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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 분타주를 통해 전해진 무림맹이 마교의 손을 들어 줬다는 소식은 옥화무제의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맹주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교주의 손을 들어 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옥화무제가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녀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맹주는 아직 세상물정이 어두워 무영문이 지니고 있는 정보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지만, 결국에는 무영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대 맹주들이 그러했듯이…….
문제는 맹주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까지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그것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마교가 아직까지 총단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무영문을 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옥화무제는 교주가 아무리 잔대가리를 굴려 봐야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 거라 자신했었다. 하지만 북쪽으로 행방을 감춰 버린 마교 전투단의 종적을 찾아내는 것에 있어서 예상외로 난항을 격자, 조금씩 자신감이 사라지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멀리 돌아 요동쯤에서 남하해 온다 해도, 지금쯤이면 행적이 노출되어야 할 게 아니겠는가. 혹시 자신이 예측을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옥화무제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마교도들이 북동쪽으로 우회한 것이 아니라 서남쪽으로 우회한 것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비영단 몇 개조를 그쪽으로 파견한다면…….’
하지만 옥화무제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한 여유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 쪽에서 귀식대법을 쓸 경우를 가정해 화물운송로까지 점검하다 보니 인력이 턱도 없이 모자랐다. 만약 다른 곳으로 인원을 빼려면 뺀 곳은 커다랗게 구멍이 뚫리는 셈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옥화무제는 속이 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2개월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정기보고를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총관에게 옥화무제는 초조한 안색으로 물었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나요?”
“흥미로운 정보가 하나 입수되었습니다.”
옥화무제는 기대에 찬 어조로 다급히 물었다.
“그, 그게 뭔가요?”
“만통음제 대협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현재 거리를 두고 관찰 중이라고 하는데…….”
변방 골짜기들을 이 잡듯 집중적으로 뒤지다 보니 얻어 낸 성과이기는 했지만, 옥화무제의 입장에서는 때늦은 정보였다.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그녀는 왈칵 짜증 어린 어조로 질책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따위 일까지 신경을 쓴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데 인원을 낭비하지 말고, 맡은 일이나 제대로 처리하라고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총관이 찔끔해서 대답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도 말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덧붙였다.
“만통음제 건은 이번 일이 끝난 다음에 확인해 보도록 하세요.”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총관은 결제받기 위해 가지고 들어온 문서를 옥화무제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부문주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추밀사에 대한 포섭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중간보고입니다.”
손녀가 어떻게 일처리를 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방금 전 드러났던 옥화무제의 짜증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매영인은 그녀가 사랑하는 손녀였으니까. 보고서를 훑어보던 옥화무제의 얼굴에 따사로운 훈기가 감돌았다. 아마도 매영인이 제법 일처리를 잘해 놓은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황급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일에 총관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순간, 옥화무제가 새침한 표정으로 쓱 턱짓을 했다. 총관은 즉시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문 앞에 초조한 얼굴로 서 있던 문관이 소리쳤다.
“흑풍대를 찾아냈답니다.”
문관의 보고에 총관은 깜짝 놀랐다. 흑풍대는 또 언제 십만대산에서 튀어나갔단 말인가. 그러다 일전에 옥화무제가 흑풍대를 예의 주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녀의 선견지명에 내심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화무제는 환한 얼굴로 문관에게 물었다. 교주가 어떤 계책을 써서 미끼를 공격할지 알 수가 없어서 찜찜했었는데, 이제야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에서 찾았다고 하던가요?”
“황토고원의 동쪽 끝단, 대동(大同) 인근이라고 하옵니다.”
문관은 가지고 온 전서를 총관에게 넘겨준 다음, 공손히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총관은 건네받은 전서를 즉시 옥화무제에게 전했다. 급히 전서를 읽어 내려가던 옥화무제가 갑자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서의 내용 중에 관지 장로와 함께 이동 중인 교주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총관이 급히 물었다.
“뭔가 심기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교주를 발견했다는군요.”
“그분께서 흑풍대와 함께 움직이고 계시다는 겁니까?”
옥화무제는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뽀드득 갈았다. 교주가 몸소 흑풍대와 동행하고 있는 이유는 뻔했다. 직접 자신의 목을 자르겠다는 의미이리라.
‘망할 새끼! 그렇게도 내 목을 자르고 싶었단 말이지?’
옥화무제는 표정을 평온하게 유지하려 애썼지만, 불쾌해진 기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분이 함께 있는 걸 보면 흑풍대가 마교의 주공(主攻)임에 분명합니다. 사실, 흑풍대의 전력만 하더라도 본문을 쓸어 버리는 데는 충분할 테니까요.”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그녀는 급히 총관에게 물었다.
“참, 십만대산 쪽에서는 연락이 들어온 게 없었나요?”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십만대산에서 빠져나갔다는 수천 명에 달하는 마인들이 교주가 투입한 주공격대라고 그녀는 판단했었다. 하지만 흑풍대와 함께 이동 중인 교주가 발견된 이상, 그들은 흑풍대가 외부로 비밀리에 빠져나가기 위한 바람잡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옥화무제는 결단을 내렸다.
“비영단주에게 북쪽으로 파견했던 요원들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전하세요. 대신, 미끼 쪽으로 들어오는 모든 통로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라고 하세요. 귀식대법을 썼을 가능성도 무시하기는 힘드니까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총관이 물러간 후, 옥화무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한 번 지도를 살펴봤다. 그녀도 자신의 성격이 뭐가 문제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과도할 정도로 완벽성을 추구하는 그녀의 성격은 거의 병적일 정도였다.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다.
만약 마교 쪽에서 이런 옥화무제의 성격을 이용하기 위해 마인들을 어딘가에 숨겨놓은 거라면, 그건 제대로 그녀의 약점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연막전술을 펼치기 위한 병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 미끼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옥화무제는 계속 찜찜한 기분을 금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 * *
공격목표가 2개인만큼, 묵향은 2개의 공격집단을 구성했다. 첫 번째 집단은 묵향이 직접 지휘하는 흑풍대였다. 그리고 두 번째 집단은 철영이 지휘하는 3개 전투단으로 구성했다. 두 번째 공격집단의 규모가 이토록 엄청난 이유는 이들의 이동경로가 그만큼 험난했기 때문이다.
십만대산을 벗어난 묵향과 그 수하들은 곧장 북진했다가,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타클라마칸 사막을 관통한 다음, 몽골 벌판으로 들어갔다.
공격대는 거기에서 헤어져, 묵향과 흑풍대는 아래쪽으로 남하하여 금나라 영토 쪽으로 들어갔다. 타국의 영토인 만큼 아무래도 그쪽이 무영문의 감시가 소홀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철영 부교주가 지휘하는 2번째 집단은 몽골 벌판을 통과하여 요동으로 들어갔다. 묵향이 이계에서 돌아왔을 때 처음 접촉했던 둥루젠족(나중에 설민에게 물어보니 이들이 바로 동여진족이었다.)의 영토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철영과 그의 수하들이 사막과 대초원을 가로지르며 기가 막힌 고생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영문의 이목을 속이고 이동하기 위해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여진족이 묵향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만난 것은 묵향이 아니라 다크였으니까. 하지만 철영과 그 수하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동여진 야만족들의 반발 따위는 단숨에 잠재워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무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철영이 이끄는 전투단은 연해주(沿海州) 지역에 도착했다. 이 일대가 바로 야만적인 해적들의 집단, 동여진족의 영토였다. 혹독하기 짝이 없는 자연 조건으로 인해 식량의 자급자족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식량수급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해적질이었는데,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왜국이었다.
1차 목적지에 도착한 철영과 그 수하들은 그곳에서 후지와라 영주가 보내 준 배에 올라탔다. 물론 마사코가 영주에게 연락을 했기에 그곳에 도착하게 된 전선(戰船)들이었다. 전선을 이끌고 온 장수는 마교 고수들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질려 감히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강자들임에 틀림없었기에, 철영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나도 정중했다.
전선을 이끌고 온 장수가 하는 말을 왜인 통역관이 전했다.
“여기서 목적지까지는 대단히 먼 길입니다. 요시와라 장군께서는 재수가 없으면 폭풍을 만나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 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하셨습니다.”
통역관의 말에 철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군과 접선해서 배만 타면 고생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하니 짜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피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말하는 것이냐?”
“최악의 경우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답니다.”
최악의 경우 한두 척이 아닌 함대 전체가 침몰할 수도 있었지만, 통역관은 그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배를 타 본 적이 없는 무사들이었다. 바다를 모르는 무사들에게 폭풍의 무서움에 대해 떠들어 봐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함대가 통째로 침몰할 정도로 강한 폭풍이 그렇게 자주 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괜히 온갖 얘기를 다 떠들어놓고, 정작 도착할 때까지 폭풍을 만나지 못한다면 자신만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통역관은 비교적 가벼운 강도로 설명해 준 것이었건만, 철영과 장로들이 받은 충격은 예상외로 컸다. 침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대비책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조건 이 일은 성공해야만 했으니까.
만약 배가 침몰한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교 고수들의 대부분은 수영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는 돌덩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한다면 제아무리 수영의 대가라 하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어허,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로군요.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니 말입니다.”
천진악 장로가 걱정된다는 듯 중얼거리자 철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배가 침몰할 것 같으면 경공술을 전개해 옆 배로 옮겨 타면 될 건데,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부교주님, 그건 바다가 잔잔할 때 얘기지요. 더군다나 멀쩡한 배가 아무 이유도 없이 침몰하겠습니까? 폭풍 같은 걸 만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지, 폭풍이 있었군.”
철영은 통역관에게 물었다.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고 얘기한 건 폭풍 때문이었나?”
“예, 지금은 바다가 이렇게 잔잔하게 보이지만, 폭풍이 불면 파도가 엄청나게 거칠어집니다. 물론 전선이 상선보다는 훨씬 더 튼튼하게 건조되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가라앉기 전에 옆 배로 옮겨 타면 되지 않겠나?”
“파도가 거칠어지면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함선 간의 간격을 띄우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바다가 거칠어진 상황에서, 서로의 거리까지 더욱 벌어진다면 옮겨 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리라.
천진악 장로가 잠시 궁리하더니 말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전투단별로 승선할 게 아니라, 모두 섞어서 골고루 승선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재수가 없어서 혈랑대원들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혈랑대원 100명과 천랑대원 100명의 목숨값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자네 말이 일리가 있군.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게.”
“예, 부교주님.”
함대는 동해를 거쳐 대마도 인근을 통과해 황해로 빠졌다. 도중에 고려의 순시선을 몇 번 만났지만 그들은 근처에도 접근하지 않고 멀어져 갔다. 해적선도 아니고, 후지와라 대영주의 깃발을 높게 달고 있는 대규모 함대에 접근해서 제 무덤을 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통역관이 멀리 수평선에 아스라이 보이는 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기 보이는 게 주산군도(舟山群島)입니다. 넉넉잡아도 1시진 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겁니다.”
“드디어…….”
철영은 지독했던 그동안의 고생을 생각하면 두 눈에 습기가 차오를 정도였다. 극마급에 이른 그가 이토록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니. 벅찬 감격에 전율하던 철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통역관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지?”
통역관의 대답을 들은 철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초 계획보다 무려 3일이 늦어 버린 것이다. 2개의 목표를 동시에 가격해야 하는 만큼, 시간을 철저히 엄수해야 한다고 설민이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철영은 서둘렀고, 배를 탈 때까지만 해도 2주일 정도의 여유시간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오는 도중에 예상치 못했던 폭풍에 휘말리면서 오히려 3일이나 늦어 버린 것이다.
통역관은 철영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아무 일 없네. 자네는 수고했다고 요시와라 장군에게 전해 주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대기하다 한밤중에 육지로 접안해 주면 좋겠구먼.”
통역관은 철영의 말을 그대로 옆에 서 있던 선원에게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선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라 말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안 된다고 의미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한밤중은 너무 위험하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암초가 숨어 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더군다나 이 근처 바다로 와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많은 암초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해질녘쯤에 배를 대주게.”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철영은 다른 배에 타고 있는 장로들에게 손짓으로 모일 것을 명령했다. 재수 없으면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는 말에 철영은 출발하기에 앞서 대원들을 각 전선에 고르게 승선시켰다. 그 덕분에 폭풍을 만나 3척의 전선이 침몰하고 8척이 크게 파손당하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력의 핵심인 혈랑대 전원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각 전투단이 골고루 인명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말이다.
손짓을 보고 전선 3척이 철영이 타고 있는 대장선으로 접근해 왔다. 대장선과 적당한 거리까지 접근하자 각 전선에 타고 있던 장로들이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난간을 박차고 뛰어올라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허공을 가로질러 대장선에 도착했다. 왜인들은 그런 장로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교주님.”
“목적지가 코앞에 다가왔다.”
“드디어…….”
모두의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겨우 무영문 따위를 없애기 위해 이토록 지독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니…….
마교의 최정예로서 지금껏 두려움을 모르고 살아왔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대자연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던 열사의 사막.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광활한 초원. 그리고 자신들보다 약해 보이기만 하면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호전적인 야만족들까지. 그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배에 올라탈 때만 해도 그들은 이 배를 타기만 하면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 보니 지금까지의 고난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곧이어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가 뒤집어지는 듯했던 거대한 폭풍에 비한다면 전선은 마치 가랑잎처럼 작고 왜소한 존재였던 것이다. 제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만 했다.
거친 폭풍 속에서 3척의 배가 침몰했고, 그 속에 타고 있던 수하들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했다. 배들이 침몰했다는 것도 나중에 바다가 어느 정도 잠잠해진 후에야 파악했을 정도니, 물에 빠진 수하들을 구해 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들의 야무진 꿈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장로들은 아직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였다.
“요시와라 장군에게 말해 뒀으니, 함대는 해질녘에 육지에 접안할 거다. 상륙하는 즉시, 목표를 향해 돌격한다.”
“약속시간보다 3일이나 늦었는데 이대로 강행합니까?”
한중평 장로의 물음에 철영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강행하지 않으면 딴 방법이 있나? 십만대산으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으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부딪쳐 봐야지. 목표지점까지 최대한 빨리 진격해서 시간을 버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나.”
“부교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철영은 동방뇌무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특히 자네가 이끄는 혈랑대의 역할이 중요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늙은 여우의 목을 베야 해.”
“기필코 해내겠습니다.”
“한중평 장로, 자네는 혈랑대가 최고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뒤를 받쳐 주게.”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진악 장로, 자네는 후위를 담당하며 남은 적들을 철저히 소탕하도록 하게.”
“옛,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로들에게 지시를 내린 철영은 육지 쪽을 바라보며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상대는 무영문이다. 잠시의 빈틈만 줘도 지하로 잠적해 버릴 것이야. 놈들을 전멸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정신을 차릴 여유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