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곡추를 물러나게 한 후,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지도를 쳐다봤다. 그 전에 입수했던 무영문 총단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왜곡된 엉터리 정보라는 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홍진 장로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 수하들을 풀어 자세히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그럴 필요 없다.”
“예?”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거든. 외부와 접촉이 빈번해지면 날파리들이 끼어들 여지가 높아진다는 것 말이야.”
묵향의 지적에 홍진 장로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수하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인걸을 치는 과정에서 비마대는 무영문과 아주 깊은 협조체제를 갖췄었다. 어쩌면 그러는 와중에 무영문에 포섭된 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지금 감사를 할 필요는 없어. 자칫 무영문에서 눈치 챌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야. 운이 좋다면 둘 중 하나는 진짜겠지. 물론 둘 다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조사도 제대로 안 해 보고 무턱대고 병력을 움직인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더군다나 목표가 두 군데가 아닙니까. 흑풍대의 전투력을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반으로 나눠진 병력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더군다나 총단이라고 밝혀진 곳들이 둘 다 산 속이라, 흑풍대로서는 최악의 조건이지 않습니까?”
“흠,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군사를 불러오게. 흑풍대를 통한 기습작전에 대한 안건도 그 녀석이 만들었으니, 뭔가 괜찮은 계책을 내놓을지도 모르지 않나.”
잠시 후, 군사 설민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군사부(軍師部)에서 여기까지 꽁지 빠지게 달려왔는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서 오게.”
“헉헉, 차,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그래, 그렇게 달려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자, 이쪽으로 앉게.”
설민에게 자리를 권한 뒤 묵향이 부른 용건을 말했다.
“무영문 토벌작전에 있어서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네.”
묵향을 대신해 홍진 장로가 좀 전에 들은 진곡추의 얘기를 군사에게 자세히 설명해 줬다.
설민은 홍진 장로가 건네준 지도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더니, 이내 흥이 난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그 전에 획득한 것에 비해 훨씬 더 그럴듯하군요.”
“맞아. 그래서 자네를 급히 부른 거야.”
“그렇다면 목표물을 이쪽으로 변경하면 어떻겠습니까? 이쪽이 훨씬 무영문의 총단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요?”
잠시 고심하던 묵향이 대답했다.
“만에 하나라는 말도 있으니, 본좌는 둘 다 때려 부숴 버렸으면 하는데…….”
묵향의 말에, 옆에 서 있던 홍진 장로가 끼어들었다.
“이 두 곳의 위치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데다, 새로 발견된 곳은 아주 남쪽이지 않습니까. 흑풍대를 반으로 나눠서 보내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사실, 무영문만을 상대한다면 흑풍대의 절반 정도만 있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무영문이 뭔가 수작이라도 부려서 무림맹과 충돌이라도 일으키도록 만든다면 전멸당하기 딱 좋은 숫자이기도 했다. 새로 알려진 총단이 있는 지점으로 내려가려면 무림맹이 위치한 지역 인근을 통과해야만 하니 말이다.
한참 동안 지도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설민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는지 입을 연 그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흑풍대를 나눌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따로 공격하면 되지요.”
“어떻게 그렇게 한단 말인가?”
“바다를 이용하면 됩니다.”
“바다를?”
무슨 소리냐는 듯 멍한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던 홍진의 안색이 서서히 밝아졌다. 하지만 그에 비해 묵향의 안색은 핼쑥하게 질렸다. 바다라고 하니 끔찍했던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마교와 무림맹의 거래
“드디어 마교가 움직였답니다.”
총관의 보고에 옥화무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내심으로는 크게 안도했다. 상대가 제대로 흔적을 알아먹었는지 몰라 그녀는 꽤나 망설였었다.
그들이 망설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흔적을 좀 더 노골적으로 보냈었다면, 스스로 다 된 밥에 침을 뱉어 버릴 뻔하지 않았나. 그냥 참고 가만히 있기를 백번 잘한 것이다.
“그래, 어느 길로 내려오고 있나요?”
“그게…, 아직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총관의 대답에 옥화무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짜증 섞인 어조로 총관을 질책했다.
“그게 말이 되나요? 비영단원들의 상당수를 1차 탐색지에 물샐틈없이 배치해 놨는데, 도대체 어디로 빠져나갔다는 건가요?”
옥화무제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마교도들이 10일 동안 전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십만대산에서부터 동심원을 그렸다. 그 동심원의 제일 안쪽이 1차 탐색지, 두 번째가 2차 탐색지, 그런 식으로 탐색지마다 비영단원들을 촘촘히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옥화무제의 질책에 총관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마교도들이 이동했었던 지점들을 중심으로 요원들을 중점적으로 배치해 놨었습니다. 그런데 마교도들이 갑자기, 그것도 한밤중에 북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는지라…….”
옥화무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규모도 파악하기 힘들었겠군요.”
“예, 최소한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짐작된답니다.”
“수천 명이라……?”
자세하지 못한 정보에 옥화무제는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를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아무리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지만 요원들이 그들의 숫자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들 개개인이 내뿜는 마기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여유는 더더욱 없었으리라.
이렇게 되면 이번 작전을 위해 마교에서 투입한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예 짐작조차 불가능해져 버리는 것이다.
마교도들의 행적을 놓치기는 했지만, 옥화무제는 아직까지 여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가 어딘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도록 조치하세요.”
“이미 조치를 취해 놨습니다. 다음에는 그들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출발하더라도 이렇게 어이없이 놓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총관의 거침없는 대답에 옥화무제는 그제서야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급히 물었다.
“미끼에 문제점은 없겠죠? 혹시나 거기서 엉뚱한 자료라도 새나가면 곤란해요.”
“염려 놓으십시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했습니다. 그곳에 쌓여 있는 문서더미들 중에서 쓸 만한 것은 단 한 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적의 공격을 받자마자 모두 불태워 버릴 겁니다. 마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총단이 아니라 분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잘했어요.”
옥화무제의 표정이 한결 느긋해졌다.
잠시 지도를 바라보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침투경로는 뻔해요. 북쪽으로 올라가며 우리 쪽의 추적을 따돌린 다음, 아래로 내려오겠죠. 마기를 숨기면서 내려올 만한 길이라고 해 봐야 뻔한 거 아니겠어요? 인적이 드문 곳들을 중점적으로 관찰하라고 비영단주에게 전하세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총관은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옥화무제에게 조언했다.
“마교의 주력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무림맹에도 통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우리가 망하는 걸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도와줄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마교가 본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렇겠지만, 우리 쪽을 흡수하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건 꽤 괜찮은 계책이로군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예, 태상문주님.”
“그리고 추밀사를 우리 쪽으로 포섭하라고 문주에게 전하세요.”
“추밀사를 포섭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금나라 쪽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만큼, 황실에서는 전력을 다해 반란을 진압하려 들 겁니다. 비록 반란군들이 아무리 정예라 해도 결국에는 진압당할 게 뻔합니다.”
옥화무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마교가 돕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마교가 변수에요. 그런 만큼 혹여 반란이 성공했을 때, 그 달콤한 과실이 마교 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미리 침을 발라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총관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아, 그렇군요. 즉시 문주님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에 마교의 준동을 알릴 때, 그들이 반란군들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것도 함께 전하도록 하세요. 뭔가 흑심이 있지 않고서야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말이에요.”
“기가 막힌 계책이십니다. 즉시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이 물러난 후, 홀로 남은 옥화무제는 다시 한 번 지도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감히 본녀를 없애겠다고? 아직 100년은 이르다.”
자신 있게 말하던 옥화무제는 갑자기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마교는 십만대산 인근으로 이어져 있는 산맥을 타고 중원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 멀리 북쪽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아무리 그런 꽁수를 쓴다고 해도, 결국에는 산맥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 만큼 내려올 길은 뻔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아차! 그 방법이 있었구나.”
그것은 바로 귀식대법이었다. 이미 장인걸의 수하들이 사용하여 그 유용성을 확실히 입증했다. 백량 장로가 이끄는 종남파 고수들을 상대로 말이다. 기습부대는 완벽하게 함정에 빠졌고, 철저히 궤멸 당했다. 그 이후, 무림맹 쪽에서는 최대한 조심했기에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다시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식대법에 관한 정보를 마교 쪽에는 알려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마교가 그런 수법을 쓰게 되면 골치 아파지는 것은 정파 쪽이었으니까.
확실하게 정보 통제를 해 왔기에, 귀식대법을 이용한 편법을 마교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대금전쟁을 봐도 마교 쪽에서 귀식대법을 이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이 모르는 척하며 일부러 써먹지 않았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요량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마교도들이 어디로 내려올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수없이 많은 관도들을 이용할 수도 있었고, 선편을 이용해 강을 따라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마교도들이 어떤 방법을 쓰던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대의 수법을 옥화무제가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우마차를 이용하는 대규모 상단도 조사하라고 해야겠어. 호호홋! 가소롭기는……. 겨우 그런 얄팍한 수로 본녀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옥화무제는 묵향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하자, 그동안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들이 한 번에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소리 높여 웃을 수 있었다.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을 다 풀어 버리기라도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