세에 모두들 찔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영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방 장로! 말이 심한 것 같군.”
동방뇌무 장로도 자신이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거나하게 마신 술탓이긴 했지만, 그만큼 마지막에 내려진 교주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말실수를 했다고 느끼면서도 동방뇌무 장로는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고, 딱히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킨 다음 말했다.
“저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교주님께서도 자신이 없으시니까 전투 시에는 그 지휘를 부교주께 맡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교주님의 지휘 능력을 문제 삼는 건 문제가 있지 않겠나? 결국 교주님께서는 승리하셨네.”
지금껏 아무런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한중평 장로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저도 이번에 교주님께서 정파와의 결전을 회피하신 것은 불만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이번에 교주님께서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중평 장로의 말로 인해 좌중의 분위기가 교주를 성토하는 것에서 살며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철영은 느꼈다.
“자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짐작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교주님께서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것이겠지. 이번에 장인걸과의 전쟁도 그렇지 않았나. 설마 정파 놈들하고 손을 잡으실 줄이야……. 안 그렇소? 대호법.”
철영의 물음에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호계악 대호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허허, 물론이지요. 저는 지금껏 세 분의 교주를 모셨었지만, 당금의 교주님이 가장 심계가 깊으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 잡것들과 손을 잡으시겠다고 하셨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만, 결국에는 모든 게 교주님께서 생각하신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장로들도 대호법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무림맹과 공개적으로 손을 맞잡고 일을 벌인 교주는 묵향이 최초였으니까.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들 생각하지 말게. 노부는 조만간에 교주님께서 무림일통을 위한 행보를 시작하실 거라고 믿네. 그분이 아니시라면 그 누가 있어 본교의 염원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묵향이 있음으로 인해 현 마교가 사상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철영은 자리에 앉아있는 장로들을 쭉 둘러본 다음 힘차게 외쳤다.
“자, 오랜만에 모였는데 술이나 드세. 꼭 피를 봐야 맛인가? 무림맹, 그 잡것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놓은 것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교주님이시라면 머잖아 본교의 염원을 이룩해 주실 걸세. 자, 모두들 잔을 들게나. 그날을 위하여!”
“그날을 위하여!”
철영의 선창에 모두들 술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방금 전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모두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찾아올 그날을 기대하며…….
묵향의 또 다른 모습
양양성은 지금 거의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 무림인들은 모두들 자신의 문파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병사들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묵향이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유광세 상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황성을 향해 진격해 버렸기 때문이다.
연일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다 그들이 일시에 빠져나가 버리자, 양양성은 적막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한적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묵향은 아직까지도 양양성에 남아 있었다.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태산으로 급파한 홍진 장로의 보고를 듣기 위함이었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마화는 무의식중에 손을 더듬어 옆에 누워 있을 묵향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단 한 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지금껏 그녀 혼자 잠들었던 것처럼. 그것을 느끼는 순간, 마화는 눈을 살며시 떴다.
‘꿈이었을까?’
누운 채 살며시 눈을 떴다. 역시나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이 번쩍 깼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토록 사모했던 묵향과 맺어진 것이 단 하룻밤의 달콤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화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침실 안을 둘러봤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 있었던 흔적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후다닥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난간에 위태롭게 앉아 자신에게 달콤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남자를. 그녀는 꿈을 꾼 게 아니었던 것이다.
“좀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묵향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잔뜩 굳어 있던 마화의 안색이 살며시 풀렸다.
“아뇨, 많이 잤어요.”
“이리 와. 조금 후면 해가 뜰 거야. 같이 일출을 보면서 차를 마시자고.”
과연 동편 하늘은 타는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묵향을 향해 사뿐 발걸음을 옮기려던 마화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자신이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 그대로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머리는 뒤죽박죽 엉망일 테고, 어쩌면 눈곱도 붙어 있을지 몰랐다. 화장도 안 한 것은 물론이고, 하늘거리는 잠옷 바람으로 여기에 나와 있었다. 지금 그녀는 묵향에게 자신이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가슴을 가린 뒤 뒤로 주춤 물러섰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준비하고 올게요.”
“준비할 게 뭐가 있어? 그냥 이리 와.”
하지만 마화는 묵향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후다닥 침실로 뛰쳐 들어갔다. 그녀는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신 거람.”
사람들은 모두들 그녀가 꽤나 실력 있는 고수라고 평가해 줬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그만큼 기감이 뛰어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잔 묵향이 일어나는 것조차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잠들어 있었다니…….
우선 그녀는 흐트러진 잠자리부터 깨끗이 정돈했다. 그리고 곱게 몸단장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서는데 아무거나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세안은 물론이고 화장을 하는 데 걸린 시간도 꽤 되었지만, 옷을 고르고 입는 데 들어간 시간에 비한다면 그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마화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타는 듯 붉었던 하늘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사위는 훤하게 밝았다.
하지만 묵향은 난간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묵향 옆에는 같이 마시자던 찻잔 두 개가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채 놓여 있었다.
“미, 미안해요.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해를 바라보고 있던 묵향의 고개가 천천히 마화를 향했다. 묵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 해는 내일도 뜨는데 뭐. 아침이나 먹으러 갈까?”
“예.”
마화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같이 밤을 지새워 줄 것도 아닌데,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나한테 맞추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생활해. 정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마화에게 맞춰 줄 테니까.”
“아뇨, 저에게 맞춰 주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도 저는 꿈을 꾸는 것만 같거든요. 다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당신이 안 계시면 이 모든 행복이 다 꿈인 것 같아 두려워져요.”
“별 걱정을 다하는군. 나는 언제까지나 마화하고 함께 할 거야. 자, 아침이나 먹으러 가지.”
그렇게 말하면서 성큼 발을 떼는 묵향. 그런 묵향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밤새도록 난간에 앉아 있던 묵향의 모습하며…, 그처럼 뛰어난 고수가 자신이 말을 걸기 전까지 계속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혹시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내 마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인걸까지 없애 버린 마당에 더 이상 묵향에게 무슨 고민이 남아 있겠는가. 괜한 자격지심이겠지.
마화는 빠르게 묵향 옆으로 다가가 살며시 팔짱을 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배고파요. 밥 사 줘요.”
칭얼거리는 듯한 마화의 말투에 묵향은 씩 미소 지었다.
“뭘 먹고 싶어?”
다정하게 길을 걷는 그들의 뒤를 좌호법 초진걸이 10여 명의 수하들과 함께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