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검황의 하야
옥화무제는 요즘 들어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교주를 죽이려던 계책은 실패해 버렸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무리수를 뒀던 모든 것들이 들통 나 버렸다. 교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이번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을 지금쯤이면 몽땅 다 파악해 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옥화무제에게 총관이 조언을 건넸다.
“지금이라도 그분께 사죄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그녀는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너무 늦었어요. 이제는 최소한의 이용가치도 없는데, 그가 이쪽의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껏 묵향과 오랜 세월 부대껴 온 만큼, 옥화무제처럼 묵향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묵향은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중간에 그만둘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사실, 무영문 같은 잡초처럼 끈질긴 문파를 대충 건드려 놓고 그냥 놔둔다면 그 뒤끝이 무한할 거라는 것을 교주도 잘 알 테니 말이다.
옥화무제는 고개를 들어 총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교 쪽의 동태는 어떤가요? 뭔가 변화가 있던가요?”
그녀가 요즘 들어 마교 쪽의 동태를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마교 쪽에서 본격적인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향의 성격으로 봤을 때, 가만히 참고 넘어갈 리가 만무한데 말이다.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요?”
그게 아니라는 듯 총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분께서 복수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아시는 게 있어야 공격을 해 오든 할 게 아닙니까. 새로운 정보는 태상문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그분께서 이번에 결혼식을 올리신답니다.”
“겨, 결혼식이라고요?”
옥화무제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껏 고자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여색을 멀리하던 묵향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결혼식이라니.
옥화무제는 교주의 속셈이 빤히 보이는 듯해서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결혼식을 빌미로 자신을 꾀어내자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그래, 상대는 누구라고 하던가요?”
“그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결혼식을 올린다면서 마교와 인연이 있는 모든 문파들에 초청장을 돌리고 있답니다.”
“당연히 본문에도 초청장이 왔겠죠?”
옥화무제의 물음에 총관은 침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천지문에는요?”
“천지문에는 초청장이 갔답니다. 문주가 받자마자 발기발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만…….”
옥화무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나를 밖으로 꾀어내기 위한 함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함정이라면 자신에게도 초청장이 와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 초청장이 오지 않았다는 말은 함정이 아닌 진짜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었다.
“뜬금없이 결혼식이라니…,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려뒀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입수된 것이 없습니다.”
“흠, 마교에 심어둔 끄나풀들을 통해서도 알아낼 수 없던가요?”
“안타깝게도 포섭한 자들 중에서 십만대산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번에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했었습니다만, 외부 지단에서 성장한 자들은 중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기본법규는 바뀌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정보가 있어야 그것에 맞는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는데 전혀 없으니 답답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뭔가 골돌히 생각하는 듯하자, 총관은 조용히 서서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경과된 후에야 옥화무제가 말문을 다시 열었다.
“현 단계에서는 미끼를 던져 보는 수밖에 없을 듯하네요.”
“미끼를…, 말씀이십니까?”
“일단 지단 1개를 노출시켜 보도록 하죠. 물론, 총단처럼 위장해서 말이에요. 그 후에 교주가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살펴보자구요.”
“총단처럼 위장하려면 아주 큰 희생을 치러야만 할 겁니다.”
근심스런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오히려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총관의 말에서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대한 그럴듯하게 만들라고 하세요. 모두가 그곳이 본문의 총단이라고 착각하도록 말이에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유는 많죠. 첫째, 총단을 공격할 때 마교 쪽에서 어떤 전술을 쓰는지 관찰할 수 있어요. 총단에 대한 방어는 완벽하다고 본녀는 자신하고 있지만, 의외로 그들이 허점을 찾아낼지도 모르죠. 교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는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찾아낸 허점을 이쪽에서 보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총관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상관은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너무 많은 피해가…….”
“둘째, 총단을 박살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 교주의 방심을 유도해 낼 수 있어요. 원래 우리 무영문의 전력이 그렇게 강한 것이 아닌 이상, 총단이 괴멸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이상 본문을 공격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화무제의 입에 살짝 교활한 웃음이 걸린다.
“이걸 기회로 무림맹에 다시 붙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점이죠. 맹은 우리가 마교와 뒷거래를 했던 것 때문에 의심 어린 시선으로 본문을 바라보고 있어요. 하지만 마교가 본문의 총단을 파괴하는 등의 커다란 피해를 입혀 흑백이 분명하게 밝혀진 후에도 우리를 경원시 할까요? 그러다가 덜컥 본문이 마교에 흡수라도 되는 날에는 끝장인데 말이에요. 더군다나 본문에는 내가 있어요. 안 그래도 교주를 상대할 수 있는 절대고수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니, 절대로 나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제서야 총관은 겨우 지단 하나를 던져 주고,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과연, 기가 막힌 계책이십니다.”
총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곧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맹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군사가 있다면 굳이 이런 피해를 입지 않고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는데, 정말 안타깝군요. 지금 당장 문주님께 보고하여 제대로 된 미끼를 준비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완벽하게 총단처럼 보여 줘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본문의 생사가 달린 일이에요.”
“제가 직접 가서 철저히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복명을 한 총관이 예를 올리고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옥화무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참, 총관!”
“예? 뭔가 하명하실 거라도…….”
“방금 떠오른 생각인데…, 흑풍대는 마기를 흘리지 않잖아요?”
뻔한 얘기를 물었기에,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총관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렇습지요.”
“흑풍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라고 이르세요. 본문을 상대함에 있어서 교주가 사용할 가장 강력한 패는 흑풍대가 될 가능성이 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심려하시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들이 양양성에 있을 때, 그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던 많은 정찰조들에게 노출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대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거기에다가 십인장급 이상의 경우 몰래 초상화까지 그려 뒀고 말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가 보도록 하세요.”
* * *
“맹주님, 맹주님!”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다급히 외치는 감찰부주의 모습에 맹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무슨 일인고?”
감찰부주는 맹주의 앞에 앉아있는 청호진인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인사했다.
“아, 사형께서도 와 계셨군요. 맹주님,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고?”
“교주가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린답니다.”
그 말에 청호진인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교주가 결혼식을? 더군다나 십만대산도 아니고 서녕에서?”
“예, 공수개 장로의 말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마교와 친분이 있는 여러 문파들에 벌써 초청장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개방에서 물어온 정보인 만큼, 결혼식을 올리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십만대산이 아니라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게 청호진인은 영 찝찝했다.
“함정이 아닐까?”
“함정…, 이라구요?”
“구태여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
“오히려 십만대산에서 손님을 받는 게 함정일 확률이 더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십만대산 안에는 외부인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될 수많은 기밀 시설들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본맹에서는 그동안 십만대산에 설치되어 있을 기관진식은 차지하고라도, 내부의 지형조차 알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보안에 철두철미한 마교가 아무리 교주의 결혼식이라지만 내부에서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십만대산에서 한다면 우리 쪽으로서도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지만 말이죠.”
“그건…, 사제의 말이 옳은 것 같군. 하지만 서녕에서 한다고 해서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며 좋아하기에는 힘들 것 같구나.”
“어째서 말입니까?”
“마교 쪽에서 대비를 하고 있을 게 뻔한 것도 있지만, 어느 세월에 장로들을 설득해서 무사들을 불러 모은다는 말이냐. 더군다나 춘릉성 전투 이후 맹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 상황에서 결혼식장에 쳐들어가 피바다를 만들자고 하면 장로들이 잘도 찬성하겠다.”
지금껏 조용히 듣고 있던 맹주가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청호의 말이 옳구나. 남의 잔칫집에 쳐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혹, 그자가 무림일통의 야욕을 드러내기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명분이 없다는 말이었다. 만약 춘릉성 전투 이후 마교가 무림일통의 야욕을 드러내며 피바람을 일으켰다면 정파의 모든 문파들이 무림맹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주는 교활하게도 중원을 침공할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역대 마교 교주와는 달리 평화를 원한다는 식의 가증스러운 연극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위기감이 사라지자 이제 남은 것은 맹주에 대한 성토뿐이었다. 맹의 수뇌부들은 처음에는 맹주를 두둔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군소방파들의 반발이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춘릉 대회전에 참가했던 모든 이들이 맹주가 벌인 추태를 빤히 봤는데, 그게 수습이 되겠는가.
시간이 지나 맹주에 대한 성토가 자신들에게까지 확대되자, 장로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맹주가 퇴진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말이 없던 맹주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로회에 전하거라. 노부가 물러나겠다고 말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맹주님.”
청호장로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태극검황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느니. 시간만 끈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될 뿐이니라.”
그렇게 말하는 태극검황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그가 맹주의 자리에 집착했던 것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문파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맹주직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그리 큰 미련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으로 인해 무당파가 오명을 뒤집어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