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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마교의 압박 아래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느냐로 고심했었던 곤륜파였다. 하지만 지금 곤륜파는 개파 이래 최고의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곤륜무황이 맹주로 선출되었고, 꿈에도 그리던 중원 진출도 실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원 진출을 내세우며 분타를 건설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속셈은 따로 있었다.
「마교와 정면충돌을 벌이는 미친 짓은 두 번 다시 하기 싫다!」
지금껏 마교와 충돌하며 숱한 피를 흘렸던 그들의 자그마한 꿈이었다. 문파의 명운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마교가 발흥할 때마다 화살받이로 그 짓을 하자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마교의 교주는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고, 그의 수하들 또한 막강했다. 지금은 평화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가 언제 역대의 교주들처럼 중원정벌을 단행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결심을 하는 순간, 곤륜파는 멸문당할 가능성이 컸다. 교주는 그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곤륜파는 마교와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마교가 중원에 진출하더라도 그 진격로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옮겨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호남성 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천자산이었다. 곤륜산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천자산에 분타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거지를 통째로 옮기는 것은 극비사항이었다. 무림의 다른 문파들은 아직까지도 곤륜파가 방파제 구실을 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만약 곤륜파가 분타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아예 짐을 싸서 이사 갈 생각이라는 걸 그들이 눈치 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방해할 게 뻔했다.
그렇기에 겉으로 봤을 때, 곤륜파는 예전과 비교해서 전혀 변화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내부를 보면 꽤나 많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먼저, 곤륜파가 자랑하던 핵심고수들의 태반 이상이 천자산 분타와 무림맹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오늘도 곤륜파의 수뇌부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기반을 천자산으로 옮길 수 있을까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송인 장로, 출발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는가?”
무원(戊元) 장로의 질문에 송인 장로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사숙. 이미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화물에 이상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야.”
“염려 마십시오, 사숙.”
똑 부러지는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 웃은 무원 장로는 고개를 돌려 장문인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예, 말씀하십시오, 장로님.”
장문인은 무원 장로의 호명에 공손하게 허리를 조아렸다. 하기야 공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문인의 사조뻘이었으니까.
다른 문파들 같았으면 무(戊)자배나 송(松)자배는 오래전에 은퇴하여 느긋하게 우화등선 할 준비나 하고 있어야 했겠지만, 곤륜파는 모든 이들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고수가 필요했기에, 곤륜파에서는 은퇴라는 게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곤륜파는 장로들의 연배가 다른 문파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이는 많았지만, 산속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세속에 물든 중원의 도인들에 비해 훨씬 더 순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본문의 오랜 꿈이 이뤄지려는 중요한 시점이니, 제자들의 입단속에 더욱 신경 쓰도록 하시구려.”
“염려 놓으십시오. 자나 깨나 조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때, 문도 한 명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그는 공손히 장로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후, 장문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마교에서 사자(使者)가 도착했습니다.”
“사자가?”
예전 같았으면 불문곡직하고 바로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사자랍시고 찾아와서 놈들이 하는 소리야 언제나 뻔했으니까. 사자에 따라 표현하는 방식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결국 요지는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태사조(太師祖)께서 교주와 약간의 친분을 쌓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태사조께서 맹주가 되어 무림맹으로 갔다는 것을 마교에서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왜 맹으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이쪽으로 보냈느냐 하는 것이었다.
장문인은 조용히 지시를 기다리는 듯 무원 장로를 바라봤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는지 무원 장로는 허둥지둥 말했다.
“이리로……. 아니지, 접객원(接客院)으로 그 시주를 모시도록 하거라.”
“예, 장로님.”
“장문인은 나와 함께 가십시다. 그가 만나기를 원하는 것은 장문인일 터이니.”
무원 장로의 말에 장문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장로님.”
장문인이 무원 장로와 함께 접객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마교의 사신이 당도해 있었다.
사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만한 기세에, 이런 인물을 사신으로 보낸 교주의 저의를 두 사람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굵은 눈썹에 사각진 턱, 게다가 얼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렁이 같은 흉터들까지.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에 가공할 만한 마기까지 풀풀 뿜어대고 있는 걸 보니, 이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공갈 협박하려고 왔다는 오해를 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시비를 걸겠다는 건지, 아니면 알아서 기라는 건지.
상대의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장문인이 위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커흠, 천마신교에서 오셨다 하셨소이까?”
그러자 장문인의 예상과 달리, 사신은 재빨리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생긴 것과는 사뭇 다른 정중함이었다.
“저는 천마신교의 좌외총관 여진이라고 합니다. 지존의 명을 전하기 위해 귀 문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험한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서로 간에 인사가 오고 간 후, 장문인은 소박한 다과를 권했다.
“산속의 도량이다 보니, 대접할 만한 것이 없구려.”
“괜찮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하시었소?”
“예, 이것을 전해 드리려고 오게 되었습니다.”
여진은 품속에 손을 넣어 두툼한 책자를 하나 꺼내 장문인에게 건넸다.
책자를 받아든 장문인은 왜 이런 걸 주냐는 식의 얼굴을 하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본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파 비급의 목록입니다.”
“정파 비급의 목록이요?”
그 말에 무심결에 책장을 펼치던 장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책장을 쥐고 있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함께 배석해 있던 무원 장로는 혹, 상대가 암습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런 어조로 급히 물었다. 혹시 책장에 독이라도 묻혀놨나?
“장문인, 괜찮으시오?”
“괘,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문인을 보고 나서야 무원 장로는 충격을 준 것이 바로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장문인 뒤편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어깨 너머로 책의 내용을 훔쳐봤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얼굴 또한 장문인의 표정과 비슷하게 변해 버렸다.
오랜 세월 도를 닦아 정심하던 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것은 책자에 기록되어 있는 무공들의 이름들이었다. 그 중에는 곤륜파에서 오래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무공들도 다수 끼어 있었는데 특히, 태허검보(太虛劍譜)는 다시 얻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을, 곤륜이 자랑하던 절학이었다.
장인걸과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무황과 교주 간에 모종의 밀약이 오갔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뭔가를 해 주는 대가로 마교가 수집해 놨던 정파 비급들의 사본을 제공해 준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대감에 부풀었던가. 하지만 곧이어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돌연한 무림맹의 배신. 그런 상황에서 마교가 비급을 줄 리 없다는 것은 당연한 추측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비급들의 목록을 보여 주는 저의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걸 줄 테니 또 다른 밀약이라도 맺자는 건가? 아니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보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무원 장로가 여진에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이걸 보여 주는 이유를 알고 싶소.”
장문인도 아니고,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 인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질문을 던지자 여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교 쪽 입장에서 봤을 때, 장로가 아무리 연배가 높다고 해도 교를 이끄는 지존은 교주였다. 그렇기에 그는 무원 장로가 장문인을 앞에 두고 불쑥 끼어들었다는 게 매우 불쾌했다. 그는 무원 장로를 무시하고 장문인에게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5일 후, 목록에 적힌 비급들이 모두 다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맹주께서 여기까지만 운반해 주면 그 뒤는 귀 문파에서 책임지고 무림맹까지 운반할 것이라고 하셨다면서요. 혹시 변동사항이 있습니까? 장문인.”
주겠다는 데야 반론의 여지가 있겠는가. 혹시 교주의 마음이 바뀌어, 주지 않겠다고 할까 두려웠던 장문인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없소. 응당 그렇게 해야지요.”
장문인과 무원 장로는 그 후로 여진과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둘 다 정신이 딴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무를 마친 여진이 돌아간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장문인은 아직까지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지금 자신이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결국 장문인은 슬그머니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 고통이 밀려오는 걸 보면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때, 옆에 앉아 있던 무원 장로가 감격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허허, 말로만 들었던 태허검보를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장문인.”
태허검법은 곤륜이 자랑하던 최고의 검법들 중 하나였다. 꽤나 난해한 상승무공으로서 익힌 사람도 몇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번 마교동란 때 검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무공을 익힌 사람도 모두 다 전사해 버려 맥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에 곤륜의 후인들은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었다.
“참,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사숙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겠구려.”
무원 장로가 그렇게 말하고 허둥지둥 일어설 무렵, 문인들이 달려와 장문인에게 고했다.
“무림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문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령이 도착했다.
“맹에서 왔느냐?”
“예, 장문인. 이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령은 품속에서 서신 한 장과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장문인이 서책을 펼쳐 앞부분을 보니, 방금 전에 사신이 전해 준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곤륜무황이 장문인에게 마교와의 밀약에 대해 통보하기 전에, 마교 쪽에서 먼저 사신이 도착했던 것이다.
서신을 쭉 읽은 장문인은 그것을 무원 장로에게 건네줬다.
“맹주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계시군요.”
“그렇다면 방금 전에 사신이 와서 5일 후에 물건이 도착할 거라고 했다는 것을 맹주께 알리는 게 급선무이겠소이다. 빨리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장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