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6화 (652/930)

초류빈이 남긴 유산

다음 날 아침, 양양성을 떠난 묵향 일행은 먼저 초씨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왠지 수심에 차 있는 듯한 묵향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마화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한시도 묵향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초씨세가가 있는 지역에 도착하게 되자, 묵향은 수하들을 풀어 위치를 알아보게 했다. 잠시 후, 길을 물어보러 갔던 호법원 소속 무사 한 명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저쪽에 보이는 넓은 장원이 초씨세가랍니다, 교주님.”

초씨세가는 비록 오대세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래 된 도(刀)의 명문으로서 강호에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세가였다.

남궁세가가 예전과 달리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세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오랜 세월 정파 무림을 위해 선조들이 이뤄 놓은 업적들과 공헌 덕분이었다. 만약 보유하고 있는 세력만으로 따진다면 오래전에 남궁세가를 밀어내고 초씨세가가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초씨세가의 본거지는 제법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초씨세가의 본거지가 눈앞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웬일인지 세가를 코앞에 두고 묵향이 미적거리고 있자, 마화가 미심쩍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가주에게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나요?”

묵향이 초씨세가에 볼일이 있다고 했을 때, 마화는 그가 왜 그곳에 가려는지 금방 눈치 챘었다. 초류빈 부교주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리라.

마화의 물음에 묵향은 난감하다는 듯 대꾸했다.

“녀석의 어머니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게 문제지.”

슬쩍 눈치를 보니 초류빈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상당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마화는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제안했다.

“제가 대신 통보해 드릴까요?”

하지만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야 있나. 부교주의 죽음을 전하려면 본좌가 직접 가야 격에 맞지.”

말은 그렇게 단호히 하면서도 묵향은 전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그녀의 면전에 대고 ‘댁의 아들이 이번에 전사했으니 그리 아쇼.’ 하는 식의 통보를 해야 할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인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이라고 매도당하는 교주가, 이토록 인간적이라는 것에 마화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조용히 묵향을 바라보던 마화는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살그머니 초진걸 좌호법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부교주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시죠?”

물어보지 않으면 대답을 하지 않을 정도로 과묵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초진걸은 꽤나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묵향이 왜 초씨세가를 방문하려 하는지, 또 누구를 만나려고 하는 지까지 벌써 모든 조사를 다 끝낸 상태였다. 그걸 알고 있는 쪽이 경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초씨세가의 장로라고 들었습니다. 명문 출신으로 여자로서는 보기 드문 무재(武才)를 지닌 분이라고 하더군요.”

초진걸이 ‘보기 드문’이라는 표현까지 쓴 걸 보면 대단한 여고수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초류빈이 지녔던 무공에 대한 재능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을지도…….

마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초씨세가 쪽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화의 시선이 초씨세가 쪽으로 향했을 때, 귀청을 찢는 듯한 요란한 경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뎅! 뎅! 뎅!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경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조용하던 초씨세가의 본거지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묵향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갑자기 초씨세가가 경종을 울리고 분주해진 이유를 금방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을 호위한답시고 따라온 호법원의 고수 11명이 태연한 표정으로 초씨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인들이라면 그들 앞에서 감히 숨조차 내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마기를 뿜어내는 거마(巨魔) 11명이 졸졸 뒤를 따라왔으니 저들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여기서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빨리 방문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화가 묵향에게 말을 건네는 동안 초씨세가에서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일제히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청록색의 야행복을 입은 십수 명의 무사들이 메뚜기처럼 튀어나와서는 어딘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주위 문파에 구원을 요청하나 보네요.”

마화의 중얼거림에 묵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겨우 11명을 상대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다니……. 자존심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호호, 11명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뒤에 또 다른 후속부대가 있을까 겁내는 거겠죠.”

마화의 말대로 초씨세가는 꽤나 커다란 규모의 문파였다. 그리고 초류빈 같은 고수를 키워 낼 정도로 그 뿌리 또한 얕지 않았다.

그들이 겁내는 것은 이것이 마교의 전면적인 도발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세가의 총력을 기울인다면 11명의 마두들이야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후속부대가 뒤따라오고 있다면 도저히 답이 없는 것이다.

쓸데없이 일이 커진 것 같아 짜증이 치솟았지만, 묵향은 어쩔 수 없이 초씨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화와 호법원 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앞서 가던 묵향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더니 마화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네가 가지고 있다 전하는 게 모양새가 좋겠지.”

그러면서 묵향은 품속에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내 마화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뭐긴, 그녀석의 유품이지.”

보통 특별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정문에 급이 낮은 무사가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마교의 난입이 염려되는 시점이라 그런지 꽤나 높은 인물이 서 있었고, 그 덕분에 그는 한눈에 다가오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헉!”

“무슨 일이십니까?”

“너는 지금 당장 가주님께 아뢰라. 교, 교주가 왔다고 말이다. 빨리!”

“예?”

“빨리 가서 고하라니까!”

그렇게 명령한 다음, 그는 황급히 달려 나가 묵향에게 코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소생은 초씨세가의 정문을 맡고 있는 박진철이라 합니다.”

박진철은 묵향을 비롯해 그 뒤에 서 있는 마인들을 힐끔 쳐다본 다음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그들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마기에 자신도 모르게 두 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 가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하지만 교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였다.

“가주는 됐고, 본좌는 초운하(楚雲河)를 만나러 왔다.”

“초, 초운하요?”

“그래, 초운하 말이다. 여기에 초운하라는 여인이 있지 않더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박진철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왈칵 일그러졌다. 초씨 성을 쓰는 것으로 보아 세가 사람인 것 같긴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런 이름을 쓰는 여인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맹한 얼굴을 바라보던 마화가 가볍게 혀를 차며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교주님께서는 귀 세가의 초운하 장로님을 만나러 오셨어요.”

독수낭랑 종리운하가 초씨세가에 시집와 초씨라는 성을 부여받은 지도 어언 6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시집올 당시부터 뛰어난 고수였던 그녀는 세가 내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냈고,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런 그녀가 장로직에서 은퇴한 게 벌써 20여 년 전이다. 그녀는 남편 초풍천이 죽은 다음 날, 은퇴했던 것이다.

박진철이 세가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을 때쯤엔 그녀는 벌써 은퇴한 후였기에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한, 여자로서 장로직에까지 오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장로라는 말에 묵향이 찾는 여인이 누군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분이시라면 이미 은퇴하셨는데…….”

은퇴했다는 말에 묵향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여기 없느냐?”

“아, 아닙니다. 세가 내에서 기거하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박진철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 교주가 왜 가주가 아닌, 이미 은퇴한 장로를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지 못하겠다며 배짱을 부릴 담력은 아예 없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춘릉 대회전 이전에 일어났다면, 아마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듯 도를 뽑아 들었을지도 모른다. 세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딱 잡아떼며 말이다.

하지만 춘릉에서 공공대사와의 비무를 통해 보여 준 교주의 무위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도저히 인간이 펼치는 무공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만약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당연히 거짓말로 치부해 버렸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지났다고 감히 교주에게 개길 수가 있겠는가.

세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넓은 연무장을 지나칠 때쯤이었다. 수행원들을 거느린 가주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셨습니까? 교주.”

“오랜만이군.”

“자,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닐세. 자네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초운하라는 여인을 만나러 온 거야.”

초운하라는 말에 흠칫하는 듯했지만, 초우는 유연하게 행동했다.

“장로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쪽입니다.”

굳이 자신이 안내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선 것은 묵향이 왜 초운하 장로를 찾아온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묵향에게서 적대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 했다.

초우는 묵향을 안내하고 있던 박진철에게 시선을 돌려 지시했다.

“여기는 노부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맡은 일이나 하게.”

“옛, 가주님.”

“자, 이쪽으로…….”

초우가 안내한 곳은 초씨세가의 건물들 중에서 북쪽 외곽이었다. 그리고 산 아래쪽에 작은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초우 자신이 생각해도 가문의 장로를 역임했던 사람이 기거하기에 너무나 초라하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변명과도 같은 설명을 했다.

“원래는 내실 쪽에 기거하셨는데, 은퇴하신 후에 이리로 옮기신 겁니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남편 가까이 있고 싶으셨는지도 모르지요. 저 산 중턱에 묘가 있거든요.”

“죽었다는 보고는 들었네.”

차분한 묵향의 대꾸에 초우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운하의 남편, 그러니까 초풍천(楚風天)은 교주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고수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의 명호가 옥면일랑(玉面一郞)이었겠는가. 명호대로 겉모습이야 끝내 줬지만, 알맹이는 영 아니올시다였던 것이다.

그런 초풍천의 죽음을 마교 교주씩이나 되는 거물이 알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