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5화 (66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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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은 오늘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가주님, 태극검황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태극검황께서?”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는 원로로부터 맹주가 물러났다는 보고는 이미 들었다. 하지만 그가 설마 이쪽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서문길의 준수한 인상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리 드시라고 하게.”

“예.”

잠시 후, 태극검황과 청호진인, 그리고 청수진인이 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모두들 무당파가 자랑하는 쟁쟁한 고수들이다.

“어서 오십시오. 본 세가에 몸소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허허, 맹주 자리에서 물러난 쓸모없는 늙은이를 이렇게 환대해 주니 고맙구려.”

“별 말씀을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서문길은 태극검황을 상석(上席)으로 안내했다. 가벼운 대화가 오가며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태극검황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용건을 슬그머니 꺼냈다.

“영존(令尊)은 집에 계시는가?”

수라도제 얘기가 나오자 지금까지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고 있던 서문길이 크게 동요했다.

“예? 아, 아버님은 왜……?”

“맹에 얽매여 있을 때는 서로가 바빠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했지 않은가. 이 근처에 온 김에 이리로 달려온 것은 오랜만에 영존과 담소나 나눌까 해서일세.”

태극검황의 말에 서문길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여기서 거절한다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다. 그렇다고 만나게 해줄 수도 없지 않은가.

“왜, 어디 출타라도 하셨나?”

“그, 그건 아니고…….”

“허어, 답답하구먼. 속 시원히 말해 보게.”

잠시 망설이던 서문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실직고했다.

“저, 아직 얘기를 듣지 못하신 모양인데, 지금 아버님을 만나시는 건…….”

서문길은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숨긴다고 해도, 결국에는 알게 될 게 뻔했다.

더군다나 무림맹 장로회의에서 공수개 장로에 의해 이 수치스러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숨긴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문길의 얘기를 들은 태극검황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다니……. 자네가 마음고생이 크겠구먼.”

“이해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라면 영존을 그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떻게 치료라도…….”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몸과 마음이 아주 건강하다 생각하고 계시거든요. 워낙 엄청난 무예를 지니신 분이라 강제로 치료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며 서문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동안 그는 수라도제를 치료하려고 안 해 본 짓이 없었다. 칼 들고 달려들어 사생결단을 내는 것 외에는 다해 봤던 것이다. 심지어 음식에 몰래 산공분(散功粉)까지 투입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 모든 방법들이 전혀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수라도제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기도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살짝 맛이 가 버린 후에는 전혀 타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맥하려는 의생마저도 자신에게 해코지하려 든다며 때려죽였을 정도니, 그토록 의심이 많은 인물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허어, 그렇다고 치료를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자네만 괜찮다면 노부가 치료를 하는 데 한팔 거들고 싶은데…….”

태극검황의 제의에 서문길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 왜 맹주 자리에서 쫓겨나듯 물러나야만 했단 말인가.

“이곳입니다.”

서문길은 직접 태극검황 일행을 수라도제가 묵고 있는 숙소로 안내했다.

수라도제가 기거하고 있는 곳은 서문세가의 후원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풍악 소리와 함께 간드러지는 듯한 여인네들의 교태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간혹 가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야릇한 비음까지 간간히 들려왔다.

“연회라도 즐기고 있는 모양이군.”

“…….”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서문길은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태극검황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의 눈앞에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들과 반쯤 벌거벗은 계집들이 서로 얽혀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술자리의 중심에 마련된 무대에는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계집들이 농염한 춤을 추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의 시선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사를 벌이고 있는 음탕스러운 년놈들도 눈에 띄었다.

태극검황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춤을 추던 계집들 중 하나가 신경이 쓰이는지 잠시 멈칫 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픽 쓰러졌다. 그녀의 이마에 젓가락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누가 춤을 멈추라고 했느냐?”

수라도제의 일갈에 춤을 추는 계집들의 몸놀림이 더욱 농염해졌다. 모두들 남자를 홀릴 듯 교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태극검황은 그녀들의 눈동자 속에서 깊은 절망과 공포를 발견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맹주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시오?”

미쳤다고는 하지만 수라도제는 방문객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태극검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귀하와 얘기나 나눌까 해서 찾아왔소이다.”

그러자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수라도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버럭 소리쳤다.

“너희들은 어서 손님을 맞이하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귀한 손님들께서 오셨단 말이다!”

수라도제 옆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허겁지겁 일어서더니 육감적인 몸짓으로 태극검황 일행에 팔짱을 끼며 그들을 술상으로 안내했다.

그녀들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팔을 통해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졌다. 모두들 음탕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홀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들 공포에 질려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이때 술을 마시던 사내 녀석 중 하나가 수라도제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슬그머니 일어나 죽어 있는 계집을 옮기는 게 보였다. 놈이 시체를 질질 끌고 가자,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바닥에 혈선이 길게 이어졌다.

무심코 그 흔적을 쳐다보던 청호진인의 눈살이 왈칵 찌푸려졌다.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한쪽 구석에 시체 몇 구가 더 나뒹굴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청호진인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기 힘들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어,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만행을…….”

태극검황 일행이 자신의 행동에 경악을 하건 말건 수라도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여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랑을 했다.

“저것들을 데려온다고 근처에 있는 모든 기방들을 다 털었소이다. 어떻소? 그런대로 쓸 만하지 않소이까?”

태극검황 일행은 모두들 전대의 고수들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며 경험을 쌓아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만을 쫓는 인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공공대사가 왜 만사불황이라고 불렸는지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아마 정신을 차리기 전의 공공대사를 만났더라면 이와 유사한 광경을 볼 수 있었으리라.

수라도제가 주화입마에 빠져서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태극검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챙!

순간적으로 태극검황의 허리에 매여 있던 검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듯 저절로 뽑혀 나왔다. 그리고는 수라도제를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라도제의 뒤편 벽에 걸려 있던 그의 애도(愛刀)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

검과 도가 공중에서 맞부딪쳤을 뿐인데도 강렬한 폭음과 함께 그 충격파에 건물이 뒤흔들렸다. 그 순간, 태극검황의 뒤편에 서 있던 청호진인과 청수진인도 검을 뽑아들고 수라도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3명의 전대 고수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문길은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버지를 향해 달려드는 적을 향해 그 역시 도를 뽑아들고 맞서야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발 잘되어야 할 텐데…….”

서문길은 그저 간절히 염원했다. 아버지가 큰 상처 없이 태극검황에게 제압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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